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스크랩] 영종도에 살았던 우리나라 최초 천주교 영세자 이승훈의 셋째아들 이신규

김대철대철베드로 2015. 4. 26. 16:43
이신규 ◆
李身逵


   이신규(1794~1868).

 

순교자. 세례명 마티아. 이승훈(李承薰)의 셋째아들.

정약용(丁若鏞)의 생질이 된다.

 

아버지 이승훈이 사형당한 후 얼마동안 열심히 수계하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문재(文才)와 의술에 뛰어난 그는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용인(龍仁), 진천(鎭川) 등지로 피난하다가 그해 9월 체포되었으나

뛰어난 학문과 의술의 사회적 공헌을 인정받아서인지 또는 배교 때문인지 분명치 않으나 석방되었다

 

그 뒤  1840년 부터 인천(仁川) 앞바다에 있는 영종도(永宗島)로 가서 1846년 5월 까지 약 7 년간을 살았다.

 

1846년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체포되었을 때 관련이 되어 5월에 다시 체포되었다.

처음엔 용감히 신앙고백하였으나 결국 배교하고 1846년 8월 1일 석방되었다.

 

-

 

##  이신규의 아버지인 우리나라 최초영세자 이승훈이  1801년 신유박해 때 참수 순교직전의 시

 

'달은 비록 서산에 지더라도 하늘에 남아 있음'과 같이

남이 비록 나더러 배교했다 말하더라도 내 신앙은 천주 안에 그대로 남아 있고

 '물이 비록 못 위로 치솟아도 그 못 속에 온전함같이

' 내 목숨을 앗아 가도 내 신앙은 변함이 없다."


-

인천교구사와

영종의 1900년대  초기 천주교 신자촌이었던  송산과 잔다리,  돌박제, 동강마을을 토대로 사료와 노년층을 대상으로 당시 거주지를 알고자 하였으나 확인하기 어려웠슴.

1841년 배교후 영종도에 숨어 7년간 살았다고하며

1868년 병인박해시에  신규를 포함한 장손 재의,재겸이 순교당 함

 
 

 

 

(참고자료)

 

