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자 가톨릭 인천교구 주보에서
정장근(레미지오) 용유성당 주임신부님의 " 작지만 커다란 부모같은 마음으로" 라는 글을 읽었다.
용유도는
내가 지난 1991년부터 무려 4 년여동안 공직으로 근무하던 지역이기도 했지만
지난 1979년 하계휴가를 이용해 영종성당에서 청소년선교팀을 구성해 5 명이 선교순례를 갔었던곳이었기에 잊혀지지않는 공소이기도 하였다.
그러했기에 더 관심있게 신부님의 글을 읽었고 나를 반성하기도하였다.
신부님의 글중에
농촌지역이기에 지금도 노인층만이 미사에 모습을 보이고 주일헌금이 202,000원 으로 도시와의 격이 전혀 맞지않는 열악한 환경에있는 성당이라는 소개가 있었고
주일헌금보다 많은 221,000원의 수재의연금이 2 차헌금으로 모금되었다는 내용을 보면서 부끄러운 나의 모습을 보는것같아 미안스럽기만했다.
이렇게 벌이도없으실 노인분들이 마음으로의 많은 의연금들을 내주셨는데 나는 어떻했는가하고말이다.
내가 이번 수해에 낸 수재의연금은
직장에서 20,000원, 성당에서 5,000원, 그리고 앞으로있을 봉급봉투에서 1-2만원이 거출되겠지만 여전히 부끄러운 금액이기만 하기때문이다.
어제
언론에 비친 최근의 수재의연금 모금실태를 보면
겨우 라면 몇박스와 헌옷가지등이 대부분이고 실제 수해민들에게 필요한 과거와같은 다양한 성품과 현금들을 보기힘들다는 것이었다.
나를 포함해서 모두가
좀더 마음의 문을 열어야하지않을까 생각해보았다.
글이 조금 다른 방향으로 가버리고말았다.
앞에서 조금 언급했지만
나는 1979 년부터 2 년간 영종성당에서 청소년회장을 맡아 성당내 활동을 한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일반 신자들이 경험하는데 10 -20년이 걸릴 다양한 경험을 할수있었으며 신앙의 마당을 알게되기도하였다.
이처럼 신앙생활에서 단체활동의 필요성은 크다고할수있다.
그해 여름,
회원들의 뜻에따라 나를 단장으로 5 명이
당시 영종본당의 관할하에 있었던 북도면 신도와 시도공소, 용유의 용유공소와 무의공소를 순회하는 전교순례가있었다.
북도면에서는 신부님이 함께하셨고 용유에서는 독자적으로 순례를 하였었다.
잠은 공소내에서 함께 했었다.
그 당시에는 그래도 섬에 중학생층이 많았고 여름방학을 이용해 시내의 고등학생과 현지에 거주하는 청년층들이 많이 있었다.
가는곳마다 30- 50 여명의 중교, 청년층이 모여 밤새도록 신앙과 관계되는 이야기를 나눴고 그들의 집을 방문해 음식을 나누던 추억이 그리워진다.
활동기간동안 공소주변의 풀을 깍기도했고 무너진 공소를 보수하기도했으며 전마을을 돌며 전교활동을하기도하였다.
특히 밤에는 모든 중교청년들이 모여 등불을 켜놓고 대화의 마당을 만들기도하였다.
당시 용유공소를 방문했을때
용유공소앞에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2-3 그루 있어 자연의 그늘을 만들어주었고
그 그늘아래는 동네사람들은 물론 외지인들의 전교의 장이 되기도하였다.
특히 교통이 어려웠던 그당시의 여건으로 늙으신 할머니가 전교회장으로 성당을 지키고계셨는데 그 할머니는 우리와의 하루밤을 세심하게 배려해주셨던 기억이 새롭기만하다.
다음날 덕교동선착장을 통해 무의도로 들어가게되었을때 전교회장님은 뱃삯으로 얼마인지는 기억이 없지만 동전 한개씩을 쥐어주던 생각이 난다.
그 당시 밤새도록 함께 대화를 나누던 중고등학생들은 지금 모두 어른이 되었을것이다.
그 학생들중에 남북동에 살고있었던 " 장 00 " 라는 이름은 기억이 나지않는 중학생이 떠오르기도 한다.
무의도공소에서의 적막했던 하루밤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쓸쓸했다.
낮시간을 이용해 집집을 방문했지만 신자임을 확인한 사람은 노인 1분과 결혼을 앞둔 여인한명이었으며 미사는 신부님이 오실때에만 약 1-2개월에 1 번정도씩 이루어지고있었다.
그때들은 한 야화로
영종본당에 계신 이준희마르코신부님이 무의도공소를 어느날 방문해 미사를 드리려고했으나
그날은 1 명의 신자도 나오지않아 신부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며 돌아서셨다는 신부님을 수행해 따라갔던 영종본당의 채모 씨의 목격담은 당시 이야기를 듣고있던 우리들의 마음을 안타깝게하기도했으며
더욱 인간들의 본심을 알게해주는 부끄러운 사례는
그 이전 진신부님께서 계실때에는 섬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고국인 미국에서의 각종 원조물품들을 구해와 매번 갖고 들어가 나눠주셨는데 그시절에는 공소에 사람들이 들어갈틈이 없을 정도로 많았다는 웃을수도 울수도없는 말을 듣는것이었다.
초기 전교의 방법중 한가지이었겠지만 소위 그 " 밀가루신자" 들의 모습이었다.
지금부터 20 여년전,
그때부터 지금의 그런 모습을 보고있는것처럼 용유와 무의지역의 천주교신앙의 마당은 황폐해져있다.
1965년 전후 진신부님의 노력으로 확보되고 지어진 당시의 용유와 무의공소,
지금은 그나마 용유공소는 신부님이 계신 본당으로 남아있지만
무의공소는 그 흔적조차 찾을수가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여전히 개신교회는 여러곳이 터를 잡고 하느님을 지역인 모두에게 보여주고있다는사실이다.
신자들의 제문제와 천주교회 제도와 교리의 제문제, 함께 걱정하고들 있지만 뒤돌아보고 현실성있는 보완이 있어야할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되는것이다.
앞으로 20 년후,
도시 성당에서마저 보기힘들게된 청소년층과 젊은 중년층의 현주소와 여성화된 모든 전례제도 등,
그리고 없어져버린 무의도공소의 현주소와 노년층뿐인 용유, 영종의 성당모습을 함께 보면서
희망이 있는 아침이기보다는 저물어가는 저녁이 가까워오고있는것은 아닌가하는 안타까움을 갖게되는것이다.
그것이 누구의 탓이겠는가?
나의 탓인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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