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Catholic/영종성당 본당50주년 공소120주년

[스크랩] 동강마을과 금광

김대철대철베드로 2015. 4. 26. 16:46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노라면

자랑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부분도 많이 있슴을 본다.

 

그 중에는  지정학적으로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생존하기위한  계책도 있었고,

그외 유사한 이유의  사대주의에 입각한 것등 도 있었을 것이다.

 

멀리 삼국시대에 통일을 하기위한 방법으로 신라가 외세인 당나라를 끌어들인것에서 부터

가까이 아관파천으로 러시아의 도움을 받고자 했던 것도 그렇다.

얻은것도 있었겠지만  아래 열거하듯이  도움은 그만큼의 댓가가 주어져야 했었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공짜는 없었으며 주는 이들은 실상 젯밥에 더 관심이 있었던것이다.

 

이것은 역사이며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성서와도 같이 소중히 기억해야 할 좌우명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것이다.

 

 

 

우리의  복잡하고 힘없는 환경에서 생각해보면

그 놈이 그놈이고  그 놈이 내 놈이었다고 말할수도 있지 않은가 한다.

누구를 탓하거나 욕할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다  나와 내 조상이 그 당시 여력에서 최선을 다한것이다라는 긍정적 역사관을 갖을 필요가 있을것이다.

그렇지 않아보아야 결국  내 손해 이니까 ...

다만 그러한 경험의 역사를 통해서  반복함이 없기를 노력하고 -

 

가까이

조선은 쇄국정책으로 인근 국가보다 근대화가 늦어짐으로인해 주권조차 잃어버리는 약소국으로  전락하게 되기도했고  이로인해 열강들에게 각종 국내 이권을 빼앗기다시피 넘겨주기도 했다.

광산채굴권, 삼림채벌권, 철도부설권, 통신시설권 등을  넘겨줌이 그것이다.

그 과정에서는 얼르고 달래고 보호받고 등 여러가지 사연도 있었슴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 예를 살펴보면

 

첫번째로는 광산광산채굴권

1. 강릉광산채굴권 1870 (아메리카합중국)

2. 종성금광채굴권 1896 (러시아제국)

3. 경성광산체굴권 1896 (러시아제국)

4. 갑산광산채굴권 1896 (아메리카합중국)

5. 운산금광채굴권 1896 (아메리카합중국)

 

           * 미국이 찾아낸 금광(금)에   손대지 말라는 뜻으로 노 터치라고 말한 것을

             주민들은 이말이 금의 이름인 줄 알고, 노 터치를   노다지로 바뀌어 불러지게 되었다.

 

6. 송화금광채굴권 1897 (일본 제국주의)

7. 금성(당현)금광채굴권 1897 (독일 제국)

8. 철원금광채굴권 1899  (일본 제국주의)

9. 은산금광채굴권 1900 (대 영 제국)

10.직산금광채굴권 1900 (일본 제국주의)

11.수안금광채굴권 1905 (아메리카합중국)

 

두번째로는 삼림 채벌권

1.압록강 삼림 벌채권 : 1896 (러시아제국)

2.두만강 삼림 벌채권 : 1896 (러시아제국)

3.울릉도 삼림 벌채권 : 1896 (러시아제국)

 

 

세번째로는 철도 부설권

1.경인선(노량진-제물포) : 1896(아메리카 합중국), 모스→1897 (일본 제국주의), 완공:1899

2.경부선(남대문[서대문,서울]-초량[부산]) : 1898 (일본 제국주의), 완공 :1905

3.경의선(남대문[서대문, 서울]-신의주) : 1896 (프랑스)-피브릴 社→1897 (일본 제국주의), 완공:1906

4.경원선(용산-원산) : 1904 (일본 제국주의), 완공-1914

5.마산선(삼랑진-마산포) : 1904 (일본 제국주의), 완공-1905

 

네번째 기타사항

 

주요 개항지

1.인천(서울 외항), 진남포(평양 외항), 부산포, 목포, 원산, 성진, 용암포(신의주 외항)

 

열강들의 무단 침입

1.거문도 점령 사건 : 대 영 제국(1885)

2.고하도 매수 사건 : 러시아 제국(1896)

3.용암포 점령 사건 : 러시아 제국 (1903)

 

이것뿐이 아님을 우리는 역사교육을 통해서  알고있다.

 

 

 

어린시절에 기억하는 금광 에서 비롯된 이야기를 적어보고자 쓸데없이   주언부언 하였다.

