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에게는 '나-주체'라는 말이 상당히
매력적인 것 같습니다. 모든 이들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고 살아갑니다. "'나'에게 '너'는 지옥이며 너는 나의 행복을
위협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사르트르 같은 사상가도 있지만 '너' 없이는 '나'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임은 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혼자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짝사랑이라고 하지만 짝사랑도 상대가 있어야 가능하지 않습니까? 더욱이 사랑은 다른 사람의 현존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윤리에 있어서 하느님과 만남이나 이웃과 만남은 벗어날 수 없는 근본적 주제가 됩니다. 나에게 있어 타인은 내 삶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진리와 의미를 향해 나아가는 구체적 길을 제시해 주는 방향타라 하겠습니다.
인간은 매일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갑니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상대와 진실한 만남을 위해서는 자기 중심을 벗어나는 작업이 끊임없이 필요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이
끊임없는 작업을 통해서 나는 가난하고 소외당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윤리적 필요성이 존재하고
상대 얼굴과 만남 안에서 윤리적 의무가 발생합니다. 이 의무란 한마디로 '선'을 향한 움직임을 뜻하는 것이지요.
인간의 법적
규범성은 인간 지성을 통해서 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다양한 얼굴에게 다가갈 때에 생성되는 것이며 상대 얼굴이 바로 내 행위의 기준이
됩니다. 상대 행복을 위해 조건없는 사랑을 내가 실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참된 인간은 인류의 희망입니다. 참된 인간이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상대를 위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윤리는 인간을 최종 목적지로 이끄는 참된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께서 상대의 얼굴, 특히 고통 중에 있는 모든 사람 안에 택하여 자리하신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모범을 따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상대 얼굴을 만나면서 비로소 하느님의 '자기 비움'을 받아들이게 되고 하느님을 닮은 참된 신앙인의 삶이 가능해집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향한
내적 걸음에서 자신이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발견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으로 신앙인은 하느님과 관계와 다른 사람들과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자신의 행위까지도 변화됨을 깨닫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와 너의 관계가 다르지 않음을 말합니다. 너는 나하고
다르다고 구별된다거나 심지어 걸림돌로 여겨지는 대상이 아닌 것을 말합니다. 상대는 하느님과 친교를 향해 나아가는 선물로서 나에게 받아들여집니다.
이 선물로 인해 나의 변화가 가능하게 합니다. 진정으로 너는 나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대로
우리는 성숙한 지경으로 나아가야 합니다"(히브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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