임진 병자란 후 만수동 샛골에 터전
인천의 종가 명가-11.평창 이씨(상)
 평창이씨는 인천시 남동구 만수동 샛골(鳥谷·현 만수주공 7·8단지 일대)에 동성촌락을 이루고 있었다. 한국인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이자 조선천주교회를 세운 이승훈(李昇薰·1756~1801)을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평창이씨는 경주이씨의 분파다. 시조는 여러 문헌에 광(匡)으로 나와 있는데, 그는 경주이씨의 중시조 소판공(蘇判公) 거명(居明)의 증손이며, 고려 태조 때 광록대부를 지낸 윤장(潤張)의 8세손으로 전해진다. 이 때문에 평창이씨는 광을 시조로 하는 파와 윤장을 시조로 하는 파로 양분되어 있다. 평창이씨의 중시조격 인물은 윤장의 8세손인 천기(天驥)로 고려 말에 원나라 제과에 급제,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지냈으며, 그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25명을 배출, 중추적 인물로는 천기의 증손인 영서(永瑞)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 예조정랑을 지냈는데, 특히 서예로 이름이 높았다. 영서의 아들 계남(季男)·계동(季仝) 형제가 뛰어나 계남은 연산군 때 이조판서에 이르렀고 중종반정 공신에 올랐으며, 계동 역시 연산군 때 병조판서를 거쳐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2만 718가구에 6만5천94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만수동의 평창이씨는 이조판서를 지낸 계남계로서 그 7대손인 태석(泰錫)이 샛골에 거주하며 문과급제를 하면서 기록이 나타난다. 평창이씨는 조선전기에 출사를 하면서 서울 인근에 근거를 두고 있었으나 연산군 이래 사화와 임진·병자 양란이후에는 대체로 향촌에 은거했다. 태석이 인천에 거주하게 된 것도 그 이전에 당쟁의 화를 피하여 인천에 내려온 때문이라 추정된다. 인천에 정착한 후 평창이씨가 정계진출의 길이 막혀있던 남인(南人)에 당색을 띠고 있었기에 은거하며 지내게 된다.
 그러나 17세기말부터 남인이 정계진출이 시작되면서 평창이씨도 적극적으로 출사의 길에 나서게 된다. 이승훈의 조부인 20대손 태석(1664년생)이 마침내 1693년 문과에 급제, 현감을 거쳐 성균관 직강(정5품)까지 역임하면서, 평창이씨 일족에게 출사의 길을 열어주게 되었다. 이태석은 세 아들을 두고 있었는데 이들도 모두 문과에 급제하는 영광을 누렸다. 맏아들 광식(光湜·1690년생)은 사헌부집의를 역임하였고, 둘째 광직(1692년생) 돈령부 동지사를, 셋째 광익(光瀷·1703년생)은 한성부좌윤에 올랐다.
 평창이씨의 가문에 꽂이 피던 영조 15년(1739) 그 22대손으로 태어난 사람이 바로 승훈의 아버지인 동욱(東郁)이다. 그는 태석의 둘째아들인 광직의 외아들로서 자는 유문(幼文), 호는 소암(蘇岩)이라 했다. 소암은 향리 샛골이 소래산(蘇來山)의 산자락에 위치한데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1766년 문과에 급제한 동욱은 참판과 의주부윤을 지냈으며, 글씨에 능해 남인의 거두인 체재공이 지은 영월 자류루의 상량문을 쓰기도 햇다.
 동욱은 승훈(昇薰)과 치훈(致薰) 두 아들을 두었다. 치훈이 문과에 급제하고, 승훈도 진사시에 급제한 후 평택현감을 시작으로 출세의 길을 걷는 등 인천의 평창이씨는 최대의 번성기를 맞았다. 곧 조선 숙종에서 영조대를 걸치는 평창이씨 3대 동안 5명의 문과급제자와 고급관료를 배출하면서 당당한 권세가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향리 인천에서의 지배적 권한 또한 절대적 위치를 점하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승훈 가문은 남인계열이었고 자연 그 학문적 계통과 정치적 입지 또한 남인과 운명을 같이했다. 혼인도 마찬가지였다. 이승훈의 어머니는 이가환의 누이동생이자 우리나라 실학의 선구자인 성호 이익(李瀷)의 증손녀였다. 또한 이승훈은 실학자 정약용의 누이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며 이벽과도 사돈관계를 맺게 되었다. 정약전, 약현, 약종, 약용 형제와 처남매부 사이가 된 것이다. 이들 모두가 성호 이익의 문인이자 그 학문적 영향을 받은 남인 계열의 가문이다.
 성호학파가 18세기 중엽을 거치면서 경학을 중시하는 우파와 양명학 및 천주학에 경도된 좌파로 구분되는데 평창이씨는 성호좌파에 속하게 된다. 그런데 같은 시기 샛골에서 서남으로 빤히 보이는 지척 도림동에는 성호 문인 가운데 종장의 위치를 점하던 소남(邵南) 윤동규(尹東奎·1695∼1773)가 퇴계와 성호를 이어 온 경학에 충실한 학문적 축적을 쌓아가고 있었다. 이처럼 18세기 후반 만수동의 평창이씨와 도림동의 파평윤씨는 같은 남인가문이자 성호 이익의 학문적 영향아래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학문 경향을 꽃 피웠던 것이다. 특히 평창이씨는 정계에 활발하게 진출하여 그 뜻을 펴고자 한데 반해 파평윤씨는 향리에 은거하면서 이병휴, 안정복 등 성호 우파계열의 학자와 학문적 교유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김주희 blog.itimes.co.kr/kimjuhee
종이신문정보 : 20051010

