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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영종도 교육의 선구자 김동화(金東華) 선생

김대철대철베드로 2015. 5. 4. 20:28

 

흔히 하는말로

우리나라의 교육행정만큼  어려운 경우도 없다고한다.

국민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우리나라의 교육정책의 나아가야할길을 말하지못하는이도 없으며

정부의 교육정책을 비판할줄 모르는 국민도  없다는것이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타고난 환경은

국내적으로는 스스로 나서서 교육을 받지못하면 사회구성원으로서 홀로서기가 어려웠으며

국제적으로는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우리역사가 말해주듯이 지혜를 갖고 혜쳐나가기가 어려웠다.

특히 뿌리깊은 불교와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선비만이 대접받을수있었던 전통은  자녀들에 대한 교육의  중요성을 더욱 갖게하기도하였다.

하기야 예속담에도  마소는 낳으면 시골로 보내고  사람은 낳으면   한양으로 보낸다는 말이 있지않았던가말이다. 

 

그러다보니

사공도 많지만 선장도 많아  10 여년전이나 20 년전이나  여전히 정책다툼뿐이고 실정행상이 그칠날이 없었다.

내년에는 또 대학입시정책이 어떻게 바뀐다는둥,   2010년부터는  초중고학년제가 근본부터 바뀐다는둥  여전히   오늘 현재도 혼란스럽기만하다.  

아마  그런 상황은  앞으로도 계속될수밖에 없을것이다.

 

 

 

 

내 고향 영종도는 

섬으로서  고려시대에는 해상교통이 불편하여  조정의 귀양지로서  유배인들이 살기도하였던 곳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군사요충지로서의 기능만 있었을뿐   양반들이 없는  상민들의 섬이기도했다. 

그러다보니 그곳에 거주하는 섬사람들의 교육환경이라는 것은 육지의 그것보다는  열악하기 짝이 없었으며  빈곤의 악순환이  계속되는것처럼    대대손손이 그저 섬사람으로서 소위 벼슬이라는것은 한양에서,   육지인 인천에서 내려온 이들이 하는것이었고

그저  소위  토박이 섬사람들은  대물림을 계속하여 논밭에 나가 농사를 짓거나 소금을 굽거나  나무를 해다가 관가에 팔아 먹고사는것이 최고의 벼슬로  생각하고 운명처럼 살아가는 형편이었다. 

 

그러다보니  

개화기인 1900년대 초기에까지도 그렇다고할수있는 교육기관이 있었을리가 없었고   사설인 서당조차  흔할리가 없었다.

 

그런   섬지역이었지만   부유하게 살아가던 사람들도  지금처럼   상당수 있었으며  그들의 자손들은 당시로서 받을수있는 교육을  육지에 나가서 받으며 성장할수가 있기도했다.

그중에   김동화(金東華)라는 분이 있었으며 그는 당시에는  영종도내에서   지식인층에 있던분이었다.

 

 

잠시 그 당시의 행정구역형편을 적어보자면

1875년 운요호사건이후  1895년 7월  영종진이 폐지될 당시까지에는 

4개 면으로(진하면,구읍면,후소면,삼목면) 행정구역이 구분되어있었지만  그당시  면의 위격은 지금의 통 개념이었으며

1909년 6월 법률제26호에 의한  지방구역과 명칭변경에따라 현재 행정구역의 골격을 보이게 되었는바 그 내용은 영종면을  8개리로 세분화하여 구읍리,외중촌리,영하리,송산리,전소리,후소리,예호리,삼목리 가  그것이었다.

 

바로 이분은   1906년(광무 10년)  당시   영종도에서 살면서 나라의 장래는 물론 영종도의 발전을 위해   고민하던 분이었다.

시기는  일제강점이 시작되기 얼마전으로서    흔들리는 나라의 안위를  식견이 있는 백성들은 모두 걱정하던   암울한 시대이기도했다.