 

나는 동네에서 100 여평미만의 논과 밭,  또는 개울등을 파고 광물을 캐는 모습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어떤 기구를 통하여 낯선 사람이  동네를 배회하며 금맥을 찾아 헤메고 ,

그 금맥을 찾으면 이어서  땅파기 작업이 한달을 두고 이어지며,

끝나면 또 다시 다른 장소로 이동하고 그 파헤친 장소는 남아 물이 고여  작은 호수가 되었으며  날이 가물면 거기에 고여있는 물을 퍼내  말라있거나 늦게까지 이앙하지 못한 모를 이앙하고 하던  모습 등이다.

그리고 더울때면 친구들과 멱을 감고 -

 

그러니까 나의 기억으로  1960 년대초 전후가 될것이다.  

일제시대때 시작한 광물찾기작업은 광복이후에도 계속 이어졌으며  1950년대 들어서면서 계속 금맥찾기작업이 실패하면서 일확천금을 기대하던 금광업자들은 서서히 파산하거나 손을털고 영종을 떠났으며   6, 25 전쟁이 끝난 1954년  정부의 피란민 정착사업으로 뚝막이사업(간척지막기)이 전개되면서 다수 채광인력이 이곳으로 흡수되었고   채광사업은 1960 년대 중반쯤 사라졌다고 기억된다.

 

참고로 내가 조사한 바의 사료를 보면

영종도에서는 금과 은이 많이  채광되었으며

1919 년  김성근 이라는 자가 처음 지금의 동강마을 주변에서 금맥을 발견 80만여평의 광산권을 얻어 금을 캐기 시작하였으며  채굴작업을 하는 족족 성공하여 순식간에 갑부가 되면서 이 소문이 꼬리를 물고 퍼져나가자  ,  일본인 小畑豊七, 永井市太郞, 김종현, 김달현, 함창희(동림산업)등이 광권을 뒤따라 얻어   섬 전체지역에서 채광하여 부자가 되었고

이때  북한지역(주로 평안도, 황해도지방) 사람을 포함한 전국의 광산 노동자들이 모여들어 한때에는 20,000명의 인구가 상주하는 큰 섬이었고

그 때  잔류한 이들이 위 열거한 이들중에 아직 살아가고 있기도 하다.

 

할일이 없어 놀기만하던 동네 어른 들은 그곳에 품팔이를 다녔고 

광물(금이나 은 )이 들어있는 돌을 모아  어떤 기구를 통해 재래적인 방법으로 금과 은을 가려내는 작업을 하곤 했다.

인근 강화도나  충청도 에서까지 돈벌이를 하러 인부들이 모여 들었었다.

 

나중에 작업이 끝난후 

이번에 판곳에서는 돈을 벌었다는둥,   헛탕을 쳐서 쫄당 망했다는둥 소문이 항상 따랐고 -

 

지금까지도 그 웅덩이의 흔적은 남아  일부는 농업용수를 담는 간이 저수지로 쓰이고,

일부는 다시 메꿔져  논으로 쓰이고 있다.

방치된 저수지에서  어린아이들이 멱을 감다가 익사하는 일도 자주 있었고 -

다만  파내었던 흙터머지만이 지금도  웅덩이 주변에 흔적으로 남아있거나  논가 주변에 남아 쌓여져 있슴을 볼수가 있다.

 

 

그 흙을 버리는 곳이나  모아 둔곳을    광산인들의 용어로  " 버력탕 " 이라고 칭하며

그  " 버력"의 뜻은   광물성분이 섞이지않은 작업과정의 잔재물인 파낸 흙 , 그 광물잽이들이 찾지못한 헛탕친 잡석을 의미한다.

 

쓸모없으니 버려라는 뜻과   허탕쳤다는 말이  합성된 우리말 변형이 아닐까 생각 된다.

 

어쨋거나,

영종에는 그 광물찾기 작업의 흔적이 여기저기에 아직도 산재되어 있다.

 

 

영종 16 통 아래젓개앞 백령공원 산자락에는 일제시대때(1930 년대  일본인이 채굴)  땅속으로 뚫어 들어간 광산입구가  구경 약   7 미터정도로 벌어져있으며   앞에만가면 그 속에서 시원한  지하바람이 나오고있다.

그 맞은편  신도시 기슭에는 그 광산에서 집수되어  시원한 물이 분출되나오고 있다.

또한 지금은 도로확장으로 흔적이 없어졌지만  2003 년도에만 해도 은골 저수지 인근에는 광물선별작업을 하던 콘크리트 구조물이  남아있기도 했다.

