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Catholic/영종성당 본당50주년 공소120주년

[스크랩] 사발통문 과 영종도

김대철대철베드로 2015. 4. 26. 16:59


 

 

                               조선시대   전봉준의 동학혁명 사발통문


          조선시대 고종 때 널리 쓰였고 특히 동학농민군들이 썼던 통문이 유명하다.

          1968 년 12 월 전라북도 정읍군 고부면 송준섭(宋俊燮)의 집 마루 밑에서 족보와 함께

          사발통문이 발견되었다.

          이 통문은 1893년(고종 30) 11월 전봉준(全琫準)을 비롯한 동학의 우두머리 20여 명이

          함께 둥그렇게 서명한 것으로, 고부성(古阜城)의 점령, 조병갑(趙秉甲)의 처형, 무기고

          의 점령, 탐관오리의 처단 등이 적혀 있다.

          임오군란 뒤, 조정에서는 사발통문을 돌리면 역모로 보아 처벌했다.

          조선말기 고종때  유행하였다.

         

 

 

람들을 모으기위한 고지문,  연통문

 

흔히 이것을 가리켜 사발통문  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사발 이라고 하면 대접을 말하는것인데  그럼 사발에다가 고지문을 써서 돌렸다는 말인가?

 

그것을 알아보기위해  사료를 알아보았다.

 

 

 

 

송기숙 이 쓴

녹두장군 제 4 권 끝 부분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그 때 김도삼이가 벼룻집을 끌어당겼다.
미리 써논 통문을 펴고 맨 끝 빈 자리에  둥그렇게  원을 하나 그렸다.


붓에 먹을 찍어 전봉준  한테 넘겼다.
김도삼이한테서 붓을 받은 전봉준은 그 원의 원심과 직선으로 원밖에다 자기 이름을 적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전봉준이가 이름 적는 것을 보고 있었다.
자기 가슴에 칼이라도 꽂고 있는 비장한 모습이었다.


자기 이름을 적은 전봉준은 붓을 곁에 있는 송두호에게 넘겼다.
송두호는 정중하게 붓을 받아 전봉준이 이름 곁에 자기 이름을 써내려갔다.
획 하나하나에 힘을 넣어 적었다.

마지막에는 붓끝이 파르르 떨렸다.


20 명이 이름을 다 적을 때까지 한 사람 한 사람 적는 것을 모두 숨을 죽이고 보고 있었다.
손을 발발 떠는 사람도 있었다.


이름들이 원에서 햇살처럼 퍼져나갔다.

사발통문이었다.
주모자를 가리지 못하게 하는 기명방법이었다.


이름은 다음과 같았다.


전봉준 송두호 정종혁 송대화 김도삼 송주옥 송주성 황흥모 최흥렬 이봉근 황찬오 김응칠
황채오 이문형 송국섭 이성하 손여옥 최경선 임노흥 송인호....


결국 주모자를 숨기기 위해 사발모양으로 서명을 한 통문이 사발통문인  것이다.

 

 

 

 

 

 

선말기 천주교박해가  끝난후  일본에 의해 나라를 잃을   어수선하던 시기에

 

영종도에서도 사발통문 과 관련한  사건이 있었다.

 

사발통문은 지금과 같은 통신수단이 없었던 그 당시

주민들간의 계모임, 기(계)통문, 연락수단 및 신문고 기타 주민들간의 합의주도방법으로 다양한 모양으로 많이 활용되었으며  특별히 조정의 제재는 없었으나 

이것이 천주교의 확산, 외국의 개항요구,  등이 이어지고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면서 이러한 행위를 역모로 규정 조정에서 적극 조사처벌하기 시작하였다. 

 

영종도에서 일어난 사건도 그와 같은 인식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고 보여진다.

 

 

그 시기는 1906년 4 월로  전소면 에서 발생 하였으며

운서동에 거주하던,       사건명으로   " 조문주 치사사건 "   

원서명으로는    " 인천군 영종도 전소면 致死男人조문주獄事文案 " 이다. 

 

그는 이 사발통문을 통한  주민들사이에서의   모종의 일에 휩싸여   싸움이 벌어져 그 피해자로 치사하였다.

구전으로는  영종도내  절에 있는 불상이 도난당하자 불교도인들의 주도하에 타종교였던 천주교인을 의심하여  사발통문이 돌게되었고 결국은 신도들간에 싸움이 벌어져 그와중에서 조문주가 타살당한 사건이었다.

일설에는 사발통문에 조문주를 범인으로 지목하여 관가로 돌리던중 이를 안 일부불교도인들의 타살로 사망하였다는설도있다.  

 

당시는  천주교박해가 극심하던  1866년  (고종3 년)  이후 20 여년후의 일로    전국에서 20,000 여명의 천주교인이 관가에 잡혀들어가 문초를 당하고 배교를 안할경우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던 시절이  얼마 지나지않은  시절이었다.

 

조문주 도  이 시기 말기에  천주교 추종 혐의자로 타살 당하였다고하며  이를 수사하여 신식재판에 회부하였다고한다.

 

이 자료는  1906년 광무6년 인천군편  판본사항 필사본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있다.

그 줄거리는  1906년 4 월에  경기도인천군 영종도 전소면에서 발생한  趙文周 치사사건에 대한  인천군수 김동희 의  초검보고서,  안산군수 이석재의 부검보고서, 김포군수 이성직의  삼검보고서 및  통진군수  조동선의  조사보고서를 합철하여 보관되어있다.

 

 

 

 

 

 

 

 

 

 

 

( 이외  구체적 사료를 확인하지못해 구체적 내용을 적지못함이 아쉬우며 

  확인되는대로 추기 할것이다. 

  우선    확인한 자료와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의 사진을  남긴다 )

 

 

 

 

 

 

참고로

조선 천주교 박해역사를  발췌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에서의  천주교 신앙공동체는 자생적으로 생겼으나 조정에서는 여러 차레에 걸쳐 천주교를 금하고 박해하였다.  

이러한 박해는 100여년에 걸쳐 수 차례에 걸쳐 일어났고 그 박해의 도화선은 각 사건마다 다르지만, 천주교를 말살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박해의 원인은

천주교인들이 조선의 전통적인 예절인 조상제사를 거부했다는 점과,

정치적인 파벌,

서양세력의 진출에 대한 거부감 등을 들 수 있다.  

 

박해사건과 결과를 적어본다.

번호

박해사건

결과

1

을사 추조적발사건                 

 (정조 9년, 1785)

이벽의 가택감금, 김범우의 유배생활과 그 여파로 사망 

2

신해 박해

(정조 15년, 1791) 

윤지충, 권상연의 순교  

3

신유 박해

(순교 1년, 1801)

주문모 신부, 정약종 등 초대 교회지도자 순교

4

을해 박해

(순조 1년, 1815)

경상도 교우 100여명 체포, 그중 30여명 순교

5

정해 박해

(순조 1년, 1827)

전라도 교우 240여명을 포함하여 경상도, 충청도, 서울, 등지에서 500여명 체포당함. 그중 15명이 옥사 혹은 순교. 

6

기해 박해

(헌종 5년, 1839)

전국적 박해, 정하상 등, 불란서 성직자 3명을 합하여 100여명 순교 

7

병오 박해

(헌종 12년, 1846)  

김대건 신부 등 10여명 순교

8

병인 박해

(고종 3년, 1866)

대원군에 의해 8,000 - 2만 여명 순교

9

제주도 교난

(고종 3년,1901)

일반민중에 의한 천주교도 학살




출처 : 허허벌판
글쓴이 : beolpa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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