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Catholic/영종성당 본당50주년 공소120주년

[스크랩] 조선말기 천주교조선교구장 뮈텔주교의 영종도 방문 일기

김대철대철베드로 2015. 5. 2. 16:45

뮈텔, 

 

한국명으로는 민덕효(閔德孝) 로서

천주교 조선교구 제 8 대교구장이었던 뮈텔주교는 1890년 8월 4 일   교황청으로부터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이후  1933년1월23일 사망하기 직전인 1932년 12월 31 일까지  42 년 동안의 일을  일기로 작성하여 남겼으며  이를 뮈텔주교일기라고 말한다.  

 

그 일기중에는  당시 제물포본당(현 답동성당)소속  공소였던   영종도방문  일기가 포함되어있는데 그 일기를 자세히 보노라면  그 당시의 영종도 실정은 물론  천주교세의 실태를  알아볼수가 있다.

 

그 내용을 조사해  적어보기로했다.

 

 

 

1909년 4 월 15일

 

9시26분 도미니크신부와 함께 (서울에서) 제물포로 가기위해 남대문을 향해 떠났다.

 

김아오스팅 신부가  서울역까지  나와있어 그와 함께 제물포에 도착했다.

플레트 홈에는 우리를 환영하기위해 나온 학생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들을 지나치고 나서 우리는 영종도 로 가는 작은 배를 탔다.

3 명의 건장한 사람들이 쉴새없이 배를 저어 11시반에 섬에 도착했다.

해안에 도착하기전  구읍강가에는 나팔수와 북치는 사람들, 학생들,  그리고 신자들이 나와있는 모습이 보였다.

 

드뇌신부 역시 그곳에 있었고 잠시도 멈추지않고 연주되는 음악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우리는 해안선을 따라  신읍(현  전소)을 지나쳐  12 시반  송산(솔뫼)공소에 도착했다.

 

공소회장은 안요셉(당시 호칭은  안참봉) 으로 옛날엔  제물포에 살았다고했다.

점심식사는  아주 낮은 식탁에서 했는데 도미니크 신부는 뭘 집어먹기위해 약간의 체조를 해야했다.

 

2시 반경 견진을 받는 사람들에게 교리문답을 했는데 모두들 주위를 기울여 시험을 치르는 모습은 그야마로 장엄한 모습 그것이었다.

그리고 드뇌신부와 나는 40 명으로부터 고해를 들었다.

그동안 도미니크 신부는 부근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밤참을 먹기위해 식탁을 하나 가지고 왔는데 그것은  너무 높았다.

이 세상에 완전한 행복이란 전혀 없는 모양이다.

 

 

1909 년 4 월 16일

 

우리는 같이 평상위에서 잠을 잤다.

그러나 나는 좀더 따뜻한 곳에 있는 가옥 침대에서 잤기때문에 빈대에 물리는 수난을 겪기도했다.

 

드뇌신부가 첫번째 미사를 드렸고 내가 성체를 배령했다.

모든것이 끝난뒤 청중들은 내가 64 명에게 견진성사를 베풀동안 성사가 진행되는 뜰에 옆을 지어 서있었다.

도미니크신부가 감사미사를 드렸다.

 

10시경 모든 교우들과  학생들이 아름다운 행렬을 이루어 떠났다.

섬에서는 약 180  여명이  세례를 받았다.

 

사람들은 남씨 일가의 거주지인 돌박제의   (대명)학교건물 에서  잠시 멈추었다.

자발적이고 무료로 일하는  학교장은  남 베드로(남필우)였다.

 

정오경 우리는  부두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작은 배 한척과 노젓는 사람  두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다를 건너는데  정확히 한시간이 걸렸다.

 

2 시경 드뇌 신부 집에서 점심식사를 했고 5 시 41분발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1912 년 9월 26 일

 

8시 50분  (서울에서) 제물포를 향해 출발했다.

날씨는  잔뜩 찌푸려있었고  비가 몇방울 떨어지기도했다.

(제물포역)종점에서 몇명의 제물포 교우와   영종도에서 보낸 사람들의  인사를 받았다.

 

배가 기다리고있었는데  10시10분 출발했다.

순풍이 불어 10 시 40 분에 섬에 도착했다.

 

교우들이 부두에서 나를 환영하였고 몇몇사람들은 내가 이렇게 빨리 도착하리라고 생각하지못했기때문에 길가는 도중에 나를 만났다.

 

드뇌신부도 역시 도착했다.

