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의 근현대 문화유산
지리적으로 중부내륙지역에 위치한 충북에는 서구 종교가 일찍부터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서도 천주교는 국내에서 종교로 인정받기도 전에 제천 배론성지와 진천 배티성지, 괴산 연풍성지를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하면서 관련 유산이 많이 남아 있는데 해방 이후 신축된 천주교 성당 중에는 건축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건물들이 적지 않다. 천주교와 함께 성공회와 관련된 건조물도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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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 근현대 종교문화 유산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 중 하나인 제천의 배론신학교는 1956년에 지어진 한국 최초의 신학교였다는 점에서 지금도 성지를 찾는 신도들이 줄을 잇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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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와 기독교
충북의 천주교회 가운데 가장 역사가 오래된 것은 1948년에 건립된 옥천 천주교회이다. 이 교회는 1991년 10월경 증축되면서 장방형 형식이 라틴십자형으로 바뀌었으며 원래 성당 건축물의 기본형태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관리와 보존상태가 양호한 이 건물은 지난 2002년 문화재청 지정 등록문화재 7호로 지정됐으며 2004년에는 문화재청의 근대문화유산 30선으로 선정됐다.
또 지난 2006년 5월에는 본당 설정 100돌을 맞아 감사미사가 봉헌됐다.
옥천성당이 충북 천주교 역사에서 특별히 관심을 모으는 이유는 보은·옥천·영동 등 충북 남부3군 신앙공동체의 모태(母胎)가 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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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층 팔작지붕 한옥 형태를 절충한 성공회 진천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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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일제강점기 당시 신사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이후 1940년대 천주교 성당 건축물 중에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근대건축물로서 해방이후 지방성당 건축의 전형적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마루바닥과 장방형의 천장, 유리화로 둘러싸인 제대가 독특한 이곳에는 본당의 역사를 한 눈에 살펴 볼 수 있는 유물 전시공간도 마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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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 시도유형문화재 제188호로 지정된 음성 감곡성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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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천주교회는 일제강점기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1948년 김영근 베드로 신분가 7대 주임으로 부임, 지금의 삼양리로 성당을 신축이전하고 이후 변 로이 신부가 54년 부임해 100여평 규모의 새 성전을 완공하며 충북 천주교사의 큰 획을 그었다.
제천의 배론신학교가 세워진 것도 동시대인 1956년이었다.
당시 천주교는 충북의 산간지방에서 교세를 확장해갔는데 배론신학교는 한국 최초의 신학교였다는 점에서 지금도 성지를 찾는 신도들이 줄을 잇고 있다.
천주교가 합법화된 것은 한불조약 이후인 1886년 이후. 음성 감곡성당은 그 이후인 1896년 임가밀로(R. Camillus Bouillon) 신부에 의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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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 남부3군 천주교 신앙공동체 모태가 된 옥천성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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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명성황후의 6촌 오빠인 민응식의 집이 있던 곳으로 당시 민응식의 집은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민응식이 서울로 압송되면서 의병들이 사용하자 일본군들이 불태워 버린 것으로 전해진다.
성당의 설계는 프랑스 신부 시잘레가 했으며 중국인들이 공사를 맡았는데 안쪽 천장이 원형돔으로 꾸며진 이 성당을 두고 일각에선 명동성당의 축소판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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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지역 근현대 기독교 문화유산을 대표하는 청주 제일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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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 감곡성당은 지난 1996년 시도유형문화재 제188호로 지정됐다.
증평성당과 청주에 있는 내덕동 주교좌성당은 1950년대 성당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내덕동성당의 경우 기와 지붕에 대한 여러차례의 보수가 있었으며 1980년대 보수한 것이 가장 최근이다. 상공에서 봤을때 성당 전체가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는 이곳 역시 바닥은 마루바닥, 창문은 아치형의 창문, 처마는 전통 한옥의 처마양식을 채용했다. 성당 전체모습은 서양식이지만 외관에 전통한옥의 기와집 양식을 절충한 것이 독특하다.
청주 서운동성당과 충주 교현동성당, 보은성당도 1960년대 성당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종교 문화유산으로 빼놓을 수 없다.
기독교 중에서는 1939년 지어진 청주 제일교회가 대표적이다.
충북에 개신교가 들어온 것은 20세기 이후. 1901년 청주 신대리의 오천보 등이 1900년경 경기도 죽산군 둥벙리 교회 사경회에 참석하고 돌아와 충북 최초의 교회를 세웠다고 전해내려오고 있다.
이후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밀러(F.S.Miller) 목사가 1904년 김흥경조사와 함께 설립한 것이 청주시 남문로1가에 위치한 현재 청주제일교회의 전신 청주읍교회로 전해지고 있다.
