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루가는 그의 이야기로써 다락방의 고별사에 나타나는
진리와 대단히 가까운 지점에까지 우리를 인도합니다. 성령 안에서 기쁨에
고양되신 나자렛 예수님께서는 그때의 고별사와 기타의 말씀 속에서, 자신이 영을 “지니는” 분이라고 소개하며,
또 십자가를 통한 당신의 “떠남”을 대가로 지불하고 사도들과 교회에 그분을 “주는” 분으로
제시하십니다.
여기서 “지니다”라는 동사를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계시하다”라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창세기를 비롯하여
구약성서는 하느님의 영을 우선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숨결”로
이해하도록 했습니다. 초자연적인 “생명의 숨결”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사야서에서는 그 영이 메시아라는 분에게 주어지는 하나의 “선물”, 그를 안으로부터
충동함으로써 기름부음받은이의 전체 구원 활동을 인도하기 위해 그에게 오는 어떤 것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르단 강변에서는 이사야의 예언이 하나의 구체적 형태를
취해 나타났습니다. 곧, 나자렛 예수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오시는 분,
당신의 위격에 주어진 선물처럼 그를 지니시는 분, 당신의 이러한
인간성으로 그 선물을 나누어 주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분께서는
성령과 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76)
루가복음서 안에서는 성령에 관한 이 계시가 재확인되고 한층 더 풍부하게 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삶과 활동의 내밀한 원천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하신 고별사의 내용에
비추어, 성령께서는 새롭고 더욱 넓게
계시되었습니다. 그는 한 위격자(메시아라는 분)에게 주어지는 어떤
선물이기만 한 것이 아니고, 그 자신이 하나의 위격인 선물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내림을 “다른 협조자”의 내림으로 선포하시는데, 그분께서는 진리의 영으로서 사도들과 교회를 “온전한 진리”로 인도하실 것이었습니다.77)
이 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성령과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일치되어 상호
소통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나에게서 받은 것을 너희에게 열어
보여주실 것이다.”78)
이 일치는 아버지 안에 그 원천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다 나의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내게 들은 것을 너희에게 알려주시리라고 내가 말했던 것이다.”79) 성령께서는 아버지로부터 나오셨으며 그분에 의해 보냄을 받으셨습니다.80) 성령께서는 무엇보다 먼저, 메시아에 관한 예언들을 성취시키기 위해 사람이 되신 아들에 대한
선물로서 보냄을 받으셨습니다. 요한의 기록에 따르면 그리스도이신 아들의
“떠남”에 바로 뒤이어 성령께서 직접 오시어 - 그것이 성령의 새로운
사명인데 - 아들의 일을 완성하실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구원 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완성하실 분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23. 우리는 지금 파스카 사건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선물이신 하나의 위격으로서의 성령에 관한 계시가 새롭게 또 결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바로 이 순간입니다. 파스카 사건들 -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 그리고 부활 - 은 파라클리토와 진리의 영으로서의 성령께서 새롭게 오시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하나이시며 삼위이신 하느님께서 구속자 그리스도의 행위를 통해 성령 안에서 당신 스스로를 인간에게 주시는 그 증여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순간입니다. 이 새로운 시작은 세상의 구속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셨기”81) 때문입니다. 아들을 “주셨다”라고 하는 그 일 자체를 통해, 무궁무진한 은총의 원천이시며 사랑이신 하느님의 가장 깊은 본성이 표현됩니다. 아들을 주시는 그 선사 행위 안에서 계시가 완성되고 영원한 사랑의 너그러움이 더없이 완벽하게 실현됩니다. 신성(神性)의 헤아릴 길 없는 깊이 안에서 ‘위격자-선물’인 성령께서는 아들의 일, 곧 파스카 신비를 통해 그렇게 되셨거니와, 그 성령이 새로운 방식으로 사람들과 교회에 주어지고 그들을 매개로 하여 전인류와 세상에도 주어졌습니다.
