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Catholic/영종성당 본당50주년 공소120주년

[스크랩] 조선시대 말기 영종도 보명학교를 생각하면서 -

김대철대철베드로 2015. 5. 2. 16:42

영종도 교육의 선구자 김동화 선생의

공적에 대해서  나는 지난해 8 월 26 일자에 조사 기록한 바가 있었다.

그 내용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김동화(金東華)

그는 영종도   중촌마을 태생으로서 

교육만이  그 당시 조선의 무너져가는  어려움에서 다시 나라를 바로 세울수있다는것을 인식하고있었으며

 

부유한 집안덕분으로 육지에서 교육을 받을수있었던 그는  

학식과 덕망이 두터워   명예직이긴 했지만  嘉(아름다울가)선(善착할선)大夫 同知中樞府 部事를 지내기도했을 정도여서 직접  이러한 교육사업에 나설수있었다

 

참고로 "가선대부" 란 벼슬은 

조선시대 종2품인  문무관의  품계로서   고종2년(1865년)부터는 문무관이나 왕의 종친, 또는 왕이나 왕세자의 사위에게 내리는 품계로 병용하기도하였으니 

당시 통정대부라는 정3품 벼슬이  지방의 유지나 장수자 에게 내리던 벼슬이었던것을 감안해보면 명예직이 아니었을까 여겨지기도한다.

 

그는  이러한 고민끝에  영종도지역의 육영사업에  뜻을 두고     직전의 영종면장이기도했던 南慶祐와 합심하여  영종도에서는 최초로   " 영종사립학교 " 를 설립하고  섬지역주민교육에 헌신하였다.

그 해는 1906년도였으며  1920년 6월 22일 영종공립보통학교(현 영종초등학교)가  전소의 현재 중학교부지에 세워지기까지 운영되었다.

 

1. 1908년 5월16일의 천주교 인천교구의 전사를 보면 영종도에 보명학교가  돌박제에 있었으며

    학감은  남필우  였다는 사료가 있고  거기에 소규모의 여학교(남데레사 가 관리)가 따로 있다고

    기록하고있는것으로   봐서 당시 정황을 볼때   김동화 선생의 사립학교 설립과  동일학교가

    확실하며 아마도 남필우와 남데레사는  가족관계일것으로 추측된다..

2. 영종보명학교는 돌박제에 위치하고있었으며 학교장(학감)은 무보수 봉사직이었다

     - 1909년 4월16일의 뮤델주교   영종도  방문일기

 

3.1914년 - 1945년 까지의 영종면장은 정선화 -이정후-남필우- 남경우-김동화-박원상-김현직-고본승

   이었다

 

 

 

1905 년 5 월 28 일자  경향신문을 보면

 

 영종도 보명학교와 인천 박문학교의 체육대회 운동가가 눈에 띠는데    그중  영종도 보명학교의 운동가를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학도들아 학도들아 박문학도 보명학도

어화우리 학도들아 금일운동 연합하니 

 

즐겁도다 즐겁도다 구원법을 만났으니

연합운동 즐겁도다 승승장구 여의하다

 

외겁지심 불회하고 일보반보 불퇴하고

용맹지기 익발하야 백보천보 직진하면

 

어떤원수 못이기며 충군애국 사업이치

무슨사업 못할손가 덕구충장 사업인가

 

지과여든 필개하고 대한제국 삼천리와

등능이면 막망하라 동포형제 이천만은

 

우리손에 달렸으니 이책임을 잘하자면

우리책임 어떠한가 일시방심 못하리라

 

나태원수 물리치고 장래동양 사회상에

흔근친구 사귀어서 우리두집 선진하세

 

만세만세 만만세    대왕폐하    만만세

천세천세천천세     박문보명 양학교천세

 

 

 

