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5주일>(2010. 3. 21.)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예수님 앞에 간음죄를 지었다는 여자가 붙잡혀 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그 여자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햇볕은 쨍쨍 내려쬐고... 흙먼지만 풀풀 날리고... 숨이 막힐 것 같은 상황입니다.
여자를 죽이려고 돌을 손에 쥐고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 눈에는 지독한 살기가 서려 있습니다.
그 여자는......
돌에 맞아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과 절망감으로 잔뜩 겁에 질려 있고,
마치 발가벗고 사람들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수치심과 모욕감으로
그냥 죽어버리고 싶다는 심정이 되어 있습니다.
이 복음 말씀을 읽을 때, 많은 사람들이 군중 속에 숨으려고만 합니다.
그 여자는 저 멀리 세워놓고서
자기는 사람들 속에 안전하게 숨어서 그 여자를 바라보기만 합니다.
그러면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는 예수님 말씀에 대해
참 좋은 말씀이라고 감탄하거나 칭찬하거나 감동하기만 합니다.
왜 ???
자기 자신이 그 여자라는 생각은 못하는 것입니까?
피고 신분으로 법정에 서보지 않으면 그 심정을 모를 것입니다.
사실 저도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군대에서 절도 누명을 쓰고 용의자가 되어 심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절망감은 정말...
그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주 짧은 화살기도 한 마디뿐이었습니다.
“주님, 살려주십시오.”
억울하다고 하소연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알리바이도 없고 결백하다는 증거도 없고 증인도 없었으니
그저 기적만 바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났고 저는 혐의를 벗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현장에서 붙잡혔다고 했습니다.
상대방 남자는 비겁하게 도망가 버렸습니다.
현행범이니 어떻게 변명할 수도 없습니다.
변호인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도 침묵을 지키고 계셨고,
그 자리에서 단 한 명도 여자를 감싸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마도 회개하지 않은 채로 하느님의 심판대에 서게 되면
바로 그 여자와 같은 신세가 될 것입니다.
누구나 다 예외 없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러니 비겁하게 군중 속에 숨지 말고 그 여자가 곧 자신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살려주셨는데,
아마도 그 여자는 살아났다는 안도감이나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사람들에게서 벗어났다는 것, 수치심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더 기뻤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그 여자를 용서하시기 전에 먼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떠나게 만드신 일이 더 큰 은총이라고...
말하자면 사람들 앞에 발가벗겨진 채 내던져진 여자의 알몸을 감추어주신 것,
단 한 마디의 말씀으로...
그 말씀 때문에 여자는 사람들의 시선과 모욕과 경멸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그 말씀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발가벗긴 말씀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들 부끄러워서 달아나버렸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말씀이 그 여자에게는 구원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읽을 때 구경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말씀은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만일에 어떤 이가 이 복음 말씀을 해설하거나 강론을 할 때,
“우리도 죄가 있으니 그 여자에게 돌을 던지지 말아야 합니다.”
라는 식으로 군중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이 가증스러운 자야, 붙잡혀 온 여자는 바로 너다.”
라고 하실 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그 여자에게 돌을 던지지 말아야 한다.” 라고 강조하지 말고,
우리도 다른 사람을 함부로 죄인이라고 판단하지 말고 용서해야 한다고 하지 말고,
죄가 있는데도 돌에 맞아죽지 않은 것을 먼저 감사드려야 할 것입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겠다.” 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은
바로 우리 각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그 여자처럼 간음죄를 지은 적이 없다.” 라고 항의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꼭 간음죄만이 문제이겠습니까?
행동으로 지은 죄 말고도, 생각으로, 말로 지은 죄들,
해야 할 일들을 하지 않은 죄들... 그 수많은 죄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언젠가는 모두 다 하느님 앞에 완전히 발가벗고 서게 될 것입니다.
자기의 죄가 너무나도 부끄러워서 감히 살려달라는 말도 못할 것입니다.
묵시록에도 그런 장면이 나오는데 그냥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싶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심판관이 아니라 변호인으로 등장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알몸을 당신의 두 팔로 가려주실 것이고... 우리를 살리실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미사 때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왜 미사 때마다 자비송을 바치는 것입니까?
왜 미사 때마다 “제 탓이오.” 라고 자기 가슴을 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그 여자와 같은 신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여자에게 돌을 던질까 말까 망설이는 군중 속의 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로 그 여자입니다.
옛날 신학생 시절에 들었던 어떤 신부님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느님께서 정의의 잣대로 나를 심판하셨다면 나는 벌써 맞아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나를 자비의 잣대로 살려주셔서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
남이 아니라 나입니다. 그 여자가 아니라 나입니다.
내가 돌에 맞아죽을 뻔 했는데, 예수님께서 살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를 묻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죄를 묻지 않겠으니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하십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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