쇄국정책이 무너지고 개항이 이루어질 시기인 1883년 5월27일부터는 조정에서는 일본인에 대한 영종도와 대부도에대한 자유통행결정을 해주게되어  영종도에도 일본인들의 왕래가 잦았으며

1890년도에는  일본인  武川盛次가  조선인 명의인 황치윤, 이치명 명의로 영종도내 국유림을 대부받아 벌목은 물론 있었던 임야내 지장물을 철거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했으며

그 이후에는 바다와 육지에서  양식업및 광업,  그리고 나중에는 주민들의 터전인  농업에까지  점점 조여오는 외부세력에의 지역훼손의 모습을 섬주민들이 지켜보면서    섬을 빼앗김에 대한 위기감과 안타까움은 컷었던것이다. 

 

 

 

그는 영종도   중촌마을 태생으로서 

교육만이 이러한 어려움에서 다시 나라를 바로 세울수있다는것을 인식하고있었으며 

이렇케하지못하는 영종도의  어려운 여건을 크게 염려하였고 이를 항상 안타깝게 여겼다.

 

부유한 집안덕분으로 육지에서 교육을 받을수있었던 그는  

학식과 덕망이 두터워   명예직이긴 했지만  嘉(아름다울가)선(善착할선)大夫 同知中樞府 部事를 지내기도했을 정도여서 직접 이 일에 나설수있었던것이다

 

참고로 "가선대부" 란 벼슬은 

조선시대 종2품인  문무관의  품계로서   고종2년(1865년)부터는 문무관이나 왕의 종친, 또는 왕이나 왕세자의 사위에게 내리는 품계로 병용하기도하였으니 

당시 통정대부라는 정3품 벼슬이  지방의 유지나 장수자 에게 내리던 벼슬이었던것을 감안해보면 명예직이 아니었을까 여겨지기도한다.

 

그는  이러한 고민끝에  섬지역의 육영사업에  뜻을 두고    직전의 영종면장이기도했던 南慶祐와 합심하여  영종도에서는 최초로   " 영종사립학교 " 를 설립하고  섬지역주민교육에 헌신하였다.

그 해는 1906년도였다.

(1908년 5월16일의 천주교 인천교구의 전사를 보면 영종도에 보명학교가 있었으며 학감은 남필우였다는 사료가 있는것으로 봐서 당시 정황을 볼때   동일학교가 확실하다.)

 

영종도에서 정부가 주관하여 만든 교육기관은  1920년7월 16일 개교한  영종공립보통학교로서

무려 15년전에   유일한  지역 젊은이들을 위한  신식교육이 이 영종사립학교를 통해서 이루어질수가 있었던것이다.

이러한  그의 교육에 대한 관심과 경험이 기초가 되어    최초의 정부가 인정한학교인 영종공립보통학교를 설립할때에도 그 추진대표로서 그의 숨은 기여는 대단히 큰것이었다.

 

전기하였듯이

그는   1909년 면직제로의 개편이후    남경우의 후임으로 영종면장이 되었으며   교육에의 헌신은 1920년 공립보통학교가 개교될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이외 그의   족적은  또 있었다.

 

영종공립보통학교의 개교되고   영종사립학교를 폐교한 이후에는

1921년 섬사람들중  어려움에 처해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영종빈민구제회"를   섬내 유지들끼리 설립할때에도 이를 주도하여  많은 액수를 헌금하여 빈민구제사업을 할수있도록 하였으며  

1924년 2월26일 인천 월미도와  영종부두간의  정기선항   개설에도 크게 헌신하였으니 영종도를 위한 그의 족적은 가히 영종지역 역사에  남을 만한 것이었다.

 

그의 묘는  관창마을 (곤돌재) 뒷산에 있으며  그의 묘비에는 그 공적이 기록되어 남아있기도하다 

참고로 그 묘비형태는 받침돌위에 대석이 있고 그 위에 백색비와 비갓이 있으며 높이 1,35센티미터, 넓이 42센티미터이다.

 

 

 

역사의 기록과 보존,  그리고  알려짐은 필요한것이다.

그 역사를 통하여 지금의 사람들은  그 당시의 선인들이 흘린 땀을 기억할수가 있는것이며

기억됨을 통하여  우리는  지금을 헛되게  보내서는  왜 안되는가를     두려움속에  인식하게될수가있는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모두는  역사를 두려워할줄 알아야한다.

가정이나,  사회에서  언제인가 판단되어질 나를  항상 겸허하게 생각하여야하는것이다.

역사는  나의 심판관이라는 생각으로 .........   

출처 : 허허벌판
글쓴이 : beolpa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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