이러한  광물을 찿기위한   굴의 흔적도  산의 여기저기에 남아있기도 하다.

 

현재 영종 15통인 " 은골 " 이라는마을 이름도  " 隱(숨을은)고을"  즉    광물이 숨어있는 곳을 의미 한다고도 전하며

은(銀)이 특히 많이 생산되어 칭하기 시작했다는 구전도 있으나 확인할수 없다. 

(다른 설로는 이지역이 골짜기에 위치하고있는 나무가 많은 은둔된 지역으로 눈에 잘 보이지않는 숨은 동네여서 불려졌다는 설도 있다)

 

광물찾기 작업의 흔적은

운북동 잔다리에서부터 동강마을  벌판 젓개 은골로 이어지는 골짜기  주변에서  전기했던 광물을 캐낸 웅덩이가 산재되어 있으며  현재의 간이 저수지는 거의 그 흔적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또한  버력탕 도  여기 저기에서 보여지기도 한다.

 

특히

동강마을에는 논 가운데에서도 그 흔적을 지금까지 일부 볼수 있는데

지금도 그 동네주민들은 " 버럽터머지"  "버럭터머지" "버루터무지" 라고 그 위치를 칭하고있다.

당시에는 산터머지처럼 거대한 산 모양을 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논밭으로 풀어 없애 얕게 그 흔적만 남아 있다.

그  현황이다.

왼쪽 부분과 중간에 높게 쌓여있는 부분이 그것이다.

 


                                                                    

                                                                               버력탕 의 모습(가을에 본 전경)

 

 

                                  버럭탕의 모습(5월에 본 전경,       상,하)

 

 

 

 

 

그리고 동강마을이라는 이름도

그 변형이라고 할수 있는데 영종에서 금광을 찾던중 제일 먼저 금맥을 찾은곳이라고 소문이나고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더 모여살게 되었고

이후  번성하면서   "통광(通 꾀뚫을 통   鑛광물광)"이라는 말로  그 동네를 칭하기 시작했으며

그것이 변음되어  지금의 동강마을 로 변화되었다.

당시에는 거주민과 외지인이 수백호가 거주하여 주막 만도 80 여호가 넘었다고 전한다.

 

이 동강마을은  당시 금골이라고 하고 

은골과 구분하여 동네를  칭하다가 은골만 남아 지금까지 쓰여지고  금골은  통광에 뭍혀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그 두 마을은 지형적으로  백운산을 중심으로 길게 연결된 지맥을 형성하고 있어 설득력을 더하며

현재 행정통은   은골이  영종 15 통이고     동강마을이 영종 23 통이다.

 


 

                                                                                                                   동강마을 전경

                       어디를 가나 붉게 써논 구호들은 개발에 멍든 영종의 한 시대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동강마을 전경

            보이는 산이   이제는 산이랄수도 없는  보기만해도 마음 아픈 나의 가슴과도 같은  금산이다

 


 

                                   동강마을 에서 바라본 백운산(들판을 산책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동강마을에서 바라본 잔다리 방향 (논 가운데 이제는 집이 들어서고 -)

 


 

                   동강 하천에 몇곳 설치되어 있는 다리 중   중간지점 3 번째 다리(총 5 개가 있다)

 

 

끝으로

우연이라기엔 너무 우연스럽지 못한 것이 있다.

 

동강마을에는 중간을 장촌마을인 서쪽에서 잔다리 하열방향인 동쪽으로 가로 지르는 큰 하천이 있으며  일명  동쪽으로 흐르는 개천 이라는 의미의  동강천 이 줄어  동강마을 (속명:동갱이)로 불려지게 되었다고도하고

 

영종도에서 제일먼저 잔다리방향에 제방을 쌓아 물이 고이는 강을 만들고 농지로 조성해서 붙은 이름이라고도하고

전설로는 신선들이 강가에 정자를 짓고 오동나무로 악기를 만들어 즐겼다고하여 붙은 이름이라고하기도한다.

 

 

인천공항이 1989년 착공되고  이어서 이를 지원하기위한 공항 고속도로가 바로 이 마을 을 관통하게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마을이 고속도로를  중심으로  나누어지는   동강난 마을 이 되었다

여전히 그 것도 동강마을의 명칭연유가  향후 500 년후에는 구전으로 이어져 가게 되리라..... 

 

 

출처 : 허허벌판
글쓴이 : beolpa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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