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명은 마티아 로서 이승훈(李承薰)의 셋째아들이고 정약용(丁若鏞)의 생질이기도하다.
그는 아버지가 사형당한 후 얼마동안 열심히 수계하며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문재(文才)와 의술에 뛰어난 그는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용인(龍仁), 진천(鎭川) 등지로 피난하다가 그해 9월 체포되었으나 뛰어난 학문과 의술의 사회적 공헌을 인정받아서인지 또는 배교 때문인지 분명치 않으나 얼마후 석방되었다
(그는 김대비의 병환을 고쳐서 철종임금이 능참봉에 제수하고 그의 아들은 진사를 시켰다)
그 뒤 1840년 부터 인천(仁川) 영종도(永宗島)로 가서 1846년 5월 까지 약 7 년간을 살았다.
이후 1846년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체포되었을 때 관련이 되어 5 월에 다시 체포되었다.
처음엔 용감히 신앙을 고백하였으나 결국 배교하고 1846년 8월 1일 석방되었었으며 1868년 4 월에 다시 잡혀 음력 윤 4월 7 일 서울 서소문밖 4 거리에서 권복초 프란치스코, 조도사 와 함께 73세의 나이로 참수치명 당하였다.
특히 이신규는 인천 만수동에서 전교활동을 하면서 1837년 조선교구 주교로 임명되어 들어온 엥베르가 조선인 성직자를 양성하기위해 수련을 시킬때에도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참여할 정도로 신심이 깊었다. 그의 신심을 확인한 주교는 그를 자신의 종복으로 선택하기도했다.
1839년 기해박해때에도 살아남아 무너진 교회를 재건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지난 2005년 8 월 1 일
나는 내 신앙의 태동지였던 영종성당을 방문하고 방문기를 쓴일이 있었다.
오늘은 영종천주교회의 태동일지를 내가 조사해본 그동안의 자료를 곁들여 적어보았다.
영종도에 천주교회가 설립된 시기는 돌박제 현 위치에 영종공소가 세워진 1903년 3 월이었다.
그 당시 돌박제에는 최병숙, 송산에는 안중근, 잔다리에는 이순의, 동강리에는 김건주, 강운성,문태옥 등이 천주교에 초석이 되어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더욱 발전을 거듭하면서 돌박제에는 김희제, 송산에 안흥문, 김상교, 전재환, 남디에 추춘택 등이 그 뒤를 이어 공소설립에 이바지 하였다.
(파리외방전교회의 사료를 보면 1902 년 제물포본당(현재의 답동성당) 소속으로 영종도에 신자촌이 생겨 공소가 하나 더 늘었다는 자료가 있는것으로 보아 공식적인 교회내 공소 태동의 시기는 1902 년이었고 교회가 세워진것은 1903 년 3 월로 보는것이 타당할것이다.)
이렇게 공소가 세워지기까지 오랜기간을 외지와의 교통의 기회를 통하여 유입되었을것이며
그 방법은 신자인 외지가족과의 교류를 통한것과 외지인 신자의 유입에 의한 방법 그리고 외지에서 배워오는 방법이 있었을것이다.
그런 가능성을 열어두고 섬이라는 어려운 지역여건과 섬지역내 인재의 부족을 생각해보면 외지인의 내방에 의한 전래가 가장 현실적인 전래방법이었을것이다.
영종도 천주교 전래의 역사는 과연 어떤것이었을까?
그 역사를 생각하노라면 바로 1840년부터 1846년 5 월까지 약 7 년간을 영종도에 들어와 살다 나간 우리나라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의 셋째아들 이신규 를 생각하지않을수가 없다.
영종도의 천주교 신앙 전래의 역사를 그동안 구전을 통해 들어본 결과에 의하여 가장 오랜 구전은
1800년대 말 월촌마을의 (망) 김세흥 집 사랑방에 서울에서 온 천주교신자 한분이 박해를 피해 피신해와서 은밀히 복음을 전파했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오고있는것이다.
(이신규의 부친 이승훈은 서울 남대문 밖 반석방(현 중림동)에서 태어나 살았지만 그의 시조는 인천 남동구 반주골이었다. 때문에 서울사람으로 불리워졌을것이다)
정확한 입증자료는 없지만 여러 정황을 볼때 그 피신자가 이신규 일 가능성은 다분하다.
영종도 어디에 기거하였는지의 자료가 정확하지는 않으나 무려 7 년간이나 영종도에 기거하였으며 독실한 신앙인이었으니 침묵으로 세월을 보내고있었을리는 만무하며 섬내에 연고가 없는 외지인으로서 섬 깊숙히 들어갈 여지가 적었기에 인천과 가까운 이곳에 정착했을 가능성은 높기 때문이다.
특히 이신규는 1839년 기해박해로 피신하다 그해 9 월 체포된후 얼마의 구금생활을 하다 석방되어 이것이 계기가 되어 외딴 섬인 영종도에 그 다음해 들어왔으며 여러 정황을 보면 관가의 명이었을 가능성도 있고 당시 박해정국을 벗어나고자하는 본인의 의도도 있었을것이다.
