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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부유한 은행가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전학준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 사명을 띄고 1900년에 약관 27세 나이로 우리나라에(인천) 들어왔다.
그는 도착 즉시로 답동 천주교성당에서 경영해 나갈 인천박문학교를 설립하고 천주교신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자녀들에게 초급과정의 교육을 베푸는 일부터 착수했다.
4 년 후인 1904 년에는 비로소 답동성당 본당신부로 취임했다. 초창기예는 박문학교를 유지 경영하는데 많은 고초와 회생을 겪어야 했다.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1914년에는 학교 내에 여자부 교사 6학급을 신축하고 이듬 해에는 남자부 교사 6학급까지 신축하여 날로 학생들이 늘어가기 시작했다. 이 학교의 특징은 제3자의 도움없이 오로지 전 신부가 상속받은 유산만으로 만들어진 데 있다. 학교를 궤도에 올려놓게 되자 1930년에는 바오로 수녀원을 비롯하여 본당을 포함한 고아원 등 본당의 기반을 이루는 모든 시설을 갖추고 대규모로 증축했다.
그리고 역시 사재를 기울여 용현동과 영종도 등지에 20여 만평의 농토를 마련하여 보육원에 기증하고, 보육원 운영을 위한 재정적 기반을 굳혀 놓았다. 1937년에는 증가일로에 있는 신자들을 위하여 오늘에 보는 바와 같은 큰 성당건물을 준공하였고, 3충으로 된 현대식 해성병원을 개설했으며 또한 박문유치원을 설립 개원했다. 이렇듯 많은 사재를 기울여 이 고장을 위해 헌신하면서 육영가로서 불쌍한 사람들의 어버이로써 수도자의 지도신부로써 오로지 영생구제에 전념해 온 그는 74세로 일기를 마쳤다. |
드뇌신부 로 알려진 전학준 답동성성신부는 전기한바와 같이 인천지역의 역사적인물로 각인되어있는 분이며 답동성당의 소속 공소였던 영종도지역의 천주교회는(당시 돌박제,송산,잔다리,동강리공소) 드뇌신부의 사목하에 있었다.
그 당시 드뇌신부가 뮈텔 조선교구장에게 보낸 각종 서신중에는 영종도지역 천주교공소사목에 관한 생생한 자료들이 포함되어있다.
그 자료를 발췌해 보았다.
1904년 10월 21일
(전략)
일요일오후 1 시에 영종에 가야합니다.
이것은 어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화요일 정오에 돌아와야 합니다.
(당시 영종도에 들어가면 교통사정으로 하루를 자고 나와야했다.)
1909년 4 월 12 일
주교님
주교님이 9시25분 기차편으로 부천으로 가기위해 남대문역에 도착하시는 목요일아침에 제물포에서 첫기차로 당도한 한 교우가 영종 송산공소까지 주교님을 수행하시기위해 주교님한테 갈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대로 견진성사에 꼭 필요한 물건들만 가져오시기바라며 나머지 물건은 여기서 직접 보낼것입니다.
보니파시오신부는 성사집행때에 교우들 집에서의 사옥생활을 체험해보고싶어했습니다.
그는 특히 이번 영종에서 한국교회 전체의 성사집행에 관해 정확한 개념을 파악하지못할것으로 생각됩니다.
게다가 목요일 하루로는 충분치않으며 화요일인 내일 아침에 바로 신부를 오게 하려면 몇가지 물질적인 어려움도 있을것입니다.
그가 영종에 올생각이 아니라면 육지의 제물포지방에 있는 한두개의 공소를 보여주는것이 더 좋을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910년 8 월 18 일
(전략)
영종도에서는 교우들이 외관이 상당히 아름다운 경당을 지었습니다.
이경당은 열두칸인데 그 가운데 두칸은 특히 사제가 성사를 주러갈수있을때에 사제가 기거하도록 되어있습니다.
매주일, 각 가정이나 또는 여러 가정중에서 예전처럼 대송을 바친후 복음서낭독, 묵주신공을 바치고 교리문답설명을 위한 전체모임이 강당에서 이루어집니다.
거기서 미사를 드리는 날에는 작은 성당이 가득찹니다.
몇몇 예비교우들은 독실한 교우가 되었고 여러사람들의 선의 덕분에 올해 영종도에서는 좋은 정신과 전체를 위한 더할 나위없는 열성과함께 육지사람들과 섬사람들간에 조화를 발견할수있습니다.
(1910 년에 돌박제에 12 칸의 사제관과 강당을 갖춘 천주교회 건물이 새로 지어졌다)
(하략)
1913년 7 월 20 일
(전략)
영종에서 대세를 한 어린이 10 여명은 두번째 성사집행 때에야 보례를 받았습니다.
(중략)
영종 교우촌은 신입교우들 전원을 자신이 직접애쓰고있는 신심행사에 인도하고 싶어하는 남필우마태오 의 의견에 의하면 열성이 부족합니다.
본인은 마태오보다는 요구가 많은 편이 아닌데 사실이 그러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늘상 이유를 대고 언제나 이해를 해주는 그리고 끝에가서는 지키지않는 주일파공에 관한 결함만 없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할것입니다.
조그만 여학교에는 약 15 명의 어린이들이 모집했으며 그 가운데 5 명이 영세를 했는데 부모들은 보통 허락을 했습니다.
또 한해동안에 남녀성인 15 명이 영세를 받았습니다.
영세를 받은 몇몇 남편들이 신중하게 그들의 배우자를 준비할결심을 한다면 어린아이들도 그들의 기도문을 보다 잘알게될텐데 말입니다.
