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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하는 인간 -5- 역사의 현단계에서

김대철대철베드로 2004. 7. 18. 09:42


III. 역사의 현단계에서 본 노동과 자본의 투쟁

투쟁의 차원

    11. 위에서 살펴본 노동의 기본 문제들에 대한 개관은 성서 첫 대목에서 착상을 얻은 것으로, 어떻게 보면 이는 다양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전세기를 내려오며 변하지 않았던 교회 가르침의 근본 구조를 이루고 있다. [새로운 사태] 반포를 전후로 하여 얻은 체험은, 그 가르침에 특별한 의미와 실질적인 영향력을 부여하는 배경을 형성한다. 요컨대, 노동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세상을 인간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에 근본적인 영향을 끼치는 막중한 실재로 인식된다. 노동은 바로 노동의 주체인 인간과 인간의 이성적 행위에 밀접히 연결된 실재이다. 일반적으로, 노동이라는 이 실재는 인간의 생활을 풍부하게 하고 그 가치와 의미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노고와 노력이 따른다 해도 노동은 역시 좋은 것이며, 그래서 인간은 노동을 사랑함으로써 진보하는 것이다. 이렇게 철저하게 긍정적이고 창조적이며, 교육적이고 가치 있는 인간 노동의 특성은 오늘날 인권의 영역에 관한 판단과 결정에 있어서도 그 기조를 이루어야 한다. 또한 노동이 지닌 이러한 특성은 노동에 관한 국제적인 선언들과 여러 나라의 입법부에서 제정한 노동법 안에 그리고 노동 문제에 관한 사회적, 사회 과학적인 활동에 전념하는 기구들이 마련한 ‘노동 규약’들 안에 명백히 나타난다. 국제적인 차원에서 이러한 일을 강화시켜 나가는 기구가 국제 노동 기구(ILO)이며, 이 기구는 국제 연합(UN)에서도 아주 오래된 특별 기구 가운데 하나이다.
    적어도 노동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 가운데 주요한 요소들을 염두에 두고서, 본인은 비교적 자세하게 이 중대한 문제들을 다루고자 한다. 그러나 본인은, [새로운 사태」의 반포로써 상징적인 시대 구분이 지어진, 최근에 형성된 교회 가르침의 주요 문제들을 무엇보다도 먼저 취급해야 한다.
    아직 다 지나가지 않은,
이 시대 전체에 걸쳐 노동 문제는 산업 발달의 시대에, 산업 발전과 더불어 부각된 자본과 노동 사이의 커다란 투쟁의 바탕이 되어왔다. 자본과 노동 사이의 투쟁이란, 소수이지만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 기업주나 생산 수단을 지닌 사람들의 집단과, 생산 수단을 갖지 못해 단지 노동으로만 생산 과정에 참여하는 대다수 사람들 사이의 투쟁을 말한다. 이 투쟁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힘을 기업주들의 자의에 맡긴 반면, 기업주들은 최대 이윤 추구의 원리에 따라 고용인들의 노동에 대해 가능한 한 최저 임금을 책정하려고 하는 사실에서 연유한다. 게다가 여기에는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건강과 생활 조건에 대한 보장의 결여 그리고 노동 안전 시설의 부족에서 기인하는 다른 착취 요소들도 있다.
    사회 경제적 계급 투쟁으로 해석되는 이러한 투쟁은
자본주의라는 이념으로 이해되는 자유주의 그리고 노동 계급과 전세계적 무산자들의 대변자로 행세한다고 공언하는 이론적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 이해되는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이념적 투쟁으로 드러났다. 그래서 노동과 자본 사이의 실제적인 투쟁은 하나의 조직적인 계급 투쟁으로 바뀌어 이념상의 수단뿐 아니라 주로 정치적인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투쟁의 역사와 양측의 주장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철학에 근거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계급 투쟁이야말로 사회의 계급적 불의를 제거하고 계급 자체를 없애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실천에 옮기는 것은, 생산 수단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집단적인 차원으로 옮겨놓음으로써 인간의 노동을 착취로부터 보전할 수 있게 한다는 생산 수단의 집단화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것이 투쟁 목표이며 이 투쟁은 이념 수단만이
아니라 정치 수단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무산자의 지배라는 원칙에 따라 마르크스주의 이념을 따르는 정당으로서의 집단은 혁명 세력을 포함한 여러 가지 영향력을 행사하여 생산 수단의 사유를 배제하고 집단 체제를 도입하기 위하여 모든 사회의 권력 독점을 추구하고 있다. 이처럼 광범위한 국제 운동의 주요 지도자들이나 이념가들에 의하면, 이러한 행동 강령의 목표는 사회 혁명을 성취시키고 사회주의를 도입하여 결국은 전세계를 공산주의 체제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현대의 사회,
경제, 정치, 국제 생활의 전반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는 대단히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세세한 부분까지 다룰 수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이에 대한 방대한 문헌들과 체험을 통해서 그러한 문제들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엽적인 문제들보다는 차라리 이 회칙의 주제인 인간의 노동에 대한 근본 문제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사실 인간에게 이처럼 중대한 문제, 즉 인간의 지상 생활과 그 소명에 대한 근본적인 차원을 이루고 있는 이 문제는 현대의 전체적인 상황을 충분히 고려할 때에 비로소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노동의 우위성

