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Catholic/가톨릭교리 문헌

생명을 주시는 주님(Dominum et Vivificantem)제2-3부

김대철대철베드로 2004. 8. 30. 17:59

5. 양심을 깨끗이 하는 피

    42. 우리는 이미 파스카 신비의 최정점에 이르러 성령이 결정적으로 계시되고,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현존하시게 되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이렇게 해서 성령이 계시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다락방에서 예고하셨던 바를 확인해 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 말씀으로 해서 파라클리토께서는 새로운 방식으로 현존하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실제에서는 창조 신비의 첫 순간부터, 또 하느님께서 인간과 맺으신 옛 계약의 역사를 거쳐 오는 동안, 성령께서 줄곧 활동하셨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활동이 확연히 드러나게 확인된 것은 사람의 아들, 성령의 능력으로 오시게 된 메시아의 파견을 통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내는 그 파견의 정점에, 성령께서는 신적 주체로서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내며 파스카 신비 안에 현존해 들어가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이제, 십자가의 제사에 뿌리를 두고 있는 구원 사업을 떠맡아 계속시켜야 할 분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물론 이 사업을 예수님께서는 인류, 곧 사도들과 교회에 맡기셨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이 사람들 안에서 또 그들을 통해, 인간 정신과 세례의 역사 안에서 이 사업을 실현해 나가시는 초월적 주체로 살아계시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아니 계신 데가 없이 곳곳에 다 계시면서도(無所不在) “불고 싶으신 대로 부시는”159) 영이십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안식일 다음 첫 날”에 하신 말씀은 파라클리토-위로자, “죄와 정의와 심판에 관한 세상의 죄책성을 들어 밝히시는” 분의 현존을 특별히 강조하십니다. 실제로 이런 관계를 염두에 두어야만,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일과 직접 연결하여 하신 말씀들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있을 것이다.”160)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능을 주신 것은, 그들로서도 교회 안에서 다음 후계자들에게 그 같은 권능을 넘겨주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하사된 이 권능은 성령의 구원적 활동을 포함하고 또 그것을 전제합니다. 성령께서는 “마음의 빛”161)이 되심으로써, 다시 말해서, 양심을 밝혀주는 빛이 되심으로써, “죄를 들어 밝히십니다.” 인간이 자기의 악을 깨닫게 하고, 동시에 그를 선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주시는 선물의 다양성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일곱 가지 선물을 가져다 주시는 분”이라고 칭하며 그분께 간구하며, 하느님의 구원 능력은, 어떤 죄든지 간에 모두 소멸시킬 수가 있게 됩니다. 성 보나벤투라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실제로 “성령의 일곱 가지 선물을 통해 모든 악은 분쇄되고, 대신 모든 선이 실현됩니다.”161)
    그러므로 죄의 용서를 위해서 필요불가결의 조건인 인간의 마음의 회개는 성령의 도움으로 이루어집니다. 내적 통회를 전제하는 참다운 회개 없이, 또 자기 삶의 태도를 바꾸겠다는 성실하고 확고한 결심 없이는, 죄가 “용서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습니다.”162)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이며, 구약과 신약의 전통 역시 함께 견지하는 입장입니다. 실제로, 마르코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공생활 벽두에 맨 처음으로 하신 말씀은 이것입니다.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163) 우리는 이 권고 말씀의 진리를, 성령께서 사람의 아들이 이루어놓으신 구속에 힘입어 “죄를 들어 밝히신 사실”에서 재확인하는 바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 “피가 양심을 깨끗이 한다.”164)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피는, 말하자면, 성령께 길을 열어 인간의 마음에까지 도달할 수 있게 한다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 인간 양심의 지성소까지 들어가실 수 있는 길을 열어드리는 것입니다.

