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4주일>(2010. 4. 25.)
<행복한 사제가 훌륭한 사제이다.>
전에 어떤 시골 본당의 주임신부로 있었을 때,
한밤중에 신자 한 분이 술병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신부님이 적적하실까봐 같이 술이라도 하려고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성경 강의록을 쓰고 있던 저는 좀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언젠가 주교님이 강론 중에 신자들에게
제발 밤에는 신부님들이 혼자 있게 내버려두라고 호소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다음날 새벽미사가 있다면 더욱더 밤에는 혼자 있어야 하지만,
새벽미사가 없더라도 하느님과 단 둘이 있는 시간은 보장되어야 합니다.
신부가 되고 나서 새신부 시절에 너무 피곤하고 힘들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그게 체력적인 문제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대침묵을 지키지 않은 데서 오는 피곤함이라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신학생 시절 줄곧 날마다 지켰던 야간 대침묵은 사제들에게도 꼭 필요합니다.
행복한 사제가 훌륭한 사제라고 했습니다.
그 행복은 가장 먼저 하느님에게서 오는 행복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제들은 하느님과 단 둘이 있는 시간을 반드시 유지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사목 직무를 수행하는 행복입니다.
“세속적인 일”에서 즐거움을 찾고 그걸 행복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인을 위해서도, 교회를 위해서도 지극히 불행한 일입니다.
본인 스스로도 그런 착각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강요를 받아도 안 됩니다.
어떤 사제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 멋있는 사제라는 말을 들을 때,
그것이 세속적인 재능 같은 것을 기준으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당황스럽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도대체 하루 종일 사제관에 틀어박혀서
무엇을 하며 지내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왜 그렇게 재미없게 사느냐는 말을 들을 때도 있습니다.
재미는 없지만 기쁨은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불행하지 않습니다.
몸이 따르지 않아서 이렇게 재미없게 살고 있지만
그래도 성경을 공부하면서 저만의 행복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사제가 행복하면 교회가 행복해집니다.
교회가 행복해야 세상이 행복해지고, 하느님께서도 행복해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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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제는 없다. 아픈 사제가 있을 뿐.>
신품성사는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입니다.
우리는 신품성사의 은총을 믿고, 그 은총이 지속된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나쁜 사제는 없다. 아픈 사제가 있을 뿐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제가 만든 말이 아니고 언젠가 피정 때 들었던 강의 제목입니다.)
스스로 그 은총을 거부하고 완전히 떠나버리지 않는 한,
신품성사의 은총으로 사제가 된 사람 중에 나쁜 사제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픈 사제는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세속적인 일 때문에, 제도 교회 때문에, 또는 여러 이유로 아플 수 있습니다.
나쁘다면 제거하면 그만이지만, 아프다면 치료를 해야 합니다.
몸이 아픈 것만 아픈 것이 아니고 영혼이 아픈 것도 아픈 것입니다.
아픈 사제를 비난하기만 하는 것은 더 아프게 만드는 일입니다.
이것은 같은 사제로서 사제들을 일방적으로 편들고 감싸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신앙인들에게 다 해당되는 말입니다.
떨어져 나간 배반자 유다는 스스로 나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는 아픈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픈 베드로를 사랑으로 치료해주셨습니다.
잘라내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치료는 어렵습니다.
어렵다고 포기하고, 쉬운 길로만 간다면 살아남을 사제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전에 이런 소설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구 소련 시절의 KGB에서 요원 하나를 신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그는 자기 신분을 감추고 정상적으로 신학교를 다녔고,
정상적으로 사제 서품을 받았고, 아일랜드의 본당 신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제로 살면서 KGB 요원으로도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이 아일랜드를 방문했고,
그에게 교황을 암살하라는 지시가 전달됩니다.
그는 사제였기 때문에 쉽게 교황에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교황이 성당에서 혼자서 기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손에 권총을 든 주인공이 교황의 등 뒤로 다가갔습니다.
(비록 소설이지만) 그때 교황이 했던 말이 저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KGB 요원이라고 하더라도 당신은 사제입니다.
하느님께서 사제인 당신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결국 주인공은 KGB 암살자의 길이 아니라 사제의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교황이 어떻게 암살자의 신원을 알았는지는 소설을 읽어보면 알 것이고......)
사제가 아프면 교회가 아픕니다.
교회가 아프면 세상도 병이 들고, 예수님께서는 더욱 아파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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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는 목자이면서 동시에 양이다.>
사제는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목자로 살고 있지만
그 자신도 예수님의 양들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래서 사제는 고해성사를 주는 사람이지만,
그 자신도 고해성사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의사도 환자 신세가 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이면서 동시에 양이라는 것은 의사이면서 동시에 환자이고,
변호사이면서 동시에 피고인이라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사제였던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양들 중의 하나이면서도 목자의 직무를 받았을 뿐입니다.
“사제도 인간이니까.” 라는 말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것은 사실 진부한 변명입니다.
그러나 양들 중의 하나로서 양들의 처지를 그대로 겪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출가” 라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속세를 떠났지만 속세의 아픔을 늘 품에 안고 살아야 합니다.
가정을 떠났지만 가족에 대한 사랑은 버리지 못합니다.
부모상을 당하면 누구보다 더 서럽게 우는 것이 사제들입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신학생 시절의 훈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나중에 신부가 되거든 누구보다도 더 효도해야 한다.”
그게 무슨 특별한 훈화냐고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던 그 심정을 생각한다면,
왜 사제가 자기 부모에게 효도하는 일이 강조되는지를 알 것입니다.
사제이니까, 사제일수록, 더 효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효도하지 않으면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사람들이 부르심을 받고 사제가 되어서
(다른 양들보다 더 나을 것도 없는 사람들이 목자로 부르심을 받아서)
자기 자신도 한 마리 양이면서도 목자로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제들을 위해서 더 많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신자들의 기도는 사제들이 살아가는 힘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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