    12. 오늘날의 상황 구조는 인간에 의해 야기된 수많은 투쟁들이 현저하며 인간의 노동이 만들어낸 기술 수단은 이 같은 구조 안에서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는 또한 여기서 거의 상상할 수도 없는 파괴 능력을 지닌 핵전쟁으로 인한 전세계적 파멸의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볼 때, 우리는 우선 교회가 항상 가르쳐왔던 원칙, 즉 노동이 자본보다 우위에 있다는 원칙을 무엇보다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이 원칙은 생산 과정에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것이다. 생산 과정에서 노동은 항상 주요 동인(Efficient Cause)이 되지만, 생산 수단의 집적인 자본은 다만 하나의 도구 또는 도구인이 될 뿐이다. 이 원칙은 인간의 역사적 체험의 총체에서 얻은 명백한 진리이다.
    인간은 땅을 지배해야 한다는 성서의 첫 장을 읽을 때,
우리는 이 말씀이 가시적인 세상에 내재해 있고, 인간의 임의에 맡겨진 모든 자원에 관한 언급이라는 것을 안다. 어쨌든 이 자원들은 오직 노동을 통해서만 인간에게 기여할 수 있다. 또한 소유권 문제는 맨 처음부터 노동과 연관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 자연 속에 감추어져 있는 자원을 자기 자신과 남을 위해 이용하도록 하는 유일한 수단이 바로 노동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노동을 통하여 이 자원들이 어떤 결실을 맺게 하기 위해서, 인간은 지하, 해양, 지상, 우주 등 자연의 다양한 부 가운데 작은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인간은 이 모든 것을 자기의 일터로 끌어들여 차지한다.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노동을 위하여 자연의 부를 소유하는 것이다.
    동일한 원칙은 이러한 과정의 후속 단계에도 적용되는데,
그 첫단계는 인간이 자연의 자원 및 부와 항상 관련을 맺게 한다. 이 부들을 발견하고 인간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방법들을 연구할 목적으로 지식을 얻으려 하는 이 모든 노력이 가르쳐주는 바는, 그것이 노동이거나 생산 수단의 총체 또는 (노동에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생산 수단에 관련된 기술이거나 간에 경제적인 생산 과정 전체를 통해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이 세상의 부와 자원을 전제로 하는데, 이 부와 자원은 인간이 발굴해 내는 것이지 창조해 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생산 과정에서 올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이미 인간을 위해 준비된 부와 자원을 발굴하는 것이다. 인간은 노동의 모든 발전 단계에서 자연에 의해, 달리 말해서 궁극적으로 볼 때 창조주에 의해 마련된 선물의 주역이라는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 인간의 노동에는 처음부터 창조의 신비가 작용한다. 이 확언은 이미 서두에서 말한 것이고, 이 회칙 전반을 이끌어가는 근간이며, 마지막 부분에 가서 더욱더 자세하게 다루기로 하겠다.
    이 문제에 대해 고찰하면 할수록, 우리가 마침내 익숙하게 지칭하게 된 자본에 대한 인간 노동의 우위성을 우리는 더욱 확신하게 된다. 자본의 개념은 인간이 자의로 쓸 수 있는 자연 자원만이 아니라 인간이 이를 자기의 필요에 따라 변형시키는(어떤 의미에서는 자원을 인간화시키는) 수단의 총체도 역시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이 모든 수단들은 인간의 노동이 이룬 역사적 유산의 결과라는 점이 즉각 드러나게 된다. 원시적인 단계에서부터 초현대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산 수단을 점진적으로 발전시켜 온 것은 바로 인간이고, 인간의 경험과 지성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아주 간단한 농기구뿐만 아니라 과학 기술의 진보를 통하여 기계, 공장, 실험소, 컴퓨터같은 더욱더 현대적이고 복잡한 기구들이 생겨났다. 그래서 노동에 기여하는 모든 것, 즉 현 기술 수준에서 최고도로 완벽한 ‘도구’를 이루는 모든 것은 노동의 결과이다.
    이런 거대하고 강력한 도구 - 어떤 면에서는 ‘자본’과 동의어로 여겨지는 생산 수단의 총체 - 는 노동의 결과이며 인간 노동의 표징을 지니고 있다. 현재와 같은 기술 발전의 시대에 노동의 주체인 인간은 생산 수단인 현대적인 도구들을 모아 이용하고자 할 때, 이러한 도구들을 발명하고 계획하고 만들고 또 완전케 하고 또 계속 사용할 사람들이 이룬 노동의 결과를 잘 알고서 이용해야 한다. 노동 능력, 즉 현대의 생산 과정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은 더욱더 치밀한 준비와 무엇보다도 적절한 훈련을 요구한다. 그러나 생산 과정에 참여하는 모든 인간은, 그가 비록 어떤 특별한 훈련이나 자질이 필요치 않은 노동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생산 과정에 있어서 진정하고도 유효한 주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것은 모든 도구가 아무리 완전하다 해도 그것은 단지 인간의 노동에 종속되는 도구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이 진리는, 교회의 가르침이 남긴 유산의 일부로서, 노동 제도에 관한 문제와 전반적인 사회 경제 체제와 관련해서 항상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강조하고 역설해야 할 점은 생산 과정에 있어서의 인간의 우위, 즉 사물에 대한 인간의 우위성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자본이라는 개념에 속하는 모든 것은 다만 사물의 집적일 뿐이다. 인간은 노동의 주체로서 그가 하는 노동에서 독립하여, 인간 홀로 인격체이다. 이 진리는 중대하고도 결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경제주의와 물질주의