또한 동일신문  1908년 5 월 16일의  일을 기록한  (동년 6 월 17일자 기사)  통신원의  영종도 보문학교와  인천 박문학교의  체육대회 개최의 기록이 지세히 나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월 16 일에 인천 박문학교 학도들이 영종도에 들어가서 그 섬에있는 학도들과 연합하여 운동회를 열었는데 본 통신원도 따라가서 자초지종을 자세히 구경한즉  짐작한 바와   大異(대이)하므로 그 광경을 대강 기록하노니

 

박문학교 학도 50 여명(그중 어린아이들은  불참)과 참무원 30 여명이 삼판선(三板船) 4 척에 나눠타고  오전 8 시에 인천부두를 떠나 9 시 30 분에 영종도에 하륙하여 잠깐 쉬고 행진하다가  中路에서 영접하는 보명학도들을 만나  상우례를 행하니  그 학도 40 여명이 제제단발하고  흑의(黑衣)를 입고  위위엄숙하여 서울학도들과 다름이 없더라.

 

박문학도들이 그 인도함을 따라 보명학교로 가서 구경한후에 두학교 학도들이 합하여 운동장으로  나와 일동경례하고 개회할때  보명학교 학감  남필우(베드로) 씨가  연합운동 청한뜻을 설명하고 박문학교 교감 강준 씨가 감사하는 뜻으로 답사한후에 운동을 시작하여 기취경주(旗기기 取취할취) 한가지를 마치자 오포소리가 들렸으므로 학도들을  점심먹이고 쉬는데 오후 1 시반쯤되어  인천부윤 김윤정과 그 부인,  인천의 전학준 신부와  대구 김보록(로베르)신부와  여러분이 운동장에 도착하자 학도들이 경례한후에 오후 운동을 시작하니  그 과목은  순회전기(巡돌순回돌아올회傳전할전旗기기  / 이어달리기)와  접전(接이을접戰싸울전)과 각색체조와 창가 등  여러가지 중에 장관은  접전이었는데 양 진이  상승상부하며 대소딱총으로 포성이 진동하고 흑운이 만천하여 실제 전쟁하는 형상을 그리다가 적진이 패하자 대한군사가 적진을 점령하고 태극기를 높이들고 만세를 부르니 산천이 진동하더라.

 

모든 운동과목을 마친후  부윤 김윤정씨가 교육이 시급하니 학교를 확장하자는 뜻으로 한시간동안 연설하니 남녀노소가 모두 자세히 듣고 감격하며 영종사는  회장 김흥민 씨가 답사를 하는데 눈물을  흘리더라.

5 시 반에 폐회하고 모든 손님과 박문학도가 선두로 회환하여   전송하는 보명학도와 작별하고 승선할때 부윤 내외분과 신부 두분은 소륜선을 타고 박문학도와 임원들은 삼판선 4 척을 나눠타고 소륜선에 달려 순식간에 인천부두에 이르러 하륙하여 곧 성당에 들어가서 무사히 왕환함을 감사하는 뜻으로 경례하고  

주모경 일차를 합송하고  각산하더라.

 

영종도에 보명학교가 있다하지만   불과 한글방 정도로만 알았더니 목견한즉 자격과 체조와 운동범절이 경성학도에게 양보하지 아니하겠고 그날 모든 학도들의 활발한 기상과 임원의 열심과  부윤의 지성권면함을 보니 그 지방 교육의 흥왕함을 가이 기약하겠습디다. 

 

 

 

이 내용들을 보면서

영종도에 사립학교가 김동화 선생의 노력으로  1906 년에 설립되었던것으로 전해지고있지만

본 기사 하단에서 보는바와 같이  정예화된 교생들의 모습과  

 

1905 년도에 기록된 기사에  보명학교에 운동가가 있었던것으로 볼때   그 이전  수년전에(1900년경)  최소한 학생  4- 50 여명 이상의 20 대 학생들이 공부하며  매년 정기적인 교환 운동회가 개최되고 인천시내의 학교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학교가 있었던것으로  추측해 볼수가 있으며 (하단  인천박문초등학교 역사자료 참조) 

 