24. 이 신비는 부활날에 결정적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날, 바오로 사도가 기록한 대로,
“인성으로 말하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나자렛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권능을 나타내어 하느님의 아들로 확인되셨습니다.”82)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현양”이 부활로써 그 정점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 그분은 “권능을 충만히 지닌” 하느님의 아들로 자신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이 권능은 성삼의 측량할 수 없는 원천으로부터 분출되는
것인데, 이것은 무엇보다도 다음의 사실로
드러나 보입니다. 곧, 한편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예언자의 입을 빌려 하느님께서 이미 하셨던 약속을 실현하십니다. “내가 너희 안에 새 마음을 넣어주며 새로운 영을 불어넣어
주리라. …… 나의 영을 너희 속에
넣어주리니 …….”83)
다른 한편,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서
사도들에게 하셨던 약속을 실현해 주십니다.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리라.”84)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가 부활하신
분의 모습을 닮도록 하기 위해서 보내주신 분이 바로 진리의 영, 파라클리토이십니다.85)
성서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안식일 다음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다. 그리고 나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예수님께서 다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말씀을 계속하셨다. ‘성령을 받아라.’86)
요한복음의 이 핵심적인 대목이 지니는 의미를 세부적으로까지 이해하려면,
파스카 사건들의 서두에 같은 다락방에서 들려주셨던 말씀들과 대조하여 이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바야흐로 지금부터 이 사건들이 -
아버지께서 축성하시어 세상에 보내신 예수님의 성삼일(聖三日) - 완성의 단계에 도달한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과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 십자가 위에서 “숨(영)을
내놓으신” 그리스도87)께서는
부활하신 다음에 사도들에게로 가시어 로마서에서 언급하고 있는88)
그런 권능을 가지고 “그들 위에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오셨을 때 거기 있던 사람들은 기쁨에 싸였습니다.
“그들의 슬픔은 기쁨으로 바뀌리라.”89)고
하시며 수난 전에 그분 자신께서 약속하신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별사에서 선언한 중요한 내용이 실현됩니다.
다름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시는 분으로서의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성령을
“모셔다 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그분을 모셔온 것은 그분 자신의 “떠남”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 성령을 주실 수 있었던 것은 말하자면 당신 십자가 수난의 상처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 그분께서
“성령을 받아라.” 하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은 당신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아들을 보내는 일과 성령을 보내는 일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원죄 이후에는
성령을 보내는 일이 십자가와 부활 없이는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파라클리토께서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90) 성령의 파견과 구속 안에서의 성자의 파견 사이에도 역시 긴밀한
관계가 성립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아들의
파견은 구속에서 그 완성점에 도달합니다. 성령의 파견은 구속으로부터 흘러 나옵니다.
“그분께서는 내게서 받은 것을 너희에게 열어 보여줄 것이다.”91) 구속은 기름부음받은이로서의 아들에 의해 성취되었습니다. 이 아들은
성령의 권능으로 세상에 오시고 활동하셨으며, 마침내는 십자가 나무 위에서 자신을 최상의 희생물로 바치셨습니다.
그런데 이 구속은 “다른 파라클리토”이신 성령에 의해 사람들의 마음과 양심 속에서 - 세상의
역사 안에서 - 계속적으로 성취되고 있습니다.
25. “성자께서 성부께로부터 지상사명으로 위탁받으신 일(요한 17,4)을 마치신 다음,
오순절날 성령께서 파견되어 오시었다. 그리하여 성령께서 언제나 교회를 거룩하게 하심으로써 그리스도 신자들이 한 성령 안에서 성부께로 가까이 가게 되는 것이다(에페
2,18). 성령께서는 생명의 영이시며,
영원한 생명을 위해 솟아 오르는 샘이시다(요한 4,14; 7,38-39).
성령을 통하여 성부께서는 죄로 죽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며 마침내는 그들의 죽은 육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시키실 것이다(로마
8,10-11).”92)
그렇기 때문에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오순절을 교회의 탄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순절 사건은 파스카 주일에 이미 같은 다락방에서 일어났던 일이
결정적인 방식으로 나타난 것이라 하겠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오셔서 사도들에게 성령을 “건네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그분을 주셨던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그때 다락방 안에서 “문을 잠근 채” 일어났던 일이, 나중에는, 오순절날,
사람들 앞에서 외적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때 사도들은 성령의 능력을 입어서 다락방 문을
박차고 나가 예루살렘 주민들과 축일을 기해
거기 모인 순례자들을 향해 가서 그리스도를 증언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의 말씀이 실현되었던 것입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93)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다른 문서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전에도 벌써 성령께서 의심없이 세상에 작용하셨다.
