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메시아의 사명(missio, 使命, 보냄)이 끝까지 수행될 수 있는 것도, 그 메시아께서 하느님의 백성과 인류 전체를 위해 성령을 충만히 받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란 글자 그대로의 뜻으로 볼 때 “그리스도”, 곧 “기름부음받은이”라는 말입니다. 구원의 역사에서는 이 말이 “성령으로 기름부음받은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구약성서 시대의 예언자적 전통 속에서는 이 말이 그런 의미로 통했습니다. 고르넬리오의 집에서 시몬 베드로가 한 말도 그런 배경을 가지고 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요한이 세례를 선포한 이래 갈릴래아에서 비롯하여 온 유다지방에 걸쳐서 일어났던 나자렛 예수에 관한 일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성령으로 축성해 주시고 그 힘으로 그분을 채워주셨습니다.”50) 베드로의 이 말씀들과 또 이와 비슷한 다른 말씀들51)로부터 우리는 더욱 거슬러 올라가 무엇보다도 이사야 예언자에게까지 되돌아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사야서를 흔히 “제5복음” 또는 “구약성서의 복음”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후에 신약의 계시가 예수님과 같은 인물로 해설하게 될, 어떤 신비스런 인물의 내림에 대해 예언하면서, 그의 인물과 사명을 하느님 영의 어떤 특별한 행위, 주님 영의 어떤 행위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난다.
주님의 영이 그 위에 내린다.
지혜와 슬기를 주는 영,
경륜과 용기를 주는 영,
주님을 알게 하고,
그를 두려워하게 하는 영이 내린다.
그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기쁨을 삼는다.”52)
이 대목은 구약성서의 성령론을 위해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은사적 숨결”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던 구약성서의 “영”이라는 개념과, 하나의 위격자, 선물, 위격자에게 주어지는 선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성령”이라는 개념 사이에 들어서서, 이 두 개념을 이어주는 역할을 이 성서 대목이 맡아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 가문에서(이새의 그루터기에서) 나타날 메시아는 주님의 영이 “그 위에 내릴” 바로 그이입니다. 이 단계에서 벌써 파라클리토의 계시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확실히 무리일 것입니다. 하지만, 신약에 와서 확연히 계시될 성삼 신비의 일치 속에서의 성령에 관한 계시가 장차 올 메시아의 모습을 은근히 비추는 이 대목에서 그 길이 트여가고 있음은 사실이라 하겠습니다.
16. 그 길이 바로 메시아이십니다. 구약에서는 ‘기름부음받은 일’이 영을 주는 일을 외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상징으로 쓰여졌습니다. 이에 비해, 메시아께서는(구약의 어떤 기름부음받은이보다도 더) 하느님 스스로 기름부으신 유일하고 위대한 기름부음받은이이십니다. 하느님의 영을 소유하고 계신 분이라는 뜻에서 그분이야말로 기름부음받은이이십니다. 그뿐 아니라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 영을 백성 전체에게 주는 일을 중개해 주는 분이십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다음 말씀에서 이 사실이 드러납니다.
“주 하느님의 영을 내려주시며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고
나를 보내시며 이르셨다.
억눌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찢긴 마음을 싸매 주고,
포로들에게 해방을 알려라.
옥에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주님께서 우리를 반겨주실 해,
우리 하느님께서 원수 갚으실 날이 이르렀다고 선포하여라.”53)
기름부음받은이는 또 “주님의 영과 함께” 보냄을 받습니다. “이제 주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과 함께 나를 보내셨다.”54)
이사야서에 의하면, 기름부음받은이, 주님의 영과 함께 보냄을 받은 이는, 또 하느님의 영이 그 위에 머무르는 주님의 선택된 종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믿어주는 자,
마음에 들어 뽑아 세운 나의 종이다.