10 여 가정에는 외교인 어머니와 예비교우가 있는데 하지만 이 예비교우들의 자격은 되풀이되는 본인의 훈계와 사규 찰고에 그들의 부인들을 데려오도록 남편들에게 부여한 의무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오래걸릴 위험성이 있습니다.
영종도 청년들은 심각한 장애물을 만나고있는데 오래전에 충만한 만족을 주었던 청년 3 명은 냉담자가 되었고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유감스러운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런 곡절로 여러사람들은 성사에 오라는 권유에 " 그들은 1-2년 동안 쉬고 있지요"라고 대답합니다.
이같은 손실은 항상 애석한 일이며 인내도 때로는 힘들고 변덕도 어찌나 힘들던지 그 손실을 말하자면 불가피한 것입니다.
(하략)
1913년 9월 20 일
주교님께
(전략)
월초에 바로 영종도 교우들에게 견진성사 날짜가 9월27일로 확정되었음을 알리도록 했습니다.
섬에 오시기위해서 26 일 금요일에 주교님이 몇시기차를 타시는지 여쭈어보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그다지 넉넉지않다고여기시고 가급적 일찍 출발하시는것이 좋을듯합니다.
8시50분에 남대문역을 떠나 10시에 인천역에 내리시도록 감히 주교님께 제의 합니다.
인천역에는 주교님을 배에 안내할 책임을 진 교우가 기다리고 있을것입니다.
배를 타고 해안에 내려 돌박제까지 가는데 평균 2 시간이 걸리리라 예상하며 순조로운 여건속에서라면 주교님께서는 1 시전에 공소에 당도하실 것입니다.
윤토마가 제물포로 돌아오기전에 내일 주교님의 지시사항을 들으러 갈것입니다.
만일 주교님께서 도마가 26일 금요일에 주교님이 타실 아침기차편으로 가길 바라신다면 그에게 그렇게 말씀하시기바랍니다.
1914년 3 월 7 일
(전략)
사순절 두번째주에 영종도교우들에게 성사를 주기로 그들과 결정을 보았습니다.
(하략)
1914년 7 월 20 일
(전략)
제물포를 제외한 교우수는 상당히 안정적입니다.
203 명의 성인 영세자 126명의 교우자녀영세자 등 500명으 초과하는데 그 가운데 절반은 영종도 교우들입니다.
(1914년 당시 영종도 영세자수는 약 250 명 정도였던 것이다.)
(중략)
본인이 한달에 두세번도 영종도에 들어갈수없다는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하략)
1915년 12 월 8 일
주교님
포교규칙에 따라 포교계 3 통을 요구하는 히사미츠씨의 요구때문에 주교님께 한 젊은이를 보내니 그에게필요한 서류를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영종이 소곡되어있는 부천군으로부터는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으나 그 군수도 제물포부윤처럼 역시 3 통의 서류를 청구할것이 틀림없습니다.
제물포와 영종도만을 신고했는데 왜냐하면 이 두 지역에만 성당이나 강당이 있고 또 독립된 신자집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만 해도 영종도는 인천지역에서 답동성당 다음으로의 격식을 갖춘 천주교회가 꾸려지고있었다)
(하략)
1917년 6월 12 일
주교님
지난년도 동안 영종과 대야동 공소에서 가장 중요했던 일은 대다수가 아직 받지못하고있던 가을 판공성사를 용이하게 할 목적으로 주교님이 12월에 그곳 교우들을 방문한 것이었습니다.
영종은 지난 4 년동안 여아들을 위한 조그만 천주교학교의 편의를 받아왔습니다.
여교사는 그녀의 일을 기꺼이 계속하려고하지만 아주 가난해서 교사직업에서 저신의 생계에 필요한 쌀조차도 얻지못했습니다.
본인은 선생의 생계를 보장해줄수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이미 이곳 중심지에서 해야할일이 너무 많았고 또한 학부모들이 외교인 "선생들"의 생계유지를 위해 하고있는것을 그녀를 위해서도 할수있었고 또 당연히 해야했기 때문입니다.
여교사는 육지에 직장을 얻었고 그 때문에 어린이들의 조직이 와해되었는데 본인은 주일만이라도 어린 여아들을 계속해서 보살피기위해 필요한 자질을 갖춘사람을 찾지못하고있습니다.
남아들에대해 말씀드리면 그들은 언제나 속도가 느립니다.
그래서 모임때마다 부모들의 무관심과 게으름을 질책하려 애쓰고있는데 이 아이들은 5-6세부터 13-4세가 되도록 문답을 외울줄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주일날 그것도 정말로 중요한 이유도없이 오전에 일을 더하고 있습니다.
현지의 공소회장의 말에 의하면 아침일찍 집에서 하는 주일대송을 제외하면 많은 교우가정과 외교인가정사이에 온종일 아무런 차이가없다는 것입니다.
이말을 듣고 7-8 명의 공소회장들과 좀 덜 가난한 교우들로서 주일파공을 철저히 지키는 한 그룹을 만들어 보려했습니다만 항구성있는 그런 구릅을 만들수가 없었습니다.
(하략)
1920년 4 월 26 일
(전략)
금년도의 총사망자수는 평균치보다도 높습니다.
장티프스가 여기 , 특히 영종도에 창궐하였고 (하략)
1922년 연말보고서
제물포관하 공소지명
1. 제물포공소- 제물포(현 답동)
2. 영종공소 - 돌박제
(그 당시만 해도 인천지역의 천주교당은 인천답동과 영종도메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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