(1900 년대초 또는 그 이전에는 서당형식의 조금 발전된 사설운영의 모습이었을것이며 그것이 발전하여 1906 년에 조그만 학교로 발전하여  운영하였을것이다. 거기에 김동화 선생을 포함한 지역 유지의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 

 

당시 김동화 선생은 남경우(면장역임)와 사립학교 설립과 운영에 헌신하였지만  보명학교 학감 남필우 또한  영종면장을 역임한 분으로서   남필우, 남경우, 김동화 로 이어지는  영종면장 역임 연관등을 고려해볼때   보명학교는 당시 영종도의  중심 대표 교육기관 이라고 할수있으며 

뮤델주교의 1909년 4월16일 영종도 방문일기에서 확인할수있듯이 보수를 받지않고 학교운영이 이루어졌던 사립학교였던것이다. 

 

또한 인천부윤이    영종도에서 있은 운동회에 부부동반하여 참석하는것을 볼때  대외적인 격을 갖춘 학교였음이 분명하다.

아울러 부윤은 교육시설확장에 대한 덕담을 하고있는것을 볼때 그 당시 훌륭했던 학생들의 진면목을 생각해볼수가 있다.    

 

 

 

금부터 100 년전

영종도 교육실태를  당시 자료를 통해 알아보면서 어려운 여건에서도  지역교육을  발전시키기위해 애쓴  선조들의 노력에 고개를 숙이게되며   

특히   삼판선 이라는 나무조각으로 만든 배를 이용해    1 시간 30 분이나 걸려 바다를 건넜던   고립의 어려움속에서도  살아가야했던   선인들의 노고가  안스러울뿐이다.

 

그분들이 바로 나의 아버지요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인천가톨릭주보 2007,4,1)

 

인천박문초등학교의 초기 모습

1905년 일본의 보호 정치가 시작되면서 교육을 통한 국권 수호를 의도하여 교육열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다. 학교를 세우는 것, 그것은 당시 최대의 과제였고 화제거리였다. 천주교측에서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학교를 설립해 나갔다. 그리하여 이 시기(1905년-1909년)에 선교사, 한국인 성직자, 그리고 평신도에 의해 설립되었거나 신형의 학교로 개편된 학교수가 60여개교에 이르렀다.

1900년 9월 1일 김교원과 강준에 의해 설립된 인천항 사립박문학교가 훗날 박문초등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1909년 12월 8일  답동본당이 이를 인수하여 본당 주임 드뇌신부가 설립자 겸 학교장이 되어 신자자녀 및 불우한 아동의 교육을 시작하였다. 이것이 박문학교 남자부의 시작이다.

한편 1912년 6월 26일 프랑스인 소루엠마엘 수녀가 인천 사립 박문학교 여자부를 시작하였다.(1899년 설립된 여자기술학교가 박문학교 여자부로 이어졌다. 지난주 주보 참조). 이들 가톨릭학교에서는 매일 한 시간씩 종교 시간이 있어 교리문답과 기타 종교 서적을 가르쳤으며 많은 학생들이 세례를 받았다. 1916년 7월에는 수녀들이 교육을 담당하고 있던 박문학교의 여자부가 인천에서 가장 좋은 학교라는 평을 받았다. 인천시장 대리가 상품 수여식날 이것을 증명해 주었다. 

1917년 4월 2일 드뇌 신부는 남자부와 여자부를 합하여 ‘인천 박문 사립 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고 설립자 겸 초대 학교장으로 취임했다. 1925년 11월 17일 ‘인천 사립 박문 보통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았다.

교회 학교는 많은 외교인 학생들을 입교시키고 그 학생들의 가족을 입교시키는 성과를 올렸다. 특히 외국인 선교사에게 있어 교회 학교는 한국인과 접촉하고 교리를 가르치는데 있어 가장 용이하고 적절한 장소였다. 그러므로 교육사업은 당시 선교를 위해 필수적인 것이었다. 

출처 : 허허벌판
글쓴이 : beolpan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