    13. 위에서 말한 이 진리에 비추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본이 노동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게 된다. 결코 노동이 자본에 대립되거나 자본이 노동에 대립되는 것일 수 없으며,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더구나 이러한 개념의 이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서로 대립될 수는 없다. 노동 문제의 본질과 부합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내적으로 참되고 윤리적으로 정당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올바른 노동 제도라고 할 수 있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즉, 위에 개진된 원리에 상응하려는 노력을 통해 근본적으로 노동과 자본 사이의 대립을 극복할 때이다. 이때의 원리는 노동의 본질적이고 실제적인 우위성, 인간의 노동에 대한 주체성, 노동자가 하는 노동의 성격에 관계없이 전 생산 과정에 있어서 효과적인 참여의 원리이다.
    노동과 자본 사이의 대립은 생산 과정의 구조나 경제 과정의 구조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경제 과정은 노동과 우리가 항용 자본이라 부르는 것이 서로 얽혀 있어서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드러낸다. 어떤 일터에서 일하든지, 그 일이 비교적 원시적이든 초현대적이든 가리지 않고, 인간은 자신의 노동을 통해 두 가지 유산과 관계를 맺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 유산이란 자연 자원을 통해 온 인류에게 주어진 것이고, 또 주로 기술의 발달, 즉 노동을 위해 더욱 완벽한 온갖 도구를 생산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그 자원을 토대로 이미 발전시켜 놓은 유산이다. 인간은 또한 노동으로 “다른 사람들의 노동에 참여하게 된다.”21) 우리의 지성에 의해,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인도되는 신앙에 의해 우리는 별 어려움 없이 인간 노동의 국면과 과정에 대한 이러한 이미지를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것은 변치 않는 관념이며, 인본주의적이고 동시에 신학적인 것이다. 이 관념에 따라 인간은 볼 수 있는 세상에서 그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만물의 주인이다. 만일 노동 과정에서 어떤 종속성이 있다면 그것은 창조된 모든 자원을 ‘주시는 분’에 대한 종속이고, 우리 자신의 노동에 있어서 완전해지고 증가된 가능성을 그 노동과 창의력으로 안겨준 인류에 대한 종속이다. 우리는 생산 과정에서의 모든 것, 즉 ‘사물’과 도구 그리고 자본의 총체가 인간의 노동에 영향을 끼친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총체가 마치 비인격적인 ‘주체’이기나 하듯이 인간과 인간의 노동을 종속적인 위치에 놓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물에 대한 인간의 우위성을 엄격히
