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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부활제2주간수요일(100414.수)

김대철대철베드로 2010. 4. 14. 10:40

<부활 제2주간 수요일>(2010. 4. 14. 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죄를 짓고 난 뒤의 행동을 보면, 아담과 하와 같은 사람이 있고,

카인 같은 사람이 있고, 라멕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은 다음에 하느님을 피해서 숨어버립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죄라는 것을 알고 있고,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고 부끄러워합니다.

 

카인은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것은 알지만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뗍니다.

일단 감추고 덮어 버린 다음에 그런 적 없다고 합니다.

 

라멕은 창세기 4장에 나오는 인물인데 하느님처럼 행세합니다.

어떤 행동이 죄가 되느냐의 기준은 자기가 정하고

남이 하는 행동에 대해서도 자기가 판단하고 자기가 심판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은 다음에 에덴동산에 쫓겨났지만

그전에 이미 스스로 에덴동산을 떠난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피해서 숨었다는 것은 하느님에게서 달아난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카인은 동생이 죽은 일에 대해서 자기는 모른다고 잡아뗐지만

하느님의 심판을 받았고 평생 벌을 받는 처지가 됩니다.

그것도 사실상 자기가 자기에게 내린 형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모른다고 잡아뗀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스스로 끊어버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멕에 대해서는 그 다음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소돔과 고모라 사람과 같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누가 보아도 죄가 되는 행동들을 하면서

극도로 타락의 길을 걷고 있었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행동이 죄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롯과 천사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천사들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은 하느님처럼 행세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멸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더라도 정신을 차리고 하느님께 빌었다면,

잘못했다고, 용서해달라고 빌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부끄러워하기만 했을 뿐 잘못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회개할 생각을 안 했으니 쫓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카인은 형벌이 너무 무겁다고 줄여달라고 호소했지만

잘못했다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죄를 알고 있었지만 회개를 거부한 것입니다.

그러니 역시 하느님 앞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에 대해서는 하느님도 달리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단 열 명이라도 의인이 있다면 멸망시키지 말아달라고 빌었지만

소돔과 고모라는 회개할 시간 여유도 없이 멸망해버렸습니다.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멸망한 것이 아닙니다.

단 한 명의 의인이었던 롯마저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멸망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와 카인은 쫓겨나는 것으로 그쳤지만

소돔과 고모라는 완전한 멸망, 소멸이었습니다.

스스로 하느님 행세를 하는 자들은 하느님 앞에서 설 자리가 없습니다.

 

창세기의 교훈은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지옥으로 가라고 심판하시기 전에

악인들 스스로 지옥으로, 멸망의 길로 간다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처럼.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교도소 사목을 해보니 그 말이 맞습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더라도 회개할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고,

회개해서 새로운 사람이 될 가능성은 항상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든 “너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 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저는 “가능성”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가능성”일 뿐입니다.

교도소 사목자는 그 가능성을 보고 포기하지 않고 있는데

본인 스스로 포기해버리면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냥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라멕처럼, 또 소돔과 고모라 사람처럼

그렇게 하느님 행세를 하고, 모든 판단 기준을 스스로 정해버리고,

자기가 잘못한 일이 없다고,

아니, 자기가 잘했다고 끝끝내 우기면 가능성은 아예 없어져 버리게 됩니다.

 

양심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인, 강도, 강간 등의 중범죄를 저지르고 그런 범죄를 저질렀다고 시인하면서도

자기는 잘못한 일이 없다고 우기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그런 경우에는 힘을 잃습니다.

자기 스스로 새 사람이 될 가능성을 없애버린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심판하시기 전에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심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 오셨지만

예수님도 구원하시지 못할 사람들이 한 종류 있습니다.

구원 받기를 스스로 거부하고 자기 발로 멸망의 길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몰라서 못 믿는 것은 탓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거부하는 것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냥 용서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모르고서 한 일이니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알면서도 한 일이라면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상을 보면 무슨 종교를 믿든지, 아니면 종교가 없든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정말 착하게 살고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고,

실수로 죄를 지었더라도 바로 회개하고 새로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고,

계속 죄 속에서 살고 있긴 하지만 거기에서 빠져나오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고,

죄 속에서 살면서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포기하는 사람도 있고,

죄 속에서 살면서 자기는 아주 떳떳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최후의 심판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하느님의 판결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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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Fr.송영진 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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