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나눔 Life Story/대한민국역사 (History of Corea)

고 구 려(高句麗, General Introduction to Goguryeo)

김대철대철베드로 2004. 9. 1. 05:16

현무도고구려는 졸본(卒本) 지방에서 BC 37년 개국하여 AD 668년까지 28명의 황제, 705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한반도 중북부와 만주전역을 근거지로 하여 연해주(沿海州) 지역, 중국 하북성(河北省)과 산동성(山東省), 북경 인근까지 진출한 우리민족의 고대국가이다.

고구려의 건국시조인 추모(鄒牟, 朱蒙)는 BC 58년 북부여의 시조로 전해지는 해모수와 하백(河伯)의 딸인 유화(柳花)부인 사이에서 동부여(東扶餘)에서 태생하여 동부여의 왕궁에서 자랐다. 주몽이란 이름은 부여어(扶餘語)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뜻한다"고 전해진다. 동부여의 금와왕(金蛙王)의 일곱 왕자와 신하들의 위협을 눈치챈 어머니 유화부인은 주몽에게 멀리 떠나 큰 일을 도모하라고 당부한다. 주몽은 몇몇 측근들과 함께 동부여를 떠나 졸본부여(卒本夫餘)로 망명하였다. 그는 비류수(沸流水)가 흐르는 졸본(卒本)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다. 고구려는 일찍이 기마민족(騎馬民族)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주변 비류국(沸流國) 송양왕(松讓王)의 항복을 받아내고 해인국(荇人國)을 정복하고 북옥저(北沃沮)를 멸망시키는 등 여러 부족국가를 정벌하여 영토를 넓혀 나갔다. 서기 3년(유리명왕/瑠璃明王 22년)에 압록강 유역의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遷都)하였으며 이후 선비(鮮卑), 양맥(梁貊), 황룡국(黃龍國) 등을 정벌하였으며 주변국과의 전쟁을 통해 더욱 강대해졌다.  

태조왕(太祖王:재위 53∼146) 때 부터 고조선의 고토수복(故土收復)의 기치를 내걸고 현도군을 쳐서 변방으로 축출하였고, 옥저(沃沮)와 동예(東濊)를 복속시켜 동해안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는 왕위의 형제상속제를 확립하였으며 종래의 부족국가적 형태에서 중앙집권적 형태로 정비하여 고대국가체제를 갖춤으로써 고구려의 실질적인 시조가 되었다.

고국천왕(故國川王:재위 179∼197)은 형제상속제에서 부자상속제(父子相續制)로 왕위계승법을 바꾸었으며, 5부의 행정구역을 설정하는 등 체제정비를 단행하여 왕권이 더욱 강화되었다. 동천왕(東川王:재위 227∼248) 때는 중원(中原)에서는 위(魏)·촉(蜀)·오(吳) 3국의 대립시기였는데, 이때 동천왕은 요동군(遼東郡)의 실권자 공손연(公孫淵)과 통교하고 위(魏)나라를 견제하는 등 외교술을 발휘하였으며 태조왕 이래 숙원이었던 현도를 공략하여 복속시켰다. 고구려는 7년간에 걸친 위나라와의 패권다툼에서 위(魏)나라의 장수 관구검( 丘儉)에게 치명타를 안기며 압승을 거두게 되지만, 관구검의 반격을 받아 수도인 환도성(丸都城)이 함락되기도 하였다.  

 

봉상왕(烽上王) 때는 선비족(鮮卑族)인 전연(前燕)의 모용외(慕容 )의 침입을 두 차례 받는 등 위기를 겪다가 313년 미천왕(美川王:재위 300∼331) 때는 서안평을 점령하였고, 낙랑군(樂浪郡)을 멸망시키고 대방군(帶方郡)을 정벌하여 한반도에서 한사군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였다.