유지시켜 주는 이 변치 않는 관념은 실생활에 있어서 오랜 잠복기를 거친 다음에 인간의 사상 속에서 파괴되었다. 이러한 파괴는 노동이 자본에서 분리되어 반대의 입장에 서고 또 자본이 노동과 상치되어 일어났다. 마치 두 개의 비인격적인 힘이기나 하듯이, 동일한 ‘경제적’ 전망 안에 있는 두 생산 요인이 대립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문제 진술에는 근본적인 오류가 내포되어 있는데, 인간의 노동을 단지 그 경제적인 목적에 따라서만 고려하는 경제주의의 오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의 근본적인 오류는 경제주의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물질의 우위성과 우선권에 대한 확신을 내포하고 또 인간의 행위와 도덕적 가치 등과 같은 영적이고 인격적인 것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물질에 예속시킨다는 점에서 물질주의의 오류라고 불릴 수 있고 또 그렇게 불려야 한다. 이는 완벽한 의미에서의 분명한 이론적 물질주의는 아니지만, 실천적 물질주의이다. 실천적 물질주의는 유물론자의 이론에서 나오는 전제 때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사물에 가치를 부여하는 특별한 방법, 즉 물질적인 것에 대한 즉각적이고 커다란 매력에 근거한 재화의 어떤 서열에 따라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경제주의의 범주에 드는 사고의 오류는 물질주의 철학의 발생과 병행하였는데, 물질주의 철학은 가장 기초적이고 통속적인 단계(정신적 실재를 피상적 현상으로 격하시키려 하기 때문에 통속적 유물론이라고도 불린다)로부터 변증법적 유물론이라 불리는 단계까지 발전되었다. 어쨌든 현재의 이 고찰로 볼 때 경제주의는 인간의 노동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녔던 것 같다. 특히 노동과 자본을 분리시켜 위에서 말한 경제주의적인 관점에서 두 가지 생산 요인으로 서로 대립되도록 했고, 물질주의 철학 체계보다 먼저 이 문제를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진술하는 데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백한 것은 변증법적 형태를 포함한 유물론이 인간의 노동에 관한 사고를 위해 충분하고도 결정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유물론은 자본 도구에 대한 인간의 우위와 사물에 대한 인격의 우위를 적절하고도 거부할 수 없는 것으로 확증하고 지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에서도 인간은 무엇보다도 노동의 주체가 아니며, 생산 과정의 동인도 아니고, 다만 물질적인 것에 예속되어, 주어진 기간에 목적을 달성하는 경제적이고 생산적인 관계에서 '결과'를 내는 어떤 것으로 이해되고 취급될 뿐이다.
    확실히 여기서 본 노동과 자본의 모순 - 어떤 의미로는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노동이 마치 경제 과정 속에서의 여타의 요소들처럼 단지 하나의 요소이기나 하듯이 자본과 분리되어 반대 입장에 서게 되는 모순 - 은 단지 18세기의 철학이나 경제 이론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시대의 경제 사회적 실상의 총체에서 발생했다. 그 시대는 산업화가 시작되어 급격한 발전을 이루면서 다만 물질적 부와 수단의 증대 가능성에만 주력하고, 산업화의 목적인 인간, 즉 그 수단의 혜택을 받아야 할 인간을 도외시한 때였다.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의 노동과 노동하는 인간에게 타격을 주고, 이미 위에서 말한 대로 윤리적으로 당연한 사회적 반응을 야기시킨 것은 이러한 실제적인 오류였다. 만일 사람들이 똑같은 이론과 실제를 전제로 사고한다면, 초기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에 관련되었고 이제는 역사의 일부가 되어버린 동일한 오류가 시대와 장소만을 달리한 환경에서 되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오류를 근절시킬 수 있다고 여겨지는 단 하나의 기회는 이론과 실제에 있어서의 적합한 변화, 즉 사물에 대한 인격의 우선권 그리고 생산 수단의 총체로서의 자본에 대한 인간 노동의 우선권을 철저하게 확신하는 것과 조화를 이루는 변화를 통해서이다.