    43.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인간의 소명과 특히 인격의 존엄성에 대해 언급하는 기회에 양심에 관한 가톨릭의 가르침을 상기시켰습니다. 이 존엄성을 특별한 방법으로 결정하는 것은 바로 이 양심입니다. 실상, 양심은 “인간의 가장 내밀한 중심이며, 인간이 하느님과 일대일로 대면하고 그분의 목소리를 듣는 지성소”입니다. 양심은 “마음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이것은 하고 저것은 피하라고 말해 줍니다.” 창조주께서는 인간 속에 선을 명하고 악을 금지시키는 능력을 심어주셨는데, 이 능력이야말로 인격 주체의 가장 고유한 특성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동시에 “자기 양심 속 깊은 데서 법을 발견한다. 이 법은 인간이 자신에게 준 법이 아니라 인간이 거기에 복종해야 할 법이다.”165) 그렇기 때문에, 양심은 선과 악을 결정하기 위한 어떤 자주적이고 배타적인 원천이 아닙니다. 그와는 반대로, 양심 안에는 어떤 객관적 규준에 대한 순종의 원리가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객관적 규준이, 인간의 심층에 있는 명령이나 금령(禁令)에 비추어 자신의 결정이 거기에 일치하는지의 여부를 판결하고, 그럴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례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창세기의 대목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166) 바로 이런 뜻에서, 양심은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가장 내밀한 지성소”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양심을 두고 창조주와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고려하지 않은 채, 인간적으로 도저히 의문에 붙일 수 없는 그 실체 안에서 단순히 윤리적 원리만을 본다 해도, 그것은 결국 “하느님의 목소리”입니다. 양심은 그 근거와 정당화의 바탕을 항상 거기서만 발견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언급하고 있는 진리의 영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이루어지는 “죄를 들어 밝히는 일”은, 인간에게 양심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됩니다. 양심이 바르게 섰을 때, 그것은 “진리를 따라서, 개인생활과 사회생활에서 야기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렇게 될 때, “개인이나 집단이 맹목적 방종에서 더욱 멀어지고 객관적 윤리 기준에 더욱 부합되도록 노력할 것이다.”167) 올바른 양심의 첫 번째 결과는, 예를 들어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사목헌장이 한 것처럼, 선과 악을 정확히 식별해 내는 일입니다. “온갖 종류의 살인, 집단 학살, 낙태, 안락사, 고의적인 자살과 같이 생명 자체를 거역하는 모든 행위와, 지체의 상해, 육체와 정신의 고문, 심리적 탄압과 같이 인간의 완전성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와, 인간 이하의 생활 조건, 불법 감금, 유형, 노예화, 매춘, 부녀자와 연소자의 인신매매, 또는 노동자들이 자유와 책임을 가진 인간으로 취급되지 못하고 단순한 수익의 도구로 취급되는 노동의 악조건과 같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모든 행위” 등, 헌장은 우리 시대에 너무나 자주 또 너무나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죄들을 지적한 다음, 한마디 덧붙입니다. “이 모든 행위와 또 그에 준하는 다른 모든 행동들은 실로 파렴치한 것이다. 그것들은 인간 문명을 손상시키는 행위들이며, 불의를 당하는 사람보다 불의를 자행하는 사람들을 더럽히는 행위로서 창조주께 대한 극도의 모욕이다.”168) 공의회는 인간을 추악하게 만드는 죄들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또 그들이 인류의 진보라는 대차대조표에서 차변에 기록되어야 할 것임을 보여줌으로써, “선과 악, 빛과 어두움이 벌이고 있는 하나의 철저한 투쟁” 중 한 단계라고 규정합니다. 이 투쟁이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인간 생활 전체”를 특징짓는다는 것입니다.169) 화해와 참회라는 주제를 가지고 모였던 1983년의 세계주교대의원회의는 인간의 죄가 지니는 개인 및 사회적 의미를 더욱 상세히 다루었습니다.170)