 

영토확장과 전성기 (領土擴張과 全盛期)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재위 371∼384) 때 불교를 도입하여 공인하였으며 공인과 태학(太學) 설립(372), 율령(律令) 반포(373)하여 국가체제 정비와 정치적 안정기반을 구축시켰다. 이와 같은 단계에서 즉위한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은 정복 군주로서 백제의 한성(漢城)을 침공하여 임진강과 한강선까지 진출하였고, 신라 내물왕(奈勿王)을 원조하여 한반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였다. 광개토태왕비문에 기록되어 있는 본 내용은 일본이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주장하여 한반도 남부지방을 지배했었다는 근거로 삼기도 했었지만 최근 일본 학계에서도 비문조작에 무게를 두고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후연(後燕)을 정벌하여 조양(朝陽) 인근과 요동(遼東)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고 요서(遼西)지방을 차지하였으며 서북으로는 거란을 쳐서 내몽골 동부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또한 숙신(肅愼)을 복속시켜 만주(滿洲)와 연해주(沿海主)에서 우월한 위치를 확보하였다.

장수왕(長壽王)은 광개토태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제도의 정비와 대외정책의 확대 등으로 최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427년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수도를 평양(平壤)으로 천도하여 집권적 정치기구를 정비하고 국력을 신장시켰다. 그는 중원의 북위(北魏)와 송(宋)과의 교역에 힘쓰고 동시에 몽골지역의 유목민족의 유연(柔然) 등 새외(塞外) 민족과도 통교하면서 지두우국(地豆宇, 동몽골 지역)을 분할하는 등 중원을 견제하는 외교정책을 펼쳤다.

장수왕의 남하정책에 위협을 느낀 신라와 백제는 나제동맹(羅濟同盟)을 체결하였다. 472년(개로왕(蓋鹵王) 18) 백제는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의 남침을 막기 위해 군사를 청하기도 하였다. 장수왕의 남하정책의 목표는 한강 유역이었으며 475년 백제의 한성을 침공하여 함락하고 개로왕(蓋鹵王)을 패사(敗死)시켜 고국원왕(故國原王)의 한을 풀고 아산만(牙山灣)에서 충주(忠州)일대 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한강 유역을 확보하였다. 이때 백제는 수도를 웅진(熊津, 공주)으로 옮기고, 고구려의 공격을 받은 신라는 죽령(竹嶺) 이북의 땅을 잃었다.

장수왕의 뒤를 이은 문자명왕(文咨明王)은 493년 BC 4세기 이래 800여년간 지속되던 부여(夫餘)를 완전히 멸망시켜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고 중국과 자웅(雌雄)을 겨루었다. 광개토태왕비(廣開土太王碑)와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가 당시의 광대한 판도를 밝혀주고 있다.

고수전쟁 및 고당전쟁 (高隋戰爭 및 高唐戰爭)
6세기와 7세기 초반의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를 보면,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북진정책을 취하였으며, 중원에서는 3세기 이래로 후한(後漢<東漢>, 25∼220)이 멸망하고 221∼589까지 16국 시대,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대를 거치며 30여개 이르는 군소국가가 명멸해 가는 동안 고구려는 수세기 동안 태평성대를 누리며 그 당시까지 6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며 동아시아 최대강국으로 군림했다.

이에 고구려 영양왕( 陽王)은 진흥왕의 북진 정책으로 한강 유역 및 함경도 일대를 상실하자 남하정책을 포기하고 수나라의 침략에 대비하여 서진정책(西進政策)을 단행, 요서(遼西)지방을 선제공격하였다.

598년(영양왕 9) 수나라 문제(文帝)는 수륙군(水陸軍) 30만으로 침입하였으나 고구려의 병마도원수 (兵馬都元帥) 강이식(姜以式) 장군은 수나라의 수군총관(水軍總官) 주라후(周羅喉)의 수군을 발해만(渤海灣)에서 섬멸시켜 보급로를 차단하고 후퇴하는 수군을 임유관(현 山海關) 전투에서 거의 전멸시켰다. 사서에는 "장마로 인한 질병·풍랑으로 수군(隋軍)이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퇴각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으나 자국의 이익에 맞게 중화사상에 입각한 춘추사관(春秋史觀)에 의한 기록으로 보인다.

그 뒤 수나라 양제(煬帝)는 돌궐족을 복속시킨 뒤, 612년 113만 대군으로 요하(遼河)를 건너 요동성(遼東城, 遼陽)을 공격하였으나, 고구려군의 강력한 항전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자 양제(煬帝)는 다시 30만 병력으로 침입해왔으나, 명장(名將)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이 살수(薩水)에서 위장패전전술(僞裝敗戰戰術)을 이용 적을 유인하고 매복작전에 이은 총공격으로 섬멸함으로써 살아 돌아간 자는 불과 2,700명에 불과하였다.