노동과 소유

    14. 여기서 간단히 진술한 역사적 과정은 확실히 그 초기 단계를 넘어서 있으나, 아직도 일어나고 있으며, 국가와 대륙 간의 관계 속에서 참으로 널리 퍼져나가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다른 관점에서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확실히 우리는 노동과 자본 간의 대립에 대해서 말할 때 단지 어떤 추상 개념이나 또는 경제 생산에서 작용하는 ‘비인격적 힘’으로만 다루는 것이 아니다. 두 개념의 이면에는 실제로 활동하는 사람들,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있다. 즉, 한편에는 생산 수단의 소유자는 아니나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기업주로 행세하며 생산 수단을 소유하거나 소유자들을 대신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소유 또는 재산 문제가 처음부터 이 복잡한 역사 과정 전체에 개입된다. 사회 문제를 주제로 삼고 있는 [새로운 사태] 역시 이 문제를 강조하였다. 사유 재산권이 생산 수단의 문제가 되었을 바로 그때 사유 재산권과 소유권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상기시키고 확인한 것이다. 회칙 [어머니요 스승」도 같은 문제를 강조했다.
    당시에도 교회가 천명했고 지금도 교회가 가르치는 위의 원리는 마르크스주의가 주창하는 전체주의의 강령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레오 13세의 맛새로운 사태맜 반포 후 수십 년 간 여러 나라에 실천되어 왔다. 동시에 이 원리는 자유주의와 자유주의 노선을 따르는 정치 체제가 실행하는 자본주의 강령과도 다르다. 자본주의의 경우, 소유권이나 재산권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차이가 난다. 그리스도교적 전통은 이 권리를 절대적이고 침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는 결코 고집하지 않았다. 반대로, 창조된 모든 재화를 사용하는 것은 모든 이의 공동 권리라는 넓은 의미에서 항상 이해해 왔다. 즉, 사유 재산권은 재화가 만인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에서 공동 사용권에 예속된다.
    더군다나 교회의 가르침에서는,
소유권이 노동에 있어서 사회적 투쟁의 배경을 형성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된 적이 없었다. 위에서 말한 대로, 재산권은 노동에 기여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노동을 통하여 얻어진다. 이는 특별한 방법으로 생산 수단의 소유에 관련된다. 이러한 수단을 개인의 재산으로 고립시켜서 ‘노동’에 대립되는 ‘자본’의 형태로 만들거나 더구나 노동을 착취하려고 한다면 이는 바로 이러한 수단과 그 소유의 본질 자체를 거스르는 것이다. 이 수단은 노동을 거슬러 소유될 수 없고 한갓 소유를 위한 소유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소유 - 그것이 개인 소유이든, 공공 소유이든 아니면 집단 소유이든 간에 - 에 대한 정당한 명분은 오로지 노동에 기여해야 한다는 점이고, 노동에 기여함으로써 이 질서의 첫번째 원리, 즉 재화의 보편적인 목적과 재화의 공동 사용권을 성취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의 노동과 인간을 위한 재화에의 공동 접근에 대해 고려한다면, 어느 누구도 적절한 조건하에서의 어떤 생산 수단의 사회화를 배제할 수는 없다. [새로운 사태]가 반포된 지 수십 년이 지나는 동안에 교회의 가르침은 항상 이 모든 원리들을 상기시켜 왔는데, 이미 오래된 전통에서 형성된 논리, 예컨대 성 토마스 데 아퀴노의 [신학대전]에 나타나는 저 유명한 논리22)에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인간의 노동을 주제로 삼고 있는 이 문서에서는,