나는 그 위에 나의 영을 주었다.”55)
다 아는 바와 같이, 이사야서에서는 주님의 종이 참된 고통의 사람으로 계시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죄를 위한 고통받는 메시아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56) 그와 동시에, 그는 온 인류에게 구원의 참된 열매를 가져다 줄 사명을 받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뭇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주리라. …….57) “그는 또 백성의 계약, 뭇민족의 빛”58)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땅 끝까지 나의 구원이 이르게 하기”59)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한가 하는 데 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영을 너에게 불어넣고, 나의 말을 너의 입에 담아준다.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히 너의 입과 너의 자손의 입과 대대로 이어질 자손들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60)
여기에서 인용한 예언서의 대목들은 복음 성서를 길잡이로 하여 이해하여야 합니다. 또 신약성서 쪽에서도 이 구약성서의 구절들로부터 대단히 귀중한 빛을 얻어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메시아를 성령 안에 오시는 분, 성령을 충만히 소유하시는 분으로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성령을 자기 안에 충만히 소유하시는 것은 동시에 다른 이들을 위해서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민족, 온 인류를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을 충만히 받으면 여러 가지 선물, 구원을 위한 재화들이 같이 따라옵니다. 이런 선물들과 재화들은 특히 가난한 이들, 고통받는 이들, 이 선물에 마음을 여는 이들, 흔히 자신의 삶에서 겪은 쓰라린 체험을 통해 그 마음이 열린 이들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신앙으로부터 나오는 어떤 내적 자세를 갖춘 이들에게 주어집니다.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할 때 거기에 있었던 “의롭고 신심 깊은 노인”, “성령이 그 위에 머물던” 시므온은, 이런 사실을 그 순간에 직관적으로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에게서 “만민에게 마련된 구원”을 보았는데, 다만 그것이 큰 고통, 예수님께서 당신의 어머니와 함께 겪지 않으면 안될 십자가의 고통과 같은 어려움을 통해서만 얻어진다는 사실을 미리 내다보았던 것입니다.61) “성령으로 잉태한”62) 동정 마리아께서는 당신의 마음속 깊이에서 메시아의 “신비들”에 대해 묵상할 때 이 모든 이치를 누구보다도 더욱 잘 깨달으셨습니다.63) 그 신비들에 자신이 깊이 연결되어 있었기에 그 깨달음은 한층 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17. 우리는 여기서 미래의 메시아 위에 “머물게 될” 그 “주님의 영”이 무엇보다도 그 주님의 종에게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을 강조해 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으로서는 스스로 존재하는 어떤 독립된 위격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주님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고 그분의 결정과 선택에 따라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의 관계 구절에서 빛을 받아, 주님의 종인 메시아의 구원 업적이 그를 통해 이루어지는 영의 작용임을 암암리에 비추기는 하지만, 구약성서 구절의 본래 문맥에서는 하느님 안에 서로 구분되는 주체(主體)나 위격이 있음을 신약성서에서 계시되고 성삼 신학에서 문제되는 식의 자존적 위격 개념과 같은 식으로 - 시사하는 요소는 아직 없습니다. 이사야서든 구약성서 전체로든 간에 성령의 위격성은 완전히 숨겨져 있었습니다. 유일한 하느님 계시에 있어서나 장차 오실 메시아에 관한 예언자들의 말에 있어서나 그 사실이 숨겨져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18.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메시아로서의 활동 벽두에 이사야의 말을 포함하는 이 말씀이 당신을 두고 한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 곁에서 목수인 요셉의 집에 30년 동안이나 사신 바로 그 나자렛 동네에서 그런 선언을 하고 나섰다는 사실은 의미있는 일입니다. 그분께서 회당에서 말씀하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분께서는 이사야서를 펴시고 다음의 말씀이 나오는 대목을 발견하셨습니다. “주님의 영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발라 축성하셨기 때문이다.” 이 대목을 읽으신 다음 그분께서는 회중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64) 이런 방식으로 그분께서는 당신께서 아버지의 “기름부음받은이”요, 메시아임을 고백하고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하느님 자신의 자기증여인 성령께서 머무르시는 바로 그 사람이며, 이 영을 충만히 소유한 사람, 영 안에서 하느님이 인류에게 자신을 주시는 그 “새로운 시작”을 도입시키는 그 장본인임을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19.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향인 나자렛에서는 메시아로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성령 안에서의 그분의 메시아적 사명은 그분의 공적 활동 시초에 이미 세례자 요한에 의해 백성들에게 계시되었습니다. 즈가리야와 엘리사벳의 아들인 요한은 요르단 강가에서 메시아의 내림을 알리며 참회의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이제 머지않아 성령과 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 오신다. 그분께서는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어서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65)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그리스도를 성령 안에서 “오시는” 분으로뿐 아니라 성령을 “지니시는” 분으로 선언합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예수님께서 더욱 잘 계시해 주실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에게서 미래에 관계되는 말들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가 하면 요르단 강변에서 펼친 그분의 가르침 속에서는 그 말들이 새로운 메시아적 실재에 대한 직접적인 도입의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예언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고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선구자였던 것입니다. 그가 선언하는 것은 모든 이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졌습니다. 나자렛 예수님 역시 참회의 세례를 받기 위해 요르단 강으로 오셨습니다. 그분께서 오시는 것을 보고 요한은 선포했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오신다.”66)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성령의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며,67) 이런 식으로 그는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음을 증언합니다. 