이승훈 일가 4대에 걸쳐 7명 순교
인천의 종가 명가-12.평창 이씨(하)
 참을 수 없는 박해의 시대를 살았던 이승훈의 직계 후손들은 태반이 천주신앙을 이어 받았고 그로 인해 비참한 생을 끝마쳐야 했다. 물론 그의 후손들 가운데 끝내 천주교를 외면한 사람도 있었지만, 사류(邪類)의 후손이라는 사회적 핍박과 고난을 감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승훈이 나이 20세 되던 1776년 경기도 마재에 사는 유명한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누이에게 장가를 들어 세 아들(택규宅逵,국규 國逵, 신규身逵)과 딸 하나를 두었다.
그의 아내가 열렬한 신앙의 고백자인 순교자 정약종의 누이였으므로 천주교를 믿었으리라 짐작되나 모두 무사했다. 1801년 이승훈이 순교할 때 세 아들은 다행히 세상 물정을 모를 어린 나이였다.
 그러나 이승훈의 후손들은 성장기에 의식적으로 천주신앙을 멀리했지만 중년에 들어 입교하게 된다. 내심으로는 천주 신앙의 신심이 잠재해 있었던 것이다.
중년에 들어 세상 물정에 눈을 뜨게 되자 위험을 무릎 쓰고 신앙을 실천하게 된다.
 
셋째아들 신규와 그의 아들 재겸, 그리고 장손 재의가 모두 그러한 경우다.
 조선 천주교사상 최대의 희생자를 내었던 1868년 병인년 대박해시기 이승훈의 셋째아들 신규를 비롯해 장손 재의(在誼, 61), 재겸(在謙, 40)과 그의 처 정씨(鄭氏), 그리고 증손인 연구(蓮龜), 균구(筠龜) 형제가 순교했으니 1801년 이승훈의 순교로부터 1871년에 이르는 70년 사이에 4대에 걸쳐 7명의 순교자를 냈다.
 1794년 태어난 이신규 의 유년시절은 불우했다. 8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가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참형을 당하는 고초를 겪었으므로 가문을 몰락으로 이끈 천주신앙을 무시하고 멀리했다. 그러나 1816년경부터 외종제인 정하상(丁夏祥)의 집을 왕래하면서 점차 입신케 된다. 당시 정하상은 침체한 조선 천주교를 부흥시키기 위해 헌신적 활동을 하던 지도자였다. 그의 노력으로 마침내 1831년 조선교구가 설치됐고 1835년 모방(Moubant), 샤스당(Chastan), 임베르(Imbert) 등 조선주교로 입국한 프랑스 성직자와 관계를 맺으면서 천주신앙에 열을 돋우게 됐다. 1839년 기해박해로 인해 춘천에 피신해 있던 이신목은 체포돼 모진 고문과 회유를 이겨내지 못하고 배교를 약속하면서 1841년 석방된다.

 그러나 영종도에 숨어살면서 천주교 서적을 버리지 않았고 때때로 상경하여 교인들과 교유하는 등 신앙을 잃지 않았다.
 
1846년 김대건 신부와 함께 또다시 체포됐으나 역시 신앙을 포기한다고 하여 생을 부지하게 된다.
지친 심신을 겨우 추스린 이신목은 이후 인천 제물포에서 약국을 경영하면서 생계를 이어가는 한편 돌보는 환자들에게 또 다시 천주신앙을 포교하곤 했다.
1856년 그의 생애에 일대 전기가 찾아왔다.
철종을 옹립한 대왕대비(안동김씨)의 치료를 맡게 되고 천행으로 효험을 보자 그 공을 인정받아 참봉의 벼슬과 함께 아들 재겸도 진사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때 신목은 아버지 승훈이 대역죄를 씻어 줄 것을 청원하여 허락을 받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1868년 4월 조선과의 통상을 요구하던 독일인 오페르트(Oppert)가 흥선 대원군의 아버진인 남연군의 분묘를 도굴하는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도에 대한 대학살이 자행됐다. 특히 무덤이 있던 충청도 덕산 인근의 경기 해안 일대의 천주교도가 오페르트와 내통했다 여겨 대대적인 색출이 진행됐다.
 제물포에 살던 이신목과 남양(경기 화성시)에 있던 장손 재의가 이때 체포돼 모두 서소문 밖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신목의 아들 재겸은 평안도 운산으로 유배됐으나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이승훈의 손부이며 이신목의 자부 정씨는 1871년 5월21일 인천 제물포에서 참형, 군문(軍門)에 효수(梟首)됐고, 그 보다 앞선 5월3일에는 만수동 샛골 향리를 지키고 있던 이승훈의 증손인 연구, 균구 두 형제가 체포돼 같은 장소에서 순교했다. 모두 천주교도의 처자와 친척을 연좌죄로 처형한 것이다.
 평창이씨는 만수동 샛골의 향리와 선영을 지키던 장손인 재의와 그의 두 아들이 처형되면서 멸문의 지경에 이른다. 남아있던 가족은 모두 남의 노비로 전락했고, 인천과 서울에 산재한 재산 또한 몰수됐다. 1886년 조선정부가 프랑스와 수교를 맺고 천주교 신앙을 허용하면서 천주교로 죄를 지어 귀양을 갔거나, 노비가 되었던 이들을 모두 석방됐다. 그럼에도 만수동 평창이씨는 과거의 영광을 찾기는 어려웠다. 살아 있는 자손은 가난과 병마로 고통을 받았고, 재산은 되돌려 받지 못했으며 그 나마도 소작인과 부리던 노비들이 빼돌린 뒤였다.
 이승훈의 순교와 대원군 시대의 극렬하던 박해로 거의 멸족이 된 것으로 여겨지던 만수동 평창이씨는 향리 샛골이 시가지로 변하기 전까지 선영을 지키며 살아왔다.
 