노동의 우위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그리고 사회 생활 특히 역동적인 ‘전체 구조’의 주체로서 인간의 품위를 보증하기 위하여, 언제나 분투해 왔고 계속 분투하고 있는 교회 가르침의 모든 노력을 확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극단적’ 자본주의의 입장, 즉 경제 생활에 있어서 생산 수단에 대한 절대적인 사적 소유권을 불가침의 ‘신조’로 주장하는 입장은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다. 노동을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은 사적 소유권이 이론과 실제 양면에서 건설적으로 수정되어야 한다고 요청한다. 생산 수단의 총체인 자본이 동시에 여러 세대에 걸친 노동의 산물이라는 점이 옳다면, 자본은 이 모든 생산 수단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노동을 통해 끊임없이 창조되는 것이며, 이 수단들은 현세대의 노동자들이 매일매일 일하고 있는 하나의 큰 일터로 보일 수도 있다는 것도 또한 옳다. 분명히 우리는 여기서 종류가 서로 다른 노동, 즉 이른바 육체 노동뿐 아니라 사무직과 경영을 포함한 여러 형태의 정신 노동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 비추어볼 때, 가톨릭의 사회적인 가르침에 있어서 전문가들과 교회의 최고 교도권23)에 의해 제기된 많은 제안들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즉, 노동자들이 기업 경영 또는 이윤에 참여하거나 이른바 노동에 의한 주권 소유 등 노동 수단의 공동 소유를 위한 제안들이다. 이 다양한 제안들이 구체적으로 적용될 수 있든 없든, 생산 과정에서 노동과 노동자의 정당한 위치에 대한 인식은 생산 수단에 대한 소유의 권리에 있어서 다양한 적응을 요청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는 지난날의 상황에서뿐 아니라, 이른바 제3세계와 특히 아프리카와 그 외의 지역에서 과거에는 식민지였다가 최근에 독립한 수많은 신생국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금세기 후반의 여러 문제들과 전체적인 상황을 비추어볼 때 더욱 명백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권이라는 관점에서, 즉 광의의 인권과 인간 노동에 관련된 인권이라는 관점에서, 개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고정’ 자본주의의 입장은 계속적으로 수정되어야 하지만, 이 많은 간절한 개혁들은 생산 수단의 사유에 대한 원천적인 제거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이 그 동일한 관점에서 천명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단지 소유자의 손아귀에서 생산 수단(자본)을 빼앗는 일이 만족할 정도로 생산 수단의 사회화를 충분히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생산 수단은 어떤 사회 집단, 즉 사유자의 재산에 그치지 않고 조직된 사회의 재산이 되며, 다른 집단, 즉 소유하지는 않지만 사회에서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전국적 지역적 경제의 차원에서 생산 수단들을 관리하는 사람들의 지배와 직접적인 통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 권력 집단은 노동의 우위성이라는 관점에서 그 임무를 만족스럽게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집단은 스스로 생산 수단의 관리와 임의 사용권을 독점하고 심지어는 기본 인권의 침해까지도 서슴지 않아 자신들의 임무를 그릇되게 처리할 수도 있다. 따라서 전체주의 체제에서의 단순한 생산 수단 국유화는 그 재산의 ‘사회화’와는 전혀 다르다. 오로지 사회의 주체적 특성이 보장될 때, 달리 말해서 각자가 자신의 노동을 근거로 다른 모든 사람과 함께 노동하는 커다란 일터에서 자신도 하나의 소유자라고 온전히 생각할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사회화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할 수 있는 한, 노동을 자본의 소유에 연관시키는 일이며, 가능한 한 경제, 사회, 문화적인 목적을 지닌 광범위한 중간 집단들을 형성시키는 일이다. 이러한 중간 집단들은 공권력에 대해서 진정한 자율성을 누려야 하고, 상호간의 진정한 협력과 공동선의 요구에 따라 그들 고유의 목적을 추구해야 한다. 또한 이 집단들은 각기 집단의 구성원들이 인격체로서 대우받고, 그 집단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도록 고무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명실상부한 살아 있는 공동체들이 되어야 한다.24)

