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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문화재 반환운동에 앞장서온 재불 서지학자 박병선 박사"

김대철대철베드로 2010. 1. 16. 18:08

"[인터뷰]문화재 반환운동에 앞장서온 재불 서지학자 박병선 박사"

노구는 쓰러졋으나 열정과 의지는 꼿꼿... 지난 6일 가톨릭대 성 빈센트병원서 투병 중인 박병선 박사에 제26회 가톨릭대상 특별상 상패 및 상금 전달


▲ 박병선 박사가 6일 성 빈센트병원에서 최홍준 서울대교구 평협 부회장에게 가톨릭대상 상패를 받고 있다.



   재불 서지학자 박병선(루갈다, 83) 박사.

 1967년 세계 첫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을, 1975년에는 외규장각 의궤(儀軌) 191종 297권을 발견해 세상에 알려 국내에 문화재반환운동의 씨앗을 뿌린 주역이다.

 이뿐 아니다. 1866년 병인양요 관련 사료를 찾아내 500여 쪽씩 두 권으로 정리해 왔다. 2006년 한불수호조약 체결 120주년을 전후해선 프랑스는 물론 국내 한불관계 사료를 찾아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를 정밀하게 복원해 왔다. 그 결과 첫 자료집이 나왔고, 2권은 번역을 마무리했으며, 3권은 이제 막 번역에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팔순 노구를 이끌고 이처럼 왕성한 연구활동을 하던 그가 지난해 9월 초에 쓰러졌다. '2009 유네스코 직지상' 시상식에 참석하고자 귀국, 청주를 찾았다가 "설사 때문에 고생한다"는 말을 전해들은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 주선으로 청주성모병원에 수건 하나 달랑 들고 입원해 대장암 발병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치료를 받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 가려다가 장과 방광이 유착돼 가톨릭대 성 빈센트병원에서 갑자기 수술 받고 투병 중이다.

 그의 투병 소식에 「직지심체요절」을 인쇄한 흥덕사지를 복원한 청주시민들은 평생 연구만 하느라 재산 한 푼 모으지 못한 그에게 1억2000여만 원에 이르는 후원금을 치료비로 전달해 노학자를 감동시켰다.

 그는 또 최근 제26회 가톨릭대상 특별상 수상자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지만 입원 중이어서 시상식에 참석치 못했다. 한국 천주교 평신도사도직협의회(회장 한홍순)는 심사를 맡았던 최홍준(파비아노) 서울 평협 부회장을 통해 그에게 6일 상패와 상금을 전달했다.

 "이제까지 저를 이끌어 주셨으니 앞날도 주님께서 뜻하신 대로 이끌어 주시겠지요. 오늘 하루 주신 것, 감사를 드리며 삽니다. 제가 앓아 누움으로써 오히려 많은 분들이 직지와 외규장각 의궤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하니 기쁩니다. 쾌유 기도를 담은 편지에 일일이 회답해 드리지는 못하지만 감사를 전합니다. 주님 섭리를 저희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쓰시는 대로 저는 움직일 뿐입니다."

 노학자는 꼿꼿했다. 가톨릭대상 상패를 전하러 온다는 말에 환자복 위에 분홍 스웨터와 검정 바지를 덧입었다는 그의 얼굴은 생각보다 맑고 환해 보였다.

 "고통을 견딜 수 있는 힘만 달라고 기도한다"는 그는 최근 외규장각 의궤에 대한 프랑스 행정법원의 판결 얘기가 나오자 눈을 반짝였다. 그는 "프랑스 행정법원에서 외규장각 의궤에 대한 '약탈' 사실을 인정한 것 자체만으로도 큰 성과이며 대성공이라고 본다"며 "지금까지 프랑스 정부는 한 번도 약탈 문화재와 관련해 약탈 사실을 인정한 적이 없고, 다만 '가져온 것'이라고만 말해왔다"고 전했다. 이어 "약탈을 인정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얼마나 감개무량했는지 모른다"며 "병상에 있지만 않았다면 프랑스로 건너가 큰 소리로 환호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박 박사는 특히 지난해 9월까지 자신이 해온 연구작업이 중단돼 있는 것도 아쉽다고 전했다. 그의 연구는 1866년 10월 강화도에서 외규장각 의궤를 약탈한 프랑스 극동함대사령관 로즈 제독이 해군대신에게 보고한 공문서와 기타 병인양요 관련 보고서를 번역해 500여 쪽으로 분류했고, 프랑스측 참전 군인들이 신문 및 잡지 등에 발표한 글과 논문, 보도문 등과 함께 「일성록」 등 한국측 사료들을 모아 또 다시 500여 쪽으로 정리해 왔다. 프랑스 주재 한국대사관 내에 있는 그의 연구실에서 추진돼 온 이들 사료에 대한 번역 작업은 그가 병석에 누우면서 지지부진하다. 1~2년 걸린 것도 아니고 무려 몇십 년이나 걸려 구한 사료들이 사장될 위기에 처한 게 가장 안타깝다.

 1972년에는 연구 때문에 국적을 프랑스로 바꿨지만 한 번도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았다는 그는 "프랑스에선 마치 역적처럼 취급하며 미워했고, 한국에선 문화재 반환을 촉구하는 저를 귀찮은 존재로 여겼지만 양심의 가책을 받은 일이 한 번도 없다"며 "이들 사료에 대한 연구는 제게 주어진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알기에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그가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큰 보람으로 꼽는 일은 「직지심체요절」이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본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그는 1972년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유네스코 후원으로 열린 '직지심체요절' 전시 개막행사에서 독일 구텐베르그가 인쇄한 성서본에 78년 앞서 1377년에 인쇄한 「직지심체요절」이 금속활자로 인쇄됐다는 사실을 입증해 냈다.

 "당시 「직지심체요절」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라는 설명을 붙이자, 전문가들은 '이렇게 당돌한 짓이 어디 있느냐'고 했지만, 이어진 제 설명에 이들은 「직지심체요절」이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이라는 사실을 인정을 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땐 눈물이 나올 정도였지요. 한국 사람으로서 제가 배운대로 제게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해 했을 뿐입니다."

 투병 중에도 "기도의 힘을 믿는다"고 전한 그는 "하느님께서 제게 1년만 시간을 더 허락하신다면 수술이 마무리되는대로 프랑스로 돌아가 관련 사료 번역과 자료집 정리를 꼭 마무리하고 싶다"고 희망했다.

 1927년 서울 저동 태생으로 서울대 사범대 사학과(1950년)를 나온 그는 1955년 유럽으로 건너가 벨기에 루벵대 동양사학과(1962년)를 거쳐 1967년부터 13년간 파리국립도서관에서 근무하면서 파리 제7대학(1971년)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파리7대학 동양학부 한국학과 강사를 지냈다. 1975년에는 베르사이유 국립도서관에서 중국 고문서에 포함돼 있던 외규장각 의궤를 처음으로 찾아냈고, 2006년부터는 프랑스 주재 한국대사관 요청으로 한불 관계사를 정리해 왔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