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프 마라톤(20㎞) 400여회, 42.195㎞를 달리는 풀코스 마라톤 73회 완주, 100~200㎞를 쉬지 않고 달리는 울트라 마라톤 3회 완주, 이것도 모자라 지난해 4월 섭씨 60도를 오르내리는 사하라 사막 522㎞를 5일간 달려 죽음의 한계마저 이겨낸 마라토너….
주인공은 이용술(바오로, 43, 수원 상현동본당)씨. 앞을 전혀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장애 2급)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대기록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성이 차지 않는지 그는 요즘도 매일 30~40㎞를 뛰고, 주일에는 어김없이 20㎏짜리 배낭을 지고 산에 오른다. 9월13일 브라질 아마존 밀림에서 밤새워 5일간 달리는 마라톤에 도전하기 위한 준비다. 비장애인도 엄두를 못내는 이 대회에 장애를 가진, 더군다나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그가 최초로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그는 왜 끊임없이 달리는 걸까.
"저를 통해 삶의 용기를 잃은 이들이 희망을 되찾고 장애, 비장애 가릴 것 없이 함께 더불어 살며 보듬어주는 세상이 앞당겨지기를 바라기 때문이죠."
이씨는 21살 되던 해인 1982년 뜻하지 않은 사고로 시력을 잃은 중도 장애인이다. 경영학도로 밝은 미래를 꿈꾸던 그는 군 입대를 앞두고 친구들과 놀던 중 다른 무리의 싸움을 말리다 각목에 맞아 머리를 다치는 바람에 시력을 잃고 말았다.
"아무 것도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저를 무기력하게 만들었습니다. 쉽게 하던 숟가락질마저도 겁이 났을 정도니까요. 운동을 좋아하고 활동적인 편이었기에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방황은 끝 모르게 이어졌고, 12살 때 세례를 받고 믿어온 하느님을 한없이 원망하며 그는 결국 자살을 선택했다.
"모든 일을 남의 탓만으로 돌리고 자괴감에 괴로워하다 선택한 자살이지만 하느님은 죽음을 원치 않으셨나봐요. 번번이 살아났고, 어느날 '자살'을 뒤집어 읽으면 '살자'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번 제대로 살아보기로 작정했죠."
1년간의 방황을 접고 서울 맹아학교에 입학했다. 점자도 배우고, 먹고 살기 위해 침술과 물리치료 교육도 받았다. 또 어릴 때부터 뭐든 시작하면 끝장을 보고야마는 '악바리' 근성의 형을 알고 있었던 동생 권유로 가슴 속 고통을 잊기 위해 헬스클럽에 다녔다. '끝없는 뜀박질'과의 인연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런닝머신에 올라 손잡이에 의지하고도 한 발 떼기가 힘들었던 그는 시간이 흐르면서 달리기에 자신이 생겼고, 그 자신감은 그를 운동장에서 달리도록 만들었다.
"사고 후 3년만이지요. 그날을 잊지 못합니다. 앞사람에게 방울을 달고 소리를 들으며 뛰기 시작하는데 푹신한 흙의 감촉이 가슴에 전해지며 눈물이 쏟아지더라구요. 그때 이렇게 뛸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처음 깨달았습니다."
'악바리' 근성은 이때부터 진가를 발휘했다. 수도 없이 넘어져 무릎이 찢겨지고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지만 육체적 장애가 삶의 장애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그는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기를 8년. 그는 1993년 한 업체가 주최한 하프 마라톤 대회에 처음으로 출전, 완주의 기쁨을 누렸다.
"요즘 대회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끈을 잡고 함께 뛰는 '도우미'가 있지만 당시에는 혼자 뛰었습니다. 출발하자마자 제 속도와 비슷한 사람의 발소리를 듣고 그 뒤를 바짝 쫓아 뛰는 방법이었지요."
마라톤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90년대 초 대회 참가 신청서를 내러간 그는 냉대도 많이 받았다. '앞도 못보는 사람이 달리다가 다치면 책임질 수 없기에 무조건 안된다'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사고시 주최측에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고 달려야만 했다.
"장애가 무슨 죄입니까. 비장애인 마라토너는 대회 참가시 불의의 사고에 대비해 생명보험에도 가입하지만, 장애인들은 보험 가입도 거부당하는 불합리한 현실을 고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 겁니다."
대회 출전 횟수가 늘어나고 마라톤 동호인들 사이에 그의 존재가 알려지자 그는 99년 '시각장애인 마라톤 클럽'을 조직했다. 동료 장애인들에게 삶의 용기를 불어넣고 나아가 장애인 차별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지금은 부산과 울산, 서울 등지에서 회원 130여명이 활동할 정도다.
비장애인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 풀코스 완주 기록(3시간 5분)을 갖고 있고, 지난해 12월 일본 아오시마 시각장애인 국제 마라톤 대회에 처녀 출전해 세계 강호들을 물리치고 당당히 우승을 차지한 이용술씨. 경기도 성남시 분당의 '참조은 한의원'에서 물리치료사로 근무하며 당찬 삶을 일궈가는 그의 도전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오는 9월 아마존 밀림 마라톤 대회에서 실패하면 성공할 때까지 도전할 것이고, 성공하면 64일간 4800㎞를 달리는 미대륙 횡단 마라톤 대회에 도전할 것입니다. 저는 장애우들에게는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비장애인들에게는 '나는 장애인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를 질문으로 던지며 차별없이 더불어 사는 좋은 세상이 오기를 기원하는 달리기를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박주병 기자 jbedmond@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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