13세기 헝가리에서 한국에 이르는 유라시아 대제국을 건설한 칭기스칸의 몽골 군대의 규모가 10만에서 20만 정도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수나라가 110만 대군을 파견하였다는 것은 그 당시 고구려가 얼마나 강하고 효율적인 육군과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이로써 수나라는 고구려 원정 실패에 따른 혼란으로 각지에서 내란이 일어나 618년 멸망하게 된다. 이후 산서성(山西省의 귀족 출신인 이연(李淵)이 당(唐)나라를 건국하였다. 이후 그의 아들 이세민(李世民)은 형제를 죽이고 아버지 당고조(唐高祖) 이연(李淵)을 급박하여 몰아내고 왕권을 탈취였다. 당시 고구려는 당나라와 대립하고 돌궐 등과는 내왕하였기 때문에 당태종 역시 고구려를 침입하려는 야심을 보이자, 고구려도 대련(大連)과 부여성(夫餘城, 農安)을 연결하는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아 대비하였다.

영류왕이 즉위하면서 당에 대한 온건파가 득세하기 시작하였으나 광개토태왕비에도 나와있듯이 사해를 평정한 천손의 민족이 당에 굴복할 수 없다는 자주사관을 가진 조의선인(早衣仙人)들과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영류왕과 온건파 귀족 100여명을 제거하고 보장왕을 옹립하고 더욱 군비를 확장하는 등 당나라의 침입에 철저히 대비하였다.

645년(보장왕 4) 당태봉(唐太宗)은 직접 30만 대군을 이끌고 요하(遼河)를 건너 개모성(蓋牟城), 요동성(遼東城), 백암성(白巖城) 등을 함락시키고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안시성주(城主) 양만춘(楊萬春) 장군의 결사항전과 군민의 총단결로 당군에게 치명타를 입힌다. 연개소문의 총지휘로 당태종(唐太宗)의 본군을 해상에서 지원하던 당의 수군이 발해만(渤海灣)에서 격파되자 보급로가 끊겨 진퇴양난에 빠진 당태종은 눈물을 머금고 퇴각을 결정한다. 하지만 연개소문과 양만춘의 추격군에 의해 요택(遼澤)에서 군사의 대부분을 잃고 자신도 눈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는 등 치욕적인 패전을 하게된다. 당태종은 연개소문에게 항복을 하고 영토를 내준 뒤에야 수도인 장안(長安)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뒤에도 당나라는 2차·3차(647년·648년)에 걸쳐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모두 실패하고 중국의 영웅이라 불리는 당태종은 전쟁에서 입은 상처의 후유증으로 "고구려를 더 이상 정벌하지 말라"는 유서를 남기고 649년 사망한다.

정치제도 (政治制度)
고구려의 정치적 기반으로는 소노부(消奴部)·계루부(桂婁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의 5부족 연맹의 조직을 들 수 있다. 처음에는 소노부에서 왕이 나왔으나 태조왕 때부터 계루부의 고씨(高氏)가 왕위를 대신하였다. 절노부는 왕실과의 혼인을 통하여 왕비족으로 등장하였고, 전 왕족인 소노부, 왕족인 계루부·절노부의 대가(大加:嫡統大人)에게는 고추가(古雛加)라는 특별 칭호를 주었다. 이는 신라의 갈문왕(葛文王), 백제의 길사(吉師)와 같이 귀인(貴人)이라는 뜻이다.

고구려 초기의 관제는 왕 아래에 상가(相加)·대로(對盧)·패자(沛者), 이하 주부(主簿)·우태(優台)·승(丞) 등의 관리가 있었고, 왕과 제가(諸加)는 사자(使者)·조의(瑋衣)·선인(先人) 등의 가신(家臣)을 거느렸다. 평양 천도 이후 행정조직과 관등(官等)조직이 정비되어 수상인 대대로(大對盧)·태대형(太大兄) 등 10여 관등이 정비되었고, 수상은 원칙적으로 3년마다 선거로 뽑았다. 수상인 대대로(국무총리)는 대막리지(大莫離支)·태대막리지(太大莫離支)라는 별칭이 있었다. 관등명을 보면 형(兄)·사자(使者)가 붙은 것이 많았는데, 형은 연장자라는 뜻으로 족장의 자리를 계승한다는 의미이며, 사자는 지방의 조세징수자의 뜻을 의미하는 것이다.

