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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부활제2주간월요일(100412.월)

김대철대철베드로 2010. 4. 12. 10:02

<부활 제2주간 월요일>(2010. 4. 12. 월)

 

<꽃들에게 희망을>

 

4월 12일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옛날에 읽었던 “꽃들에게 희망을” 이라는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생활성가 중에도 그 이야기로 만든 노래가 있습니다.

못생긴 애벌레가 허물을 벗고 예쁜 나비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최고의회의 의원이면서 유명한 율법학자였던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아마도 그는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방법을 질문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십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알아듣지 못하는 그에게 다시 설명하십니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라는 것은 세례성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세례식 때에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난다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낡은 허물을 벗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신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단체에 가입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것은 인생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 자체를 바꾸는 것입니다.

스스로 그렇게 달라져야 합니다.

 

신학생 시절에 “그 신학생에 그 신부” 라는 라틴어 격언을 자주 들었습니다.

신학교에서 사는 모습을 보면 신부가 되었을 때 어떻게 살지 보인다는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살던 모습 그대로 신부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은 거의 대부분 들어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좋은 뜻의 말이 아닙니다.

한 단계씩 나아갈 때마다 달라져야 하는데

계속 그 모습 그대로 산다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진보와 쇄신, 그리고 탈피.

그런 노력이 성직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에게 요구됩니다.

 

예비신자 때의 모습을 보면 영세 후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데

역시 그것도 좋은 일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났다면 새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달라지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했지만

신앙생활이란 세 살 버릇은 세 살에서 끝내도록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완전히 새로 태어나신 분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완전히 새로 태어나신 분입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성인 성녀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의 과거를 알지만 문제 삼지는 않습니다.

새로 태어나기 전의 그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고

성인 성녀로 새로 태어난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새로 태어난 사람의 과거는 지워주십니다.

세례 받기 전의 죄는 고해성사를 보지 않아도 됩니다.

과거는 죽었고, 소멸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나빴던 일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좋았던 일에 대해서도 적용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를 버리지 못하고 집착하기도 하고

그리워하기도 하고 자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신앙생활은 한 번에 목표를 달성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날마다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새로 태어나는 일도 날마다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일입니다.

게으름을 피우면 과거의 힘이 자꾸 우리를 끌어당깁니다.

 

우리는 애벌레의 허물을 벗고 예쁜 나비가 되어서

꽃들에게 희망을 주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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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은 어렵습니다.

단순히 예수님의 생애와 행적을 기록한 전기가 아니라

깊은 신학과 묵상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학자들이 요한복음을 주석하고 해석한다고 했지만

이천 년 동안 늘 그저 그랬습니다. 여전히 어려운 책으로 남아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 예수님의 말씀을 조금이라도 알아듣게 됩니다.

그냥 무턱대고 읽으면 선문답 같은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러니 니코데모가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만 알고 있었을 뿐이고

예수님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도 니코데모 수준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성경 좀 공부하고 학위를 받았다고 해서

복음서의 전문가로 자칭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성경의 전문가란 없습니다. 누구든지 겸손해져야 합니다.

 

또 성서학자들이 써놓은 해설서 좀 읽었다고 해서

예수님 말씀을 다 이해했다고 큰소리칠 수도 없습니다.

주석서나 해설서는 약간의 도움을 주는 도우미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각자 스스로 예수님을 만나는 깊은 체험을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하시는 예수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사실상 우리 모두는 또 하나의 니코데모일 수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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