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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순제5주일(100321)

김대철대철베드로 2010. 3. 20. 17:21

<C.B.F. 사순 제5주일 : 요한복음 8,1-11>(100321)

 

8장

 

<간음하다 잡힌 여자>

 

1절..(그때에)<예수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계시는 동안 낮에는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밤에는 올리브 산에서 지내

    셨습니다. 그곳은 사람들과의 번거로운 접촉을 피해서 침묵과 고독을 누리기에

    알맞은 곳이었습니다.

 

2절..<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온 백성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가

    셨다는 것은 전날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을 듣기 위해 백성들이 모여듭니다. ‘온 백성’이라는 말은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

    다는 뜻입니다.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간음한 여자는 군중 ‘가운데’ 있

    게 됩니다.

 

    예수님이 앉으셔서 가르치셨다는 표현은 랍비들이 사람들을 가르치는 자세를 나

    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 있는 율법 학자들의 교단이 아니라 성전

    밖에서 그저 작은 걸상이나 계단에 앉으셔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을 것입니다.

 

3절..<그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

    데에 세워 놓고,>--여기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적대적인 사람

    들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 ‘간음하다 붙

    잡힌 여자’를 일부러 예수님께 끌고 옵니다.

 

    여자의 간음죄가 언제 있었던 일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좀 지난 일인

    지, 아니면 바로 직전의 일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

    람들은 현장의 목격자가 아니라 그 여자의 간음죄를 재판하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여자를 재판소로 끌고 가는 길에 예수님과 마주쳤고 이 기회에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합니다.

 

4절..<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여기서 ‘스승님’이라는 호칭은 예수님을 스승으로 여겨서 부른 호칭도 아니고,

    존경의 뜻도 아니고, 그냥 예의상 부르는 호칭입니다. 여기서는 원문의 단어를 보

    아도 그렇고 내용을 생각해 보아도 ‘스승님’보다는 ‘선생님’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당합니다.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다는 것은 명백하게 간음죄를 지었다는 것을 강

    조하는 것입니다.

 

5절..<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

    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그 여자의 간음죄는 사실이었던 것으로 보

    입니다. 예수님도 범죄의 사실 여부는 묻지 않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범죄의 사실 확인을 생략하고 곧바로 율법문제로 들어갑니다. 율법에는

    결혼한 여자가 간통을 하다 잡히면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있고(레위 20,10), 약혼

    한 여자가 간통을 하다 잡히면 돌로 쳐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신명 22,23-24).

 

    신명기 율법대로라면 이 여자는 약혼중인 여자였을 것입니다. 상대 남자에 대해

    서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현장에서 붙잡히지 않고 도망쳤을 것입니다. 간통죄는

    쌍벌죄로서 남자와 여자가 함께 사형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남자가 붙잡히지 않

    았더라도 여자만이라도 처벌할 수 있었습니다(다니엘서 13장).

 

    여기서도 ‘스승님’보다는 ‘선생님’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당합니다. 그들은 예수

    님께 재판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견을 묻고 있습니다. 이것

    은 예수님을 진퇴양난에 빠뜨리기 위한 의도입니다.

 

6절..<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

    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율법의 규정과는 상관없이 로마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의 최고의회에는 사형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로마법은 이런 죄를 사형으로 처벌하지는 않았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율법대로 그 여자를 사형시켜야 한다고 말하면 그동안 자비와 용

    서 를 가르쳤던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순되고, 또 로마법 위반으로 고발당할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그 여자를 그냥 풀어주라고 말한다면 율법을 어겼다고 고발

    당할 수 있었고, 로마의 지지자로 모함을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함정을 만들었습니다. 그

    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무엇을 쓰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우리

    의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썼느냐가 아니라 예수님이 침묵을

    지켰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법률적인 문제는 국가의 법정으로 가서 해

    결하라는 무언의 답변입니다.

 

    일부 필사본에는 ‘예수께서는 그들 각 개인의 죄들을 쓰셨다.’ 라고 되어 있습니

    다. 만일에 예수님이 땅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죄를 쓰셨다면 그

    것은 모든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죄인임을 일깨우기 위한 것입니다. 또 하느님만

    이 심판하실 수 있으니 하느님의 심판에 맡기라는 뜻이 됩니다.