그와 동시에 그는 나자렛 예수의 구속적 사명에 대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말한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은 이사야 예언자가 사용한 “주님의 종”이라는 표현에 못지않게 중요한 구속자의 정체 표현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당신 고향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으신 나자렛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변에서 세례자 요한의 증언에 의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메시아로 드러나시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기름부음받은이로 인정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증언은 세 공관 복음에 언급된 또 하나의 상급 증언에 의해 보강되었습니다. 다름아니라, 모든 사람이 세례를 받고,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은 후 기도를 하고 계실 때, “홀연히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그 위에 내려오셨다.”68) 그와 동시에 하늘에서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69)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성삼적 신현(聖三的 神顯)으로서 요르단 강에서의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영광받으심을 보여주는 증언이었습니다. 이 신현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확인해 줄 뿐 아니라, 메시아로서의 나자렛 예수님께서 지닌 더욱 깊은 차원의 진리를 열어 보여주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메시아께서는 아버지의 사랑받는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장엄한 서임(敍任)은 “주님의 종”의 메시아적 사명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르단 강에서의 신현 사건으로 우리는 메시아 위격의 신비 자체가 고양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영광을 받으신 것은 그분께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늘로부터 목소리는 “내 아들”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20. 나자렛 예수님의 활동은 모두 성령의 현존 안에서 진행되지만, 요르단 강의 신현은 그분의 신비를 순간적으로 밝혀주는 데 불과했습니다.70) 이 신비는 예수님 자신에 의해 계시될 것이었고, 그분께서 “하시는 일과 가르치심”71)을 통해서 조금씩 확인될 것이었습니다. 다락방에서 행하신 고별사에 이르기까지도, 같은 방향으로 가는 이 가르침과 메시아적 표지들 속에서, 우리는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계시 과정상 특별한 중요성을 띠는 사건들과 말씀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복음사가 루가는 전에도 예수님을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으로 또 “성령의 인도로 사막에 가셨던 분”으로 제시한 바 있지만72) 이제는 우리에게 또 다른 사실을 전해 줍니다. 스승께서 자기들에게 맡기셨던 사명을 수행하고 돌아온 72명의 제자들73)이 자기네 활동의 성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기뻐하고 있을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충동으로 기쁨에 마음이 설레여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74)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 때문에 기쁨을 느끼셨습니다. 그분께서 기뻐 용약하신 것은 당신 스스로 하느님께서 아버지 되심을 계시할 수 있는 능력을 받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께서 기뻐하신 것은, 마지막으로, 하느님께서 아버지이심이 특별히 “작은 사람들”, “어린이들”에게 잘 전달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사가는 이 모든 것을 “성령 안에서 기쁨에 마음이 설레이는 일”로 묘사했습니다.
기쁨에 그토록 마음이 설레이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주셨습니다. 아들이 누구인지는 아버지만이 아시고 또 아버지가 누구신지는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75)
21. 요르단 강에서 있었던 신현에서는 말하자면 “밖으로부터”, 위로부터 왔던 것이, 여기서는 “안으로부터” 곧 예수님의 존재의 가장 깊은 속에서부터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 안에 일치되어 있는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계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버지 되심과 자신의 아들 됨에 관해서만 언급하시고, 사랑이시며 아버지와 아들 간의 일치인 성령에 관해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분께서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자신에 대해서 하시는 말씀은 자기 안에 계신 성령의 충만에서부터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그 성령께서 그분의 마음을 채우시고 그분의 “자아”에까지 깊이 침투하시며, 그분의 행동 속 깊이 활력을 불어넣으시고 영감을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성령 안에서 기쁨에 마음 설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서 성령과 완전히 일치해 있음을 잘 의식하고 계신데, 그 일치가 “기쁨에 설레는 마음”으로 표현되고, 이 기쁨이 어떤 의미로는, 그분의 감추어진 출원(出源)을 “감지”할 수 있게 해줍니다. 거기서부터 사람의 아들, 그리스도-메시아 특유의 영광스런 현현과 기쁨의 표현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아들과 그리스도-메시아의 인간성은 하느님 아들의 위격에 속하고, 신성에서는 성령과 본질적으로 하나입니다.
나자렛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버지 되심을 고백함으로써 자기 자신, 신적 “자아”를 드러내십니다. 그분께서는 “같은 본질을 가진” 아들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만이 아들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고, 아들만이 아버지가 누구신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아들이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성령으로 사람이 되셨고, 마리아라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던 것입니다.
50) 사도 10,37-38.
51) 루가 4,16-21; 3,16; 4,14; 마르 1,10 참조.
52) 이사 11,1-3.
53) 이사 61,1-2.
54) 이사 48,16.
55) 이사 42,1.
56) 이사 53,5-6.8 참조.
57) 이사 42,1.
58) 이사 42,6.
59) 이사 49,6.
60) 이사 59,21.
61) 루가 2,25-35 참조.
62) 루가 1,35 참조.
63) 루가 2,19.51 참조.
64) 루가 4,16-21; 이사 61,1-2 참조.
65) 루가 3,16; 마태 3,11; 마르 1,7-8; 요한 1,33 참조.
66) 요한 1,29.
67) 요한 1,33-34 참조.
68) 루가 3,21-22; 마태 3,16; 마르 1,10 참조.
69) 마태 3,17.
70) 성 바실리오, De Spiritu Sancto, XVI, 39: PG 32,139 참조.
71) 사도 1,1.
72) 루가 4,1 참조.
73) 루가 10,17-20 참조.
74) 루가 10,21; 마태 11,25-26 참조.
75) 루가 10,22; 마태 11,2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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