1939년 기공된 제일교회의 교회당은 2층 적벽돌로 지은 서양식 건물로 청주시내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상징적 건물이었으며 현재까지도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이곳은 개신교 예배당 가운데 가정 오래됐다는 것 이외에도 문맹퇴치와 신교육 보급, 세광학원 설립 등 중등교육에 이바지한 공로 또한 적지 않아 문화사회적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성공회와 기타 종교
충북의 근현대 종교 문화유산 가운데는 성공회 교회 건물도 적지 않게 발견된다. 성공회가 충북지역에 정착한 것은 1905년 진천에 거점이 마련되면서 부터로 알려져 있다.
충북개발연구원 김양식 연구위원이 쓴 2001년 연구보고서 '충북지역 근현대 문화유산 기초조사'는 제2대 교주 Arther B. Turner 신부가 당시 서울 정동교회(지금의 서울 주교좌성단) 주임사제 W.N.Gurney신부에게 진천지역에 전도를 나서게 하면서 부터라고 설명했다.
때문에 1907년 진천에서는 전도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졌고 마침내 1908년 성바오루 성당이 축성됐다.
성공회는 이를 바탕으로 지방마다 성공회 기도소를 설립하고 충남 천안, 청주, 충주, 음성에서 선교활동을 펼쳤는데 그래서 충북에는 천주교와 개신교 못지 않게 지금까지도 교회건물이 많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것은 1985년 충북도 유형문화재 제149호로 지정된 청주 수동교회가 있다.
청주 수동교회는 전면 4칸, 측면 8칸 총 32칸으로 돼 있는데 전형적인 조선시대 단층 한옥 건축양식을 띄며 토착적 기독교 문화의 향취를 담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수동 교회 못지 않게 종교사적으로나 충북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다른 교회들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낮다.
충북 근현대 종교 문화유산
구분 |
명 칭 |
위 치 |
연도 |
천주교 |
옥천 천주교회 |
옥천군 옥천읍 삼양리 158-2 |
1948 |
증평성당과 메리놀병원 |
증평군 증평읍 장동 1037 |
1957 |
청주 내덕동성당 |
청주시 상당구 내덕2동 172-2 |
1961 |
부강성당 |
청원군 부용면 부강리 |
1961 |
청주 서운동성당 |
청주시 상당구 서운동 90-1 |
1962 |
충주 교현동성당 |
충주시 교현동 |
1964 |
천주교 수동성당 |
청주시 상당구 수동 351-3 |
1966 |
천주교 보은교회 |
보은군 보은읍 삼산리 174-8 |
1966 |
기독교 |
청주 제일교회 |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1가 154 |
1939 |
성공회 |
진천교회 |
진천군 진천읍 읍내리 329-1 |
1923 |
음성교회 |
음성군 읍성읍 읍내리 640-3 |
1923 |
매일교회 |
음성군 삼성면 상곡리 270 |
1938 |
대소교회 |
음성군 대소면 오산리 226 |
1934 |
충주교회 |
충주시 교현동 |
1931 |
기타 |
인도교 창립기념비 |
괴산군 불정면 목도리 |
1933 |
원불교 청주교당 |
청주시 상당구 탑동 305 |
일제 |
1923년에 지어진 진천과 음성교회는 뾰족아치와 종탑 등 서구식 건축양식을 띄고 있는데 이 가운데 음성교회는 유지보수를 거쳐 전통한옥의 팔작목조와가인 사제관만 보존되고 있다.
그러나 1938년 조성된 음성의 삼성교회는 폐허로 방치돼 왔으며 앞서 1934년에 조성된 대소교회는 음성지역의 초기 대한성공회 성당 구조를 알 수 있는 자료임에도 원형이 많이 변형된 채 사택으로 사용돼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성공회 교회건물 중에서는 1931년 조성된 충주교회 또한 근현대 종교 문화유산 중 초기 서양식 교회의 전형을 보여주는 건축물로 손꼽힌다.
이외에도 기타 종교관련 문화유산으로는 인도정의와 종교통일을 목적으로 이태호(1861-1943)가 괴산군 불정면 목도에 창시한 신흥종교인 인도교의 창립기념비를 비롯해 일제 식민지 시대 일본 사찰 대연사 건물이었던 현재 원불교 청주본당이 눈여겨볼만 하다.
현재 원불교 본당 건물은 지붕과 창문, 기둥 등이 식민지시대 일본식 건축양식을 따르고 있는 목조건물로 일부에서는 철거의견도 있었지만 식민지시대의 유산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겠다. 원불교가 이 건물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부터로 알려져 있다. / 윤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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