    44. 예수님께서 파스카 전날과 파스카 당일 저녁에 다락방에서, 인류의 역사 속에 죄는 계속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언해 주시도록 성령께 간구하셨습니다. 하지만, 죄는 구속의 구원 능력 ]밑에 복속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죄를 들어 밝히는 일”은, 단순히 그 죄를 지적해 내고 그 정확한 본질 그대로를 파악하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의 죄를 들어 밝히는 일에서, 진리의 영께서는 인간 양심의 소리를 만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인간의 마음에 깃들인 죄의 뿌리를 밝혀 보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목헌장은 이를 이런 말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실상 현대 세계를 어지럽히는 불균형은 인간의 마음속에 뿌리박힌 한층 근본적인 불균형에 직결되어 있다. 과연 인간의 내부에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 인간은 한편으로 피조물로서의 여러 가지 제한성을 체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제 욕망에서 제한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더욱 고차적인 생명으로 불리었음을 느낀다. 인간은 또 여러 가지 유혹 사이에서 항상 취사선택을 강요당한다. 더 더욱 불행한 사실은, 인간이 본래 약하고 또 죄인이기 때문에, 흔히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은 행하고 원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171)공의회는 여기서 바오로 사도의 유명한 말을 상기하고 있는 것입니다.172)
    인간의 양심이 자신을 깊이 돌아볼 때마다 이루어지는 “죄를 들어 밝히는 일”은, 죄의 뿌리가 인간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하며, 또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 양심 자체가 어떤 식으로 제한을 받거나 피어날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이미 언급된 바 있는 죄의 원초적 실재를 재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인간이 창조된 존재이며, 따라서 그는 존재론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창조주께 온전히 의존해 있는 처지임을 지적해 주심으로써, 시작의 신비와의 관계에서 “죄를 들어 밝혀주십니다.” 그분께서는 또한 인간 본성이 대를 잇는 죄의 상태에 처해 있음을 상기시키십니다. 그러나 성령-파라클리토께서 “죄를 들어 밝히실” 때에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관련을 지어서만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이런 관계를 통해서 죄에 대한 “운명론적 태도”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세계 인류의 역사는 암흑의 세력에 대항하는 인간의 악전고투로 엮어져 있으며, 이 투쟁은 태초부터 시작되어, 주님의 말씀대로 마지막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공의회는 이렇게도 말하고 있습니다.173) “그러나 인간을 구원하시고 인간에게 힘을 주시려고 주님께서 친히 오셨다.”174) 인간은 죄인으로서의 처지라고 하는 덫에 걸려들지 말고, 자기 양심의 소리에 의지하여 “선에 충실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자신의 비상한 노력 없이 인간은 내적 일치를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175) 공의회가 인간의 개인생활이나 사회생활을 짓누르는 분열의 책임을 죄에서 찾은 점은 옳게 본 것입니다. 그러나 공의회는 동시에 승리의 가능성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45. “세상의 죄를 들어 밝히시는” 진리의 영은, 공의회 문서가 대단히 잘 묘사하고 있는 인간 양심의 노력과 바로 만나게 됩니다. 양심의 이런 노력은 인간을 회개의 길로 인도합니다. 인간의 마음에 진리와 사랑을 재건하기 위해 죄에 대해서는 등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 안에 악을 인정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압니다. 우리는 양심이 명령이나 금령을 내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내적 명령이나 금령의 인도를 받아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양심은 또한 가책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저지른 악 때문에 내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 고통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서가 의인법적으로 표현하여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것을 후회한다.”고 하신 말씀으로 나타낸 그 후회에 대한 먼 반향이 아닐까요? 성삼(聖三)의 “마음” 안에 새겨져 있으면서 십자가의 아픔으로, 또 영원한 사랑 때문에 보이셨던 그리스도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순종으로 나타나는 그 버려짐, 또는 고통의 먼 반향이 아닐까요? 진리의 영께서 인간 양심이 이 아픔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시면, 양심의 고통은 대단히 깊은 곳까지 사무치게 되지만, 그것은 동시에 대단히 큰 구원의 효과를 내는 것입니다. 완전한 통회(상등 통회) 행위를 통해서 마음의 진정한 회개는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에서 말하는 “회개”(Metanoia)입니다.
    이 회개는 인간 마음의 노력, 양심의 노력으로 실현되는 것인데, 이런 노력들은 버려짐이 바뀌어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구원적 사랑으로 변해 가는 과정의 한 반영(反影)입니다. 이런 구원적 힘을 만들어내시는 분은 보이지 않는 성령이십니다. 교회가 “양심의 빛”이라고 부르는 그분께서는 인간 “마음의 가장 내밀한 곳”까지를 뚫고 들어가 그곳을 채워주시는 것입니다.176) 인간은 성령 안에서의 그런 회개를 통해, 자신을 열고 용서와 죄의 사함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께서는 “심연은 심연을 부른다.”177)는 시편의 말씀을 설명하시면서 인간의 신비에 관해 쓰신 적이 있는데, 회개와 용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 모든 경이로운 움직임은 그 성인의 말씀이 지닌 진리를 확인시켜 준다고 하겠습니다. 아들과 성령의 파견은 바로 인간의 이 “심연 같은 깊이”, 인간의 양심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파스카 신비 안에서의 예수님의 “떠남”에 힘입어서만 “오십니다.” 회개와 용서가 구체적으로 실현될 때마다 성령께서는 십자가의 희생에 힘입어 인간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과연 그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는 죽음의 행실로부터 우리의 양심을 깨끗이 하고 우리가 살아계신 하느님을 섬길 수 있게 해주십니다.”178) 이렇게 해서, 다락방에서 “다른 파라클리토”라고 하는 말로 소개된 성령에 관한 말씀들은 계속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들은 사도들에게 주어졌으며, 간접적으로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사시며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179)