행정구역은 중앙을 동·서·남·북·중(내)의 5부로 나누어 대가가 통치하였다. 지방행정구역은 5부의 연맹체가 5부의 행정구역으로 전환되었다. 각 부 밑에는 여러 성(城)이 딸려 있었다. 각 부의 장을 욕살(褥薩), 성(城)의 장을 처려근지(處閭近支) 또는 도사(道使)라고 불렀다. 이 지방장관은 관리와 군대를 거느리고 있어 행정권과 군사권을 겸직하였다. 특수행정구역으로 평양성·국내성(國內城)·한성(漢城 : 載寧)을 삼경(三京)이라고 하였다.

군사제도는 군사조직을 행정조직과 일치시켜 욕살·도사 들은 자기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으나, 국가에서 동원할 때는 군대 편성에 대모달(大模達)·말객(末客) 등의 군관이 되어 지휘하게 하였다.

 

사회경제(社會經濟)
3세기경 고구려의 총 호수는 3만 호, 지배계급 수가 1만여 명, 멸망 전의 총 호수는 69만 7,000이고, 성곽 수는 176에 달하였다. 지배층인 왕족과 관료는 정치·군사·교육 등을 담당하고 생산에 종사하지 않았으며, 농민·노비 등은 하호(下戶)라고 하여 생산에 종사하는 피지배층이었다.

당시에는 고리대금업도 성행하여 평민을 노비로 몰락시키는 폐단이 생기자, 194년 고국천왕은 이를 막고자 을파소(乙巴素)를 등용하고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여 빈민구제에 힘썼다. 부족국가시대의 제가회의(諸加會議)는 고구려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법률은 엄하게 적용되어 반역자는 불로 태우고 목을 잘랐으며, 살인자와 전쟁에 패한 자는 목을 잘랐고, 도둑질을 한 자는 12배의 배상을 물렸으며, 우마(牛馬)를 죽인 자는 노비로 삼았다.

조세제도(租稅制度)는 곡식으로 매호(每戶)에서 받는 조(租)와, 베(布)나 곡식으로 개인에게서 받는 인두세(人頭稅)가 있었다. 산업은 직조기술이 발달하였고, 일본에 전파된 물품과 기술을 보면 철공·종이·묵필·맷돌이며 모피류가 수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주로 남·북 중국 및 유목민족인 북방민족들과도 무역을 하였다.

고구려 문화 (高句麗文化)
372년(소수림왕 2) 전진(前秦)의 왕 부견이 사신단과 함께 승려 순도(順道)를 보내 불경(佛經)과 불상(佛像)을 전해주어 고구려에 불교가 도입되었으며 또한 374년 동진(東晉)의 승려 아도(阿道)가 들어와 불법을 전파하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어느 정도 유포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 이듬해에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워 순도와 아도로 하여금 각각 그곳에서 불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고국양왕(故國壤王:재위 384∼391) 때는 영(令)을 내려 불법을 숭상하도록 권장하였고, 광개토대왕 때인 392년에는 평양에 9개의 절을 지었으며, 395년에는 동진의 승려 담시(曇始)가 경률(經律) 수십부를 가지고 와서 활발히 전도하였다. 평원왕(平原王) 때 승려 의연(義淵)은 위(魏)·제(齊)나라의 양대 숭통(僧統)으로 이름이 높던 법상(法上)에게 불교사를 배웠다. 같은 시대의 승려 낭(朗)은 양(梁)나라에 가서 불법을 공부하였다.

영류왕(榮留王) 때 혜관(慧灌)은 625년 일본에 건너가 삼론종(三論宗)의 개조(開祖)가 되었고, 평원왕 때 담징(曇徵)은 일본의 나라현(奈良縣)에 있는 호류사(法隆寺) 금당(金堂)의 벽화를 그렸으며, 지묵(紙墨)·맷돌 등을 전하였다. 특히 혜량(惠亮)은 신라에 들어가 진흥왕 때 국통(國統)·주통(州統)·군통(郡統)의 교단조직에 공헌, 초대 국통이 되었으며, 영양왕 때 보덕(普德)은 연개소문의 도교(道敎) 장려로 불교가 쇠퇴하게 되자 백제에 들어가 열반종(涅槃宗)을 강론하였다. 고구려에서 유행된 종파는 대승불교(大乘佛敎)인 삼론종(三論宗)이었다.

