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나눔 Life Story/사랑을 나누어요

우리는 너무 많은 걸 잊고 잃고 살아왔다.

김대철대철베드로 2004. 7. 18. 11:41

박선양 교수 / (사)한국혈액암협회 이사 /서울대학교병원 혈액종양내과장

 

어릴 적 부모님은 항상 '양보와 감사를 강조하셨다. 당시는 딱히 믿는 종교가 없으셨지만 보이지 않는 신의 존재를 항상 의식하시는 말씀으로 우리 형제들을 키우셨다. 지금은 노구에도 불구하고 일요일이면 성당에 가시는 것을 잊지 않으신다.

삼 년간의 전쟁으로 정신적, 물질적으로 피폐해 감은 물론 피난살이의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아버지께서는 전장의 군의관이라는 당신의 직업으로 인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시느라고 가족은 물론 가정생활은 방치해 두시다시피 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빈약한 밥상을 가족들에게 내밀면서 자식들에겐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식사에 임하도록 하셨다. 식사를 마친 우리들 입가에는 '잘 먹었습니다'. 라는 감사의 기도가 늘 따라 다녔다. 우리 형제들은 숟가락을 놓으면 밖으로 뛰쳐나가 냇가며 논둑길로 쏘다니며 하루종일 시간을 보냈다. 때론 메뚜기며 참새도 잡아 모처럼만의 별식을 즐기기도 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야외의 들판이며 숲 속에서 놀다 노을을 맞이하는 것이 아이들의 하루였다.

쉰이 다 된 나이에 보게된 늦둥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우리 집 가훈을 물어왔다. 그동안 여러모로 숨가쁘게 쫓기며 살아왔던지라 딱히 가훈이라고 적은 액자를 걸어 본적조차 없어 잠시 주춤했다가 "양보와 감사"라고 말해줬다. 매사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양보하며, 작은 일에도 감사해야 하는 생활태도를 강조하셨던 부모님의 말씀을 오십년이 지나 그대로 반복하면서 문득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아이를 태우고 운전을 하고 가는데 무리하게 끼어드는 차량이 있었다. "운전의 기본 매너도 없는 인간"이라고 흥분해 있는 아빠를 의아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아이는 "전에 아빠도 그랬잖아"라고 한마디했다. 그땐 아빠가 급한 일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하면서 궁색한 변명을 해댔지만 얼굴이 뜨거워진 기분이었다.

이젠 길을 가다가 부잣집 쓰레기통에 나뒹구는 바나나 껍질만 봐도 침을 꿀꺽 삼키며 자랐던 시절은 아득한 전설의 고향이 되었다. 한 겨울에도 수박이며 딸기를 먹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 되었고, 예전에는 들어보지도 못한 두리안이며 리찌같은 열대과일을 백화점 슈퍼마켓에서 예사로 살 수 있다.

또한 어릴 적 실컷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보리개떡이 신세대의 6.25 체험 음식으로 등장할 정도이다. 아이들은 하루 종일 음악이며 미술, 수학, 영어 학원을 쫓아 다니느라 뛰놀 시간은 커녕 집밖에 나가 시간을 보내는 건 뭔가 누군가에게 뒤떨어질 각오를 한 후에야 가능한 일이 됐다.

그토록 힘든 세월을 견디고 살아온 우리들은 이를 악물고 배고픔의 경험을 물려주지 않으려 애써왔다. 그러나, 물질적인 가난이 얼마나 힘들었지는 기억하지만 가장 중요한 삶의 태도를 자식들에게 가르치는데는 실패한 것이 아닐까?
어린 아이들은 백지와 같아서 얼마든지 교육의 결과로 근사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 어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어릴 적 궁핍만 해결하고자 전전긍긍한 삶을 살아왔을 뿐 가난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기본 자세를 가르치려 애쓴 부모님 세대의 교육을 흉내조차 내지 못한게 아닌가 싶다. 우리가 부모님으로부터 귀가 아프게 들었던 위를 보지 말고 아래를 보고 살아라. 는 교훈을 많은 젊은이들은 들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나의 자식을 요행과 안락의 길로만 인도하지 마시고, 곤란과 고통의 길에서 이겨낼 줄 알고, 패한 자를 불쌍하게 여길 줄 알게 하소서. 내 자식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목표를 높게 해주시고, 남을 다스리기 전에 자신을 다스리게 해주시고, 미래를 지향하는 동시에 과거를 잊지 않게 하소서."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리에 이끌어 이 땅에 포성이 멈추도록 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자식을 위한 기도문중 일부이다. 그의 많은 어휘록도 그렇지만 특히 이 기도문은 맥아더 장군의 뛰어난 군사 지도력보다 더 그를 존경하게 만든다. 곤란과 고통의 길에서 이겨내는 힘이야말로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다. 남을 비난하고 원망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인간의 기본 자세이어야 할 것이다. 미래의 비젼만큼 과거의 소중함은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지혜만큼 중요하다.

우리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너무나 많은 걸 잃고 살아왔다. 실은 잃은 게 아니고 말 그대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잊고 살아왔는지 모른다. 산다는 건 단순한 배부른 뱃속을 위함이 아닐 것이다.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양보하고 감사하고 베푸는 데에 가장 큰 삶의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지금이라도 후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요즘 아이들은... 물질만능주의야... 구제 불능이다.'라며 개탄하지만 말고, 이제라도 잃고 잊고 살아온 많은 걸 어른들이 몸소 언행으로 실천하면 아이들은 깨우치게 될 것이고 보다 나은 세상의 주역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새빛소식 2004년 7월호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