    6. 성령을 거스르는 죄

    46. 지금까지 우리가 말한 바에 비추어볼 때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다른 인상적이고 매력적인 말씀들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들을 “용서할 수 없는 죄”에 관한 말씀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공관복음서들에는 이 문제가 “성령을 모독하는 죄”라는 특수한 명칭으로 불려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선 세 복음서에서 이 죄가 어떻게 서술되고 있는지를 살펴봅시다.

    마태오:“사람들이 어떤 죄를 짓거나 모독하는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다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거슬러 모독한 죄만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또 사람의 아들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있어도 성령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은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180)
    마르코:“사람들이 어떤 죄를 짓든 입으로 어떤 욕설을 하든 그것은 다 용서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며, 그 죄는 영원히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181)
    루가:“사람의 아들을 거역하여 말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을 수 있어도,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지 못한다.”182)

    왜 성령께 범한 모독죄는 용서받지 못하는 것이겠습니까? 이때의 모독죄는 어떤 뜻으로 알아들어야 하겠습니까? 토마스 데 아퀴노에 의하면, 여기서 문제되고 있는 죄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그 죄의 본질상 죄의 용서에 필요한 요건들을 제외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183)
   이 해석에 따르면,
문제의 “모독죄”는 엄밀히 말해 성령을 거스르는 말을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희생에 힘입어 행동하시는 성령을 통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제공하시는 구원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를 드러내는 일”은 성령으로부터 나오고, 또 구원적 특성을 지니는데, 사람이 그것을 거부하면 그는 동시에 파라클리토의 “오심”도 거부하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오심”이야말로 “죽음의 업적으로부터 양심을 깨끗이 하는” 피, 그리스도의 피가 지닌 구속적 능력과 일치하여 파스카 신비 안에서만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그런 씻음(깨끗이 하는 일)의 결과가 죄의 용서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과 피를 거부하는 사람은 “죽음의 업적”, 죄 안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거스른 모독죄란, 성령께서 인간 안에서 용서를 베푸시고 양심 안에서 참된 회개를 이루어주실 때,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고 근본적으로 거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거슬러 진 죄가 현세에서나 내세에서 용서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이 “용서 불가능성”이 그 원인으로서 “참회 거부”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 회개하기를 근본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것은 구속의 원천으로 전향하기를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속의 원천 그 자체로서는 구원경륜 속에 “항상” 열려있고 성령의 사명은 그 경륜 안에서 실현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이 원천으로부터 길어 올릴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지니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분께서는 내게서 받으실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성취해 놓으신 구속의 열매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심으로써 인간의 영혼 속에서 그 구속 사업을 마저 완성하십니다. 그런데 성령을 거스르는 모독죄를 짓는 사람은 악 속에 계속 머물러 살 “권리”를 주장하고 - 어떤 죄든지 상관없이 - 그럼으로써 구속을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은 계속 죄에 갇혀있으면서, 회개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자기 삶에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지도 않는 죄의 용서를 또한 불가능하게 하고 맙니다. 우리는 여기서 영적 파멸의 상황을 봅니다. 성령을 거스른 모독죄는 인간을 그 스스로 유폐되어 있는 감옥으로부터 나오지 못하게 하고, 양심을 씻고 죄의 용서를 주는 그 원천에 자신을 개방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47. 