우리는 돌박제성당을 향해 출발하여  11시 15분에 도착했다.(구읍에서 돌박제까지  35분을  걸어간것이다)

그러니까 서울에서 정확하게 3 시간이 걸린 셈이다.

 

마을에는 남 마티아와 그의 아들인 면장 남베드로 (필우)등이 살고 있었다.

 

수녀원에서 몇년을 지낸 남 데레사는 여기서 작은 여학교를 관리하고 있었다.

(보명학교가 있었던 돌박제에   여학생들을 위한 작은 학교가   별도로 있었던것같다.) 

 

견진성사를 위한 시험을 치르는 일밖에 남아있지않을 정도로 모두 교리문답을 훌륭하게 외고있었다.

 

 

1912년 9월 27 일

 

(돌박제)성당 마당에서  61 명에게 견진성사를 베풀었고 미사와  일반인에 대한 영성체도 베풀었다.

녹색의 아치가 성당입구에 세워져 있었고 밤에는  훌륭하게 장식된 조명들이 빛났다.

 

상당히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배를 타는 구읍으로 우리를 따라왔다. 

오늘도 순풍이 불어와 45분만에 해엽을 통과하여  12시 직전에 제물포의 전교관에 도착했다.  

 

 

1916년  12 월 11일

 

아침 8시 53분 제물포로 갔다.

즉시 영종도로 가야했기때문에 종착역으로 갔다.

역에는  그섬의(영종도)  회장과 복사를 할 김덕민 및 한 청년이 나와 있었다.

드뇌신부는 그들 편으로 미사도구를 보내왔다.

우리는 함께 부두로가 10시 15분 섬으로 출발했다.

곧 간조기가 닥치므로 곧장 나가지못하고 월미도를 돌아 가야했다.

바람조차 불지않아서 우리는  고물 노를 이용해 배를 저어갔다.

섬에 도착한 시간은 12시 15 분이었다.

20명 가량의 교우들이 우리를 마중나와 있었다.

 

(돌박제)성당에는 1 시 도착했다.

등과 기들이 오늘이   이  공소의 축제일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점심식사후 고백자들을 준비시키는 일과 찰고까지 회장들과 복사   즉 김득민, 남필우, 송산의 안씨에게 미루고 23 명에게 고백성사를 주었다.

송산, 동강리, 잔다리, 돌박제  의 네 공소들이 이곳  돌박제 공소에 모인것이다.

 

 

1916년 12월 12 일

 

성수를 축성하고 성수예절이 끝난 7 시반 미사를 거행했다.

복음후 간단한 강론을 하고서는 47 명의 고백을 들으며 낮시간을 보냈다.

햇빛이 따사롭고 날씨도 매우 포근하여 산책을 즐기면서 성무일도를 바쳤다.

 

오늘 고백자 가운데에는 결혼후 4 년동안 한번도 성사를 받지않은 제물포 성영회출신의 여자가 한명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열성적인 신자여서 그도 오늘  성사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완전히 외교인인  여자의 집안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이끄는대로 그냥 생활하다가  역시 외교인인 그의 어머니집으로 돌아와서도 그들은  계속 신앙에 무관심했었다.

그러다가 이웃의 표양과 권고덕분에 오늘 다시 그들의 본분을 지킬수있게 된것이다.

 

1916 년 12월 13일

 

환자를 포함한  61 명이 성체를 모셨다.

환자는 잔다리에 사는 50 세의 박막달레나다.

그녀의 집은 다름아닌 마라발 신부의 옛집인것 같았다.

열이 몹시 심한데도 불구하고 환자가 청하지않았기 때문에 종부성사는 주지않았다.

(돌박제)공소에서  5 리정도 떨어진 거리였다.

 

낮에는 43 명이 고백성사를  보았다.

하루종일 흐린 날씨더니 저녁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1916년 12 월 14 일

 

바람이 부는  쌀쌀한 날씨다.

25 명에게 고백성사, 1 명에게 성인영세, 1 명에게 어린이 영세, 3 명에게 보례를 주었다.

주어진  교리문답에 대해 지나친 관면을 허락하는것이 아닌가 우려되어   (공소)회장들에게 견진자들에 대한 찰고를 실시하도록했다.

 

1916 년 12월 15일

 

14 명에게 견진성사를 베풀고 마지막  미사를 드렸다.

바람이 약간 불었으나 어제보다는 덜했다.

10시경  (돌박제성당을  ) 출발하였다.

10시 50분 돛을 올려  15분만에  제물포에 도착했다.

 

출처 : 허허벌판
글쓴이 : beolpa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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