 

7절..<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

    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그들이 줄곧 물어댔

    다는 것은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이 마침내 답변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양날 칼과도 같은 것입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는 답변은 ‘율법대로 그 여자를 죽여도 좋다. 그렇

    지만 그 여자를 죽이려는 사람들의 마음에 죄가 없어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이 답변은 하느님 앞에서 모두 다 죄인인 주제에 다른 사람을 심판하려고 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율법문제를 들고 왔지만 예수님은

    이 문제를 개인적인 의무와 양심의 실천문제로 바꾸셨습니다.

 

8절..<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예수님은 다시 침묵을

    지키십니다. 사실 그 이상 다른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땅에 그들의 죄를 쓰셨다면 예수님의 행동은 단순한 반복이 아

    닙니다. 먼저 어떤 표시를 보여주셨고, 그것을 말로 설명하셨고, 다시 한 번 더

    표시를 보여주심으로써 당신의 뜻을 확실하게 나타내신 것입니다. 즉 하느님만이

    죄인들을 심판하실 수 있다는 것을 다시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9절..<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

    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많은 위선

    과 불의로 가득 차 있던 사람들은 패배를 인정하기 싫어서, 또는 양심이 찔려서

    그 자리를 피해버립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부터 떠난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더

    많이 타격을 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젊은 사람들보다는 그나마 좀 더

    자비심이 남아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여자는 자유의 몸이 되었기 때문에 그 자리를 떠나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대로 서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자비로움에 깊은 감동을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제 여자는 예수님 앞에 죄인으로 혼자 남아 있게 되고, 예수님은 여자 앞에 심판

    관으로 남아 있게 됩니다.

 

10절..<예수님께서는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

    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예수님의 질문에는 모

    든 사람이 누구나 다 죄인이라는 것을 여자에게 알려주려는 의도가 들어 있습니

    다. 죄 없는 자부터 돌을 던지라고 했는데 모두 다 가버렸으니 그들도 모두 죄인

    이라는 뜻이 아니겠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11절..<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

    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

    라.”>--예수님의 질문에 답하는 여자의 대답에는 신뢰와 감사의 마음이 들어 있

    습니다.

 

    여기서 여자가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부른 것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것은 완전

    히 잘못 번역한 것입니다. 원문대로 ‘주님’으로 번역해야 합니다. 여자는 예수님

    에 대한 깊은 감사와 존경의 뜻으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라는 말은 ‘나도 죄가 있으니 너를 단죄하지 않겠

    다.’ 라는 뜻은 절대로 아니고,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베풀겠다는 뜻입니다. 예

    수님은 심판자가 아니라 구세주로 오신 분입니다. 구세주로 오셨기 때문에 그 여

    자를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여자를 용서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를 용서하고 처벌을 면제해주셨지만 그

    여자의 죄를 묵인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 여자가 한 짓은 분명히 죄였습니다. 그

    러나 예수님은 용서를 하셨고 앞으로는 죄짓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제 여자에게

    는 새롭게 살아야 할 의무가 생긴 것입니다.

 

    그 뒤에 그 여자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평생 보

    속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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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용서”

 

용서는 죄를 지은 사람에게 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았다면 용서해줄 일도 없습니다.

‘죄를 지었지만’ 처벌대신 용서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 자비와 용서를 청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 자비와 용서를 청할 일도, 청할 수도 없습니다.

또 죄지은 적이 없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그것은 스스로 하느님의 용서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죄가 없는 의인들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총을 얻으려면

자신이 죄인임을 먼저 깨닫고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정말로, 정말로, 죄가 단 하나도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면

그런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총이 필요 없습니다.

십자가 은총이 필요 없는 사람이라면

예수님도 필요 없고 예수님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곧 구원입니다.

죄가 없으니 용서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구원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과연 누가 하느님 앞에서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양심이 있다면 손에 돌을 들고 있는 군중 속에 서 있지 말고

붙잡혀온 여자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다... 겸허하게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면서...

 

2010. 3. 21.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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