고구려의 도교(道敎) 전래에 관한 기록은 624년(영류왕 7) 당나라 고조(高祖) 이연(李淵)의 명으로  도사(道使)를 파견하여 도법(道法)을 들여와 노자(老子)를 강론하였다고 전해진다. 그 후 643년 보장왕(寶藏王) 때 연개소문이 당나라의 정세를 염탐하기 위한 술책으로 숙달(叔達) 등 도사 8명을 당에서 데려와 불사(佛寺)를 몰수해서 그곳에 모물게 하였다. 이때 불교를 탄압하였으므로 평양 영탑사(靈塔寺)를 창건한 승려 보덕화상(普德和尙)이 백제로 망명하는 등 불교세력이 쇠퇴하기도 하였다.

불교도입과 더불어 서역(西域)과 중국의 문화가 들어오면서 넓은 세계를 인식하게 되었으며, 373년에는 율령(律令)이 반포되었다. 교육기관으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대학격인 태학(太學)이 372년에 설립되어 오경(五經)·삼사(三史), 삼국지(三國志), 문선(文選) 등을 가르쳐 한학(漢學) 교육이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5세기 초에 지방에 둔 경당(堂)은 사립학교로 경전(經典)과 기마(騎馬)·궁술(弓術) 등의 무술을 가르쳤다.

한학의 보급과 발달로 국사(國史)가 편찬되었는데, 유기(留記, 편찬자·연대 미상) 100권과, 600년(영양왕 11)에 태학박사(太學博士) 이문진(李文眞)의 유기 신집(新集) 5권 등이 편찬되었으나 전하지 않는다.

고구려의 시가(詩歌)로는 BC 17년에 지은 유리명왕(瑠璃明王)의 황조가(黃鳥歌), 고구려 승려 법정사(法定師)의 영고석(詠孤石), 을지문덕의 오언시(五言詩)인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 등이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 전하며, 관(管)·현(絃)·격타악(擊打樂) 등 17종의 악기가 있었다. 왕산악(王山岳)은 양원왕(陽原王) 때 진(晉)나라 칠현금(七絃琴)을 개량하여 거문고를 만들었고, 100여 곡을 작곡하였다.

고구려 예술의 특징은 와당(瓦當)의 귀신상(鬼神像)과 사신도(四神圖)의 벽화에서 볼 수 있듯이 힘과 정열이 넘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미술은 고분벽화(古墳壁畵)에서 그 대표적 예를 찾아볼 수 있는데, 2004년 7월 1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무용총(舞踊塚), 각저총(角抵塚), 덕흥리벽화고분(德興里古墳), 진파리고분(眞坡里古墳), 안악고분(安嶽古墳) 등의 벽화(壁畵)를 통해 고구려의 미술사, 외교사, 귀족생활, 서민생활, 천문학(天文學), 복식(服飾) 등 고구려의 화려했던 문화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고구려인은 검소·청결하고 상무적(尙武的)이며 기사(騎射)에 능하였다. 가옥은 왕궁과 관청·사원 등에는 기와를 덮고, 일반 민가는 초가(草家)였으며 온돌을 사용하였다. 귀족의 모자는 소골(蘇骨)이라고 하여 깃[羽]과 금으로 장식한 비단으로 된 관을 썼으며, 관리는 등급에 따라 복색(服色)이 다르고 무사(武士)는 절풍(折風)이란 건(巾)을 썼다. 여자는 머리에 수건을 쓰고 주름잡은 치마를 입었으며, 남자는 큰 소매가 달린 저고리와 통넓은 바지를 입었고 상투를 틀었다.