그러나 오순절날에는 성령께서 사도들과 함께 영원히 머물기 위해 그들 위에
내려오셨다. 그래서 그날, 교회는 많은
사람들 앞에 공적으로 나타났으며 이교인들 사이에 설교를 함으로써 복음 전파가 시작되었다.”94)
교회의 시대는 성령께서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주님의 모친 마리아와
함께 모여있던 사도들 위에 내려오심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95)
대단히 명백하게 파라클리토, 진리의 영에
관계되는 약속과 예언들이 권능을 보이며 제자들 위에 실현되기 시작했을 때,
교회의 시대는 그 막이 열렸습니다. 이 약속과 예언의 실현이 교회의 탄생을 결정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여러 대목에서 이에
대해 자주 언급합니다. 그에 따르면 초대
공동체의 - 그 공동체의 신념들을 루가가 표현하고 있는데 - 의식 속에서, 성령은 보이지 않는 -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감지할 수 있는” - 방식으로, 예수님께서 떠나가신 뒤 고아처럼
버려졌다고 하는 느낌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잘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시자 그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수행할 수 있다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힘이 솟는 것을 느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 안에서 하시는 성령의 활동이며, 그들의
후계자들을 통해 교회 안에서 늘 수행하시는 그분의 활동입니다. 실제로, 사도들이 안수함으로써 그 협조자들에게 주었던 성령의 은총은 주교 서품을 통해 계속
전달됩니다. 주교들은 사제 서품을 통해 성무
수행자들이 이 영적 선물에 참여하도록 하며, 그들은 또한 견진성사를 통해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난 모든 사람을 더욱더 굳건하게 합니다. 이처럼, 오순절의 은총은 어떤 의미로 교회 안에서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교회와 신자들의 마음을 성전 삼아 그 안에 거처하시고(1고린
3,16; 6,19), 그 안에서 기도하시며
그들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신다(갈라 4,6; 로마 8,15-16.26).
성령께서는 교회를 온전한 진리로 인도하시고(요한 16,13), 친교와 봉사로
일치시키시며, 교계제도와 은사의 여러 가지
선물로써 교회를 가르치고 지도하시며, 당신
활동의 결실로 교회를 아름답게 꾸미신다(에페 4,11-12; 1고린 12,4; 갈라 5,22). 성령께서는 복음의 힘으로 교회를 젊어지게 하시며
항상 새롭게 하시어, 신랑이신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완성시키신다.”96)
26.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에서 인용한 이 대목들은, 성령의 오심으로 교회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또 이 교회의 시간이 계속되고 있다고도 말합니다.
이 시간은 여러 세대와 세기를 거쳐서 계속됩니다. 그리스도 이후 2000년이 가까워오고 있는
우리 시대에, 이 교회의 시간은 우리 시대의
공의회인 제2차 바티칸공의회 안에서 특별히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모두 그 공의회가 특별히 “교회론적” 공의회였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교회라는 주제에 대해 생각한 공의회였던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이 공의회의
가르침은 본질적으로 “성령론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영혼인 성령에 관한 진리로 물들여진 것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구세사의 현 단계에 대해서 “성령께서 교회에 말씀하시는 모든 것”97)을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그 풍부한 가르침 안에 틀림없이 보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공의회는 진리의 성령의 인도를 받고 그와
함께 증언하면서 성령-파라클리토의 현존을
특별히 강하게 확인시켰습니다. 어떤
의미로는, 이 공의회가 어려움을 많이 안고 있는 우리 시대에 성령을 새로이 “현존”하게 하였습니다. 이런 신념에 비추어볼 때, 우리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의 실현을 위해
시도하는 모든 노력, 그 교도 활동과 사목적
및 교회 일치적 취지 등이 지니는 중요성을 더욱 잘 이해할 수가 있게 됩니다.