구원을 위해 “죄를 들어 밝혀주는” 진리의 영이 전개하시는 활동은 그런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에게서 어떤 내적 저항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것은 양심이 거의 침투해 들어갈 수 없게 굳어져 버린 상태, 자유 선택에 의해 영혼이 굳어진 상태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성서가 “마음의 굳어짐”184)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 와서 이런 정신 및 마음의 상태는 교황권고,「화해와 참회」에서도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취급한 바 있는 죄에 대한 감각의 상실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185) 교황 비오 12세께서도 이미 “금세기의 대표적인 죄는 죄에 대한 감각의 상실에 있다.”고 갈파하신 바 있습니다.186) 이런 현상은 “하느님께 대한 감각의 상실”과 한 짝을 이룹니다. 위에서 언급한 교황권고에서 우리는 이런 말을 발견합니다. “실상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기원이자 최종 목적이며, 인간은 자기 안에 신적 씨앗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신비를 계시하고 밝혀주는 것은 하느님의 실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란 우선적으로 하느님을 거슬러 저질러지는 잘못이라는, 본래적 의미의 죄에 대한 감각이 정립되지 못한 채, 인간과 인간적 가치를 거슬러 행해지는 잘못이라는 정도의 죄에 대한 감각이 사람들 사이에 뿌리내리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187)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인간 양심의 정직성이 손상되지 않고, 선악의 판별을 위한 그 건전한 감식력이 쇠진하지 않도록 해주시라고 하느님께 끊임없이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정직성과 감식력은 진리의 영께서 하시는 활동과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가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성령을 끄지 마시오.” “성령을 슬프게 해드리지 마시오.”188) 그러나 교회는 특히, 복음성서가 “성령을 거스른 모독죄”라고 부르는 죄가 세상 안에 증가하지 않도록 열심히 기도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영혼들 안에서  따라서 여러 형태의 사회나 환경 속에서도 그것이 감소되고, 성령의 구원 활동에 필요불가결한 양심의 개방이 더욱 활발히 이루어지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령을 거스르는 위험한 죄악이 사라지고, 그 대신 파라클리토로서의 그분을 받아들일 수 있는 거룩한 마음가짐이 자리잡게 되기를, 그렇게 함으로써 “죄와 정의와 심판에 관한 세상의 죄책성을 드러내 보이시러” 오시는 그분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48.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별사에서 죄와 정의와 심판이라고 하는, 성령께서 지니는 사명의 내용이기도 한, “들어 밝힘”의 세 가지 분야들을 서로 연결시키셨습니다. 이 세 가지는 인간 역사 안에서 죄와 악의 신비에 반대되는 충실성의 신비189)가 차지하는 위치를 가리켜줍니다. 성 아우구스티노께서 말씀하신 대로, 한편에는 “하느님을 멸시하기까지에 이르는 자기 사랑”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자기를 멸시하기까지에 이르는 하느님 사랑”이 있습니다.190) 교회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자기의 사명을 다함으로써, 양심의 역사와 사회의 역사가 대인간가족(大人間家族) 안에서, “하느님을 멸시하기에 이를” 정도로 그분의 계명을 거부하고 결과적으로 그것이 죄의 방향으로 하강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인류 사회의 역사가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사랑이 계시되는 사랑을 향해 상승하게 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에 의해 “죄가 밝히 드러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정의와 사랑”을 두고도 그분의 역할을 똑같이 받아들입니다. 사람들과 사람의 양심을 도와 죄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진리의 영은, 그 사실 자체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인간 역사 안에 들어오게 된 정의의 진리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성령의 도움으로 회개하는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심판”의 고뇌, “이 세상의 우두머리”191)가 이미 받은 그 “심판”의 사슬로부터 벗어난 것입니다. 그 신적 및 인간적 신비의 깊이를 그대로 고려한 회개란 인간을 악의 신비와 묶어두던 일체의 끈을 끊고 거기로부터 벗어나는 일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는 이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심판”의 고뇌로부터 벗어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정의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정의가 있는 것은 그분이 성삼께서 지니시는 성성(聖性)의 반영으로서 아버지로부터 그것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192) 이것이 복음서에서 말하는 정의이고, 구속 신비가 의미하는 정의이며, 산상 설교와 십자가가 내포하는 정의입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야말로 어린양의 피를 통해 양심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세워주시는 정의이며 진리와 사랑 안에서 그분과 일치해 있는 모든 사람에게 세워주시는 정의입니다.
    “세상의 죄를 들어 밝히시는” 성령, 아버지와 아들의 영은 이런 정의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고, 영원한 생명의 영으로서 인간 안에 현존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159) 요한 3,8 참조.