아울러 그는 독실한 신앙의 가문에서 살아왔기에 7 년간을 침묵하고 있지는 않았을것이다.
1903 년 영종공소가 설립된 이후 또 한번의 발전 기회는 1920 년 당시의 영종면장이었던 남필우(베드로)의 공로를 생각하지 않을수없다.
지금이야 면장의 직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그 당시 지역 기관장인 면장의 영향력은 대단히 큰 것이어서 그를 중심으로 영종 전지역에 구역공동체가 번성할수있었을것이며 자료에 의하면 그 구역은 돌박제, 송산, 잔다리, 동강리, 넙디, 삼목이 중심을 이루었다.
(1916년 12 월 11일 조선교구장 뮈텔주교의 일기에 의하면 송산, 동강리, 잔다리, 돌박제 의
네 공소가 영종도에 있는것으로 기록하고있으며 일기의 정황을 볼때 돌박제공소가 영종지역 천주교회
의 중심공소 였다.)
초대 신부님과 봉사자들을 알아보면
공소 설립당시 본당이었던 인천 답동성당(당시명칭은 제물포성당)에는 프랑스인 전학준 신부님이 계셨고
초대 영종도 공소회장은 김건주, 재정부장은 최병숙이 맡았으며 돌박제구역장에 최병숙, 송산에 안중근, 잔다리에 이순의, 남디에 추춘택 등이었다.
1910년 본당인 답동성당에는 한국인 임종국 신부님이셨으며
1955년 5 월 2 일 영종공소는 인천 송림동성당(정진국 신부)에 이관되었다.
이후 1960년 미국인 설헨리코신부가 송림동성당을 맡은후 영종공소에 관심을 갖게되면서
1962년 조아가다 수녀를 보내 공소를 이끌게 하였다.
영종공소가 두번째 부흥을 하게된 시점은 바로 성직자를 최초로 파견한 이때로 보는것이 맞을것이다.
구전에 의하면 수녀님과 당시의 신자들은 합심하여 건물짓기에 몰두하여 흙벽돌을 찍어 공소를 지어나갔으며 열악한 공소건물을 개축하였다.
(1910년 8 월 18 일 답동성당 전학준신부가 뮈텔조선교구장에게보낸 편지에의하면 영종도에서는 교우들이 외관이 상당히 아름다운 경당을 지었다고했으며 이경당은 열두칸인데 그 가운데 두칸은 특히 사제가 성사를 주러갈수있을때에 사제가 기거하도록 되어있다고했다. 이 자료로 보아 기존 있던 공소를 개축한것이다.)
이에 맞물려 신자도 계속 늘어 거의 1,000 여명에 육박하였다고 전한다.
영종공소의 발전전망을 확인한 인천교구청에서는 영종본당 설정을 준비하여 1965년 3 월에 영종본당으로 승격시키는 동시 미국인 진야고보(시노트) 신부를 파견사목하게하였다.
진야고보 신부의 부임과 함께 영종도의 세번째 부흥은 선교지역의 확장으로이어져 공소는 다시 늘어 넙디, 삼목, 뒷골에 설립하였고 이외 용유도에 무의공소, 용유남북동공소, 북도면에 신도, 시도공소까지 관할하에 두고 교세를 확장하였으며 공식신자수는 당시 1,300 여명이었다.
이후 진야고보신부는 1975년 4 월 30일 당시 시국사건인 인혁당사건처리의 잘못을 지적하는등 양심활동을 전개하다가 강제출국 당하고 말았으며
그동안 진신부의 부임기간중 섬지역으로서 살아가기 어려웠던 영종도 주민들에 대한 다양한 업적은 병원을 설립하여 성심의원을 성당내에 운영하고 미국 구호양곡을 지원받아 갯벌막이를 통한 농지조성과 그를 통한 주민식량지원(최근의 취로구호사업개념), 그외 양재 등 주민들의 기본생활의 향상을 위해 지대한 공헌을 했다.
(나의 지난 2005, 8, 1 블로그 참조 )
이후 방인신부님 시대가 이어져 이준희 마르코신부, 이성득 요셉 신부의 부임이 이어졌으나 인천교구내 성직자의 부족과 영종지역내 침체기를 맞아 다시 공소로 전락하고만다.
다시 1984년 7월 15일 본당으로 승격되어 현재에 이르고있으며
현재 당면한 과제를 부족한 식견으로나마 거론해본다면
교회운영의 어려움인 신자층의 고령화와 유년층의 부재이며 앞으로 지역개발이 완료되는 시점인 2020 년경 까지는 이 사항이 계속 이어지리라 여겨진다.
특히 현재의 도시개발로인한 토지보상에 따라 주민이주는 교회운영과 발전에 큰 애로로 작용할것이다.
하지만 성전건립등 장기적 안목으로 오늘의 신앙을 지키고있는 영종천주교회의 전망은 밝으며 3 천여평에 이르는 부지를 활용한 영종지역 신앙의 마당으로서 충분한 조건을 갖춘 지역으로서 이를 모든 신자들이 인식하고 특별한 기도가 필요한 시점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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