이런 견지에서, 우리는 공의회 후속 시기에 열렸던 세계주교대의원회의(시노드) 집회들이 지니는
큰 의의를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이
회의들은, 진리와 사랑의 결실들 - 성령의 참된 열매들 - 이 세기를 통해 계속되는
하느님 백성의 지상 순례 기간을 위해서 오래 남을 재산으로 되게 하자는 목적에서 소집되었던
것입니다. 교회의 이런 작업은 꼭
필요합니다. 공의회에 주어졌던 성령의 구원적
열매들을 잘 확인하고 손상없이 보존하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될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려면 그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여 그것들이 오히려 “이 세상의
우두머리”98)로부터
나온 것이나 아닌지를 정확히 분별해 내는 일이 중요합니다.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이나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등
주요 헌장 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공의회가 현대 세계에 크게 개방되어 있기
때문에, 이 공의회가 현대 세계에 크게
개방되어 있기 때문에, 이 공의회의 일을 실현하는 과정에 예리한 분별력이 더욱 요청되는 것입니다.
사목헌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
특히 현대의 가난한 사람과 고통에 신음하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신도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번뇌인 것이다. 진실로 인간적인 것이라면 신도들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신도들의 단체가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도들은 그리스도 안에 모여 아버지의 나라를 향한 여정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할 구원의 소식을
들었다. 따라서 신도들의 단체는 사실 인류와
인류 역사에 깊이 결합되어 있음을 체험한다.”99) “교회가 섬기고 있는 하느님만이 인간 마음의 가장 깊은 소망을
충족시켜 주실 수 있고, 지상 양식으로는
결코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교회는 잘 알고 있다.”100)
“하느님의 영은……, 기묘한 섭리로 시간의
흐름을 지배하시며, 땅의 면모를 새롭게 하신다.”101)
76) 마태 3,11; 루가 3,16.
77) 요한 16,13.
78) 요한 16,14.
79) 요한 16,15.
80) 요한 14,26; 15,26 참조.
81) 요한 3,16.
82) 로마 1,3-4.
83) 에제 36,26-27; 요한 7,37-39; 19,34 참조.
84) 요한 16,7.
85)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 In Ioannis Evangelium, 제5권 제2장: PG 73,755.
86) 요한 20,19-22.
87) 요한 19,30 참조.
88) 로마 1,4 참조.
89) 요한 16,20 참조.?
90) 요한 16,7.
91) 요한 16,15.
92) 교회헌장, 4항.
93) 요한 15,26-27.
94) 선교교령, 4항.
95) 사도 1,14 참조.
96) 교회헌장, 4항. 성령과 교회 사이의 일치에 관해서는 교부 및 신학자들의 풍부한 전통이 있다. 그리고 이 일치는 가끔 인간에게 있어서의 영혼과 육체 사이의 일치와 비교되기도 했다; 성 이레네오, Adversus Haereses, III, 24,1: SC 211, 470-474면 참조; 성 아우구스티노, Sermo 267,44,: PL 38,1231; Sermo 268,2: PL 38,1232; In Iohannis Evangelium Tractatus, XXV,13; XXVII,6: CCL 36,266,272-273; 성 대 그레고리오, In Septem Psalmos Poenitentiales Expositio, Psal. V,1: PL 79,602; 알렉산드리아의 디디모, De Trinitate II,1: PG 39,449-450; 성 아타나시오, Oratio III contra Arianos, 22,23,24: PG 26,368-369,372-373;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In Epistolam ad Ephesios, Homil. IX, 3: PG 62,72-73.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교부들의 전통과 자기 이전까지의 신학자들의 전통을 종합하여 성령을 교회의 “심장”과 “영혼”이라고 규정했다; 「신학대전」, III, q.8, a,1, ad 3; In Symbolum Apostolorum Expositio, a,IX; In Tertium Librum Sententiarum, Dist. XIII, q.2, a.2, quaestiuncula 3.
97) 묵시 2,29; 3,6.13.22 참조.
98) 요한 12,31; 14,30; 16,11 참조.
99) 사목헌장, 1항.
100) 사목헌장, 41항.
101) 사목헌장, 26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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