상류층에서는 바둑·투호(投壺)·축국(蹴鞠) 등의 오락을 즐겼고, 하류층에서는 무도·음악·석전(石戰)·씨름 등을 즐겼다. 장례(葬禮) 풍속은 부장품(副葬品)을 관속에 넣는 후장(厚葬)의 풍속이 있었다. 특히 10월에는 동명신(東明神)과 생모 하백녀(河伯女)를 모시는 동맹(東盟)이란 제천의식을 가졌는데 읍락(邑落)의 남녀들이 밤에 모여 서로 노래와 놀이를 즐기며 부족의 전통을 재확인하고 결속을 강화하였다. 한편 고구려 인들은 술빚기를 잘해서 "음주가무의 민족"이란 말이 생겨났고 오늘날 한국사람들과 중국 동북 3성에 살고 있는 우리 교포들이 술을 잘 마시고 여흥을 즐기는 것은 이 때부터 계승된 것이다.

 

고구려멸망 (高句麗滅亡)
중국의 강력한 통일왕조인 당나라의 침략에 맞서 연개소문의 강경한 지도노선은 안팎으로 강력한 통수력과 저항력의 구심점이 되어 강력한 힘을 발휘하였다. 645년 당태종(唐太宗)은 대군을 동원하고도 양만춘과 연개소문에게 치욕적인 참패를 당했으며 아들인 당고종(唐高宗)은 전면전을 피하고 국경을 넘나들며 국지전과 소모전을 펼쳐 고구려를 지치게 하는 전략을 택한다.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군의 계속된 침공과 신라군의 협공의 위기 속에서 주된 방어선인 수도인 평양성까지 밀린 상황에서도 그는 고구려의 최고집권자로서 저항을 주도하였다.

하지만 당나라의 계속된 침략에 맞서 승전을 거듭하던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666년 사망하자 그의 맏아들 남생(男生)이 그의 직을 계승하였고 남건(男建)·남산(男産) 등이 권력을 나누어 맡아 고구려가 제모습을 유지하는가 했으나 신라의 이간질 정책에 말려 형제간의 분쟁으로 내분이 심화되었으며 변경(邊境)을 순시하던 남생이 당에 망명하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淵淨土)는 12성(城)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하는 등 고구려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민심도 흉흉하게 되어 국력이 분산된 상태에서 668년(보장왕 27) 김인문(金仁問)의 27만 신라군과 이적(李勣)·설인귀(薛仁貴)의 당나라 군사 50만의 협공에 맞서 싸웠지만 중과부적으로 평양성이 함락되어 고구려는 멸망으로 치닫게 되었다.

 

고구려부흥운동 (高句麗復興運動)
고구려 멸망 후 보장왕은 당나라로 잡혀갔고 당나라로부터 ‘사평대상백원외동정(司平大常伯員外同正)’에 임명되었다. 당나라는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고 설인귀로 하여금 통치하게 하였고, 고구려의 영토를 9도독부(都督府) 42주(州) 100현(縣)나누어 실질적인 지배체제를 구축하려고 하였으며, 유력한 고구려인 2만 8200호를 당나라로 강제 이주시켰다.

당나라가 평양성을 함락시켰지만 고구려인들의 마음까지 지배할 수는 없었다. 당에 대항하여 점령되지 않은 11개 성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일어났으며, 669년 대형(大兄) 검모잠(劒牟岑)을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고구려 유민들을 규합하여 무장봉기를 일으키다 한성(漢城:황해도 재령)을 근거지로 하여 고구려 부흥운동을 전개하였으며 670년에는 당나라 세력을 배척하던 신라 출신인 안승(安勝)을 왕으로 추대하여 "고구려국"을 세웠다. 이로써 신라와의 연합도 꾀하였지만 하지만 당나라 고간(高侃)이 침입하자 부흥군의 내부에서는 의견의 대립으로 분열되어 안승은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망명하였다. 671년 2월에 안시성이 당나라군에 함락되고, 672년 당의 대대적인 공략에 밀린 고구려의 잔여병력은 대부분 신라에 투항하였다.

한편 당나라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평양에서 신성(新城)으로 옮기고 사실상 한반도 지배를 포기한 이듬해인 677년에는 보장왕을 요동지방 전체를 지배하는 요동도독조선군왕(遼東都督 朝鮮郡王)에 임명하였다. 이는 당나라가 한반도 포기에 따른 요동지역의 동요를 막기 위해 취한 조처였으나, 요동으로 돌아온 보장왕은 오히려 고구려유민을 규합하고 말갈과 연합하여 고구려의 독립을 도모하다 발각되어 681년 앙주(현 사천성 공주)로 유배되었으며 682년 사망하였다.


출처 : 고구려 역사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