'인격주의' 논거

    15. 그리스도 자본에 대한 ‘노동의 우위 원리’는 사회 도덕 질서의 전제 조건이다. 이는 생산 수단의 사유 원리 위에 이룩된 체제에서뿐 아니라 이런 사유권이 철저하게 제한된 체제에서도 핵심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어떻게 보든 노동은 자본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고 결코 자본과 모순되지 않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단지 경제적인 전제의 결과로서 근세기에 인간의 생활을 억압해 왔던 생산 수단에 대한 분리와 대립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이다. 인간은 모든 생산 수단을 사용해서 노동할 때 이 노동의 결과가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쓰여지기를 바라고, 또한 책임성과 창조성을 나누어가진 자로서 자신이 일하는 일터에서 바로 그 노동 과정에 참여할 수 있기를 원한다.
    여기서부터, 노동의 의무에 상응하는 노동자 고유의 권리들이 발생한다. 노동자들의 권리는 다음에 논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개괄적으로 보아, 노동을 하는 인격체가 자신의 노동에 대해 다만 정당한 보상만을 원할 뿐 아니라, 또한 노동을 하는 중에 그것이 비록 공동 소유라 하더라도 ‘자신을 위해서’ 노동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대비책이 생산 과정 안에 갖추어지기를 바란다는 점이다. 이러한 자아 인식은 지나친 관료적 중앙 집권 체제 안에서는 사라져버린다. 이 체제 안에서 노동자는 자신이 위에서부터 조종되는 거대한 기계 안에 있는 한낱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끼게 되고 또한 여러 가지 이유에서 자신이 주도권을 지닌 노동의 참된 주체라기보다는 하나의 단순한 생산 수단이라고 느끼게 된다. 교회의 가르침은 인간의 노동이 경제뿐만 아니라 특히 인격적인 가치에도 관계가 있다는 강력하고도 깊은 확신을 항상 표명해 왔다. 경제 체제 자체와 생산 과정은 이러한 인격적 가치가 온전히 존중될 때 틀림없이 이익이 된다. 성 토마스 데 아퀴노에 따르면,25) 이것이 바로 생산 수단의 사유권을 옹호하는 주요 이유가 된다. 우리가 비록 사유권의 원리에 따를 수 있는 예외 - 이 시대에도 ‘사회화된 소유권’이라는 체제가 도입되는 것을 본다 - 를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인격주의적인 논거는 원리 면에서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면에서도 여전히 그 효력을 지닌다. 생산 수단에 대한 어떠한 사회화라도 그것이 타당하고 또 좋은 결과를 내려면 이 논리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러한 종류의 체제에서도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해’ 노동을 한다는 자의식을 항상 가질 수 있도록 보장하는 온갖 노력이 경주되어야 한다. 만일 그러한 노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경제 과정 전체에 헤아릴 수 없는 폐해가 불가피하게 생기게 되고, 경제적 손실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에 대한 폐해를 가져오게 된다.

21. 요한 4,38 참조.
22.
재산권에 대하여 [신학대전], II-II, q.66, a.2와 6; De Regimine Principum, 제1권 15.17장; 재산권의 사회적 기능에 관해서는 [신학대전], II-II, q.134, a.1, ad 3 참조.
23. [사십주년], 29항: AAS 23(1931), 199면; 사목 헌장, 68항 참조.

24. [어머니요 스승], 71항: AAS 53(1961), 419면 참조.

25. [신학대전], II-II, q.66, a.2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