160)) 요한 20,22-23.

161) 성령 송가, ‘오소서 성령님’ 참조.

162) 성 보나벤투라,
De Septem Donis Spiritus Sancti, Collatio II, 3: Ad Claras Aquas, V, 463.
163) 마르 1,15.

164) 히브 9,14 참조.

165) 사목헌장, 16항 참조.

166) 창세 2,9.17 참조.

167) 사목헌장, 16항.

168) 사목헌장, 27항.

169) 사목헌장, 13항 참조.

170) 「화해와 참회」, 16항 참조.

171) 사목헌장, 10항.

172) 로마 7,14-15.19 참조.

173) 사목헌장, 37항.

174) 사목헌장, 13항.

175) 사목헌장, 37항.

176) 성령 송가 참조:
“마음속 채우소서.”
177) 성 아우구스티노,
Enarr. in Ps. XLI,13: CCL, 38,470; “심연이 부르는 이 심연은 무엇인가? 심연이란 깊은 곳을 뜻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마음이 심연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이 심연보다 더 깊은 것이 또 무엇이겠는가? 사람들은 말을 할 수 있고, 그들이 자기 지체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누구의 생각은 꿰뚫어 볼 수 있으며 누구의 마음을 헤아려볼 수 있겠는가?”
178) 히브 9,14 참조.

179) 요한 14,17.

180) 마태 12,31-32.

181) 마르 3,28-29.

182) 루가 12,10.

183) 성 토마스 데 아퀴노,「신학대전」,
IIa-IIae, q.14, a.3; 성 아우구스티노, Epist. 185,11,48-49: PL 33,814-815 참조; 성 보나벤투라, Comment, in Evang. S. Lucae. 제11장, 15-16: Ad Claras Aquas, VII, 314-315면.
184) 시편 81[80],13;
예레 7,24; 마르 3,5 참조.
185) 「화해와 참회」, 18항.

186) 비오 12세,
교리 교수에 관해서 보스톤에서 열린 미국 전국 대회에 보낸 라디오 담화(1946.10.26.), Discorsi e Radiomessaggi, VII(1946), 228.
187) 「화해와 참회」,
18항.
188) 1데살 5,19; 에페 4,30.

189) 「화해와 참회」, 14-22항.

190) 성 아우구스티노, 「신국론」, XIV, 28: CCL 48,451.

191) 요한 16,11 참조.

192) 요한 16,15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