 이승훈의 장손인 이재의의 아들로서는 연구와 균구 두 형제만 처형되고 학호(鶴浩)가 살아서 승지 벼슬까지 지냈고, 이승훈의 셋째아들 신목의 아들로서 처형된 재경이외에 양자 재만(在晩)이 연호(連浩), 구호(龜浩), 양호(養浩)세 아들을 두어 이들로부터 자손이 다시 일어났다. 연호와 양호가 요셉, 구호가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지닌 천주교 신자였으며 처자와 후손 대개가 신앙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장손 집안이라 할 학호가 그 손을 제대로 잇지 못하게 되자, 연호의 가문이 집안을 맡게 됐다. 그 손자인 베드로 병규(炳奎)가 선균(善均)과 요셉 창균(昌均) 및 정옥(貞玉), 정선(貞善) 등 8남매를 두었다. 특히 1957년 천주교 사 연구의 개척자라 할 유홍렬 박사를 도와 베드로 이승훈의 묘소를 성역화 하고 천진암으로 이장을 주도하는 등 장손의 도리를 다했다.
 오늘날 만수동 샛골과 선영이 있던 능밑 주변의 아늑한 구릉 그리고 쇠판이에서 나와 장수천으로 흘러드는 개울 주변에 펼쳐진 평창이씨 가문의 문전옥답은 어디에도 흔적이 없다. 수십 기를 헤아리던 선영의 분묘 또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사라진지 오래다. 다행히 가묘이지만 이승훈의 분묘과 두 아들 택규, 신규의 분묘가 반짓골 개북(혹은 초곡산)의 산자락에서 고향 샛골을 내려보고 자리해 있다. 나머지 묘소들은 장수천이 바다와 만나는 소래포구에서 바라다 보이는 서해안 고속도로 군자톨게이트 주변으로 옮겼다.
  조선후기 숙종∼영조대를 이어 3대가 문과에 급제하면서 고위 관직자를 배출하며 당당한 가세를 이어가던 인천의 평창이씨는 1801년 이승훈의 천주신앙으로 인해 대역죄를 입고 처형됨으로써 그의 후손들은 처절한 생을 살아야 했다. 후손들은 서울 서소문에서, 인천 제물포 나룻터에서 처형되거나, 평안도 산골짝 유배지에서 고문의 고통끝에 숨져갔다. 그러나 주자성리학의 폐쇄된 사고방식에 젖어있던 조선사회에서 인천의 평창이씨 가문의 후손들은 선조 이승훈으로 말미암아 겪어야 했던 사회적 핍박과 인간적 갈등을 이겨내고 천주신앙에 도달, 나름대로 한국 천주교회발전에 기여했다. /김주희기자 blog.itimes.co.kr/kimjuhee
종이신문정보 : 051017 인터넷출고시간 : 2005-10-16 오후

출처 : 허허벌판
글쓴이 : beolpan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