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의미를 묵상하는 위령성월의 끝자락이자 교회력으로는 연중 마지막 주일이다. 특별히 교회는 연중 마지막 주일을 특별히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지낸다. 이날 신자들은 역사의 마지막 곧 종말에 왕으로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지금 이 세상에서부터 그리스도 왕국의 건설을 위해 힘껏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 죽음과 죽음 이후의 세계, 그리고 종말에 대한 교회 가르침을 보편교회 교리서인 「가톨릭교회교리서」(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를 바탕으로 정리해 본다.
**죽음과 부활 죽음은 생명이 있는 것은 무엇이나 반드시 겪어야 할 운명이다. 사람 또한 예외일 수 없다. 하지만 죽음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이 죽음 때문에 사람들은 인생의 허무함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죽음은 모든 것을 무(無)로 만들어 버리기에 삶 자체가 허무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자들은 죽음을 넘어선 희망을 이야기한다. 죽음은 그 자체로 끝이 아니요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의 삶,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에 대한 가장 확실한 보증이다.
*육신 부활 신자들은 사도신경을 바칠 때마다 '육신의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육신 부활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영혼과 육신이 결합된 존재이듯이, 육신 부활이란 죽은 다음에 우리가 온전한 인간으로 부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을 지금과 똑같은 몸으로, 그래서 죽은 시체가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그래서 성서는 이렇게 말한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떤 몸으로 살아나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심은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심는 것은 장차 이루어질 그 몸이 아니라 밀이든 다른 곡식이든 다만 그 씨앗을 심는 것입니다… 죽는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을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1 고린 15, 35-37. 42). 결국 육신 부활이란 우리가 죽은 다음에 온전한 인간, 참 인간으로 부활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지 지금과 같은 몸 그대로 부활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죽음 이후의 세계 교회는 인간은 죽으면 누구나 하느님 앞에서 심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심판에는 죽은 다음에 하느님 앞에 설 때 개인적으로 받는 사심판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재림하실 마지막 날 곧 종말에 산 사람과 죽은 사람 모두가 받게 될 공심판(최후심판)이 있다. 죽은 다음에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심판(사심판)을 받게 되며 그 심판 결과에 따라 천국의 영원한 생명에 들거나 지옥의 영원한 벌을 받거나 연옥에서 정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천국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간직하고 죽은 사람 그리고 연옥에서 완전한 정화 과정을 거친 사람이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이 상태를 천국이라고 한다. 천국은 하늘 저편 우주 공간의 어떤 장소가 아니다. 천국에서 산다는 것은 사랑 자체이신 삼위일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 자체이다. 이 천국은 인간이 바라는 궁극적 목적(하느님과의 일치, 친교의 삶)이 실현된 상태이며, 가장 행복한 상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와 관련, "천국은 구름 위의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성삼위(聖三位)와 하나되는 인격적 관계이며 현세에서도 성찬례와 자선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체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성체성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일치할 때 또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할 때 맛보는 행복감 등을 통해서 천국의 기쁨을 부분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연옥 하느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죽었으나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들이 완전히 정화되기 위해 거치는 정화 상태를 연옥이라고 한다. 연옥 역시 특정한 장소적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연옥에 대한 교회 가르침은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2 마카 12,45)는 구약성서 마카베오서에 기초를 두고 있다. 우리가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를 바치는 이유도 이 연옥 교리에 근거하고 있다. 연옥이 없고 천국과 지옥뿐이라면 구태여 죽은 이를 위해 기도를 바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연옥은 완성되지 않고 사랑 속에서 성숙되지 않은 인간이 거룩하고 무한하며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과정에서 치르는 정화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지옥 지옥은 하느님을 거부한 대죄 중에 죽은 사람이 하느님과 단절된 상태에서 겪는 고통 상태를 말한다. 지옥 역시 천국이나 연옥처럼 특정 장소적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죽을 죄를 짓고도 뉘우치기는커녕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은 곧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 함께 하지 않겠다고 자유로이 선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옥은 하느님과 또 하늘의 성인들과 이루는 친교를 스스로 결정적으로 거부한 상태다.
스스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거부한 사람이 겪는 고통 상태는 전통적으로 지옥불의 고통으로 묘사돼 왔다. 하느님을 스스로 멀리한 대가가 그만큼 고통스럽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천국의 기쁨을 이 현세 생활에서도 부분적으로 맛볼 수 있는 것처럼 지옥의 고통도 부분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황, 죽음과도 같은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했을 때 '생지옥 같다'고 표현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사랑을 거부한 채 살아가는 사람은 그 자체로 이미 지옥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옥에 대한 교회 가르침은 하느님이 사람을 지옥에 처할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분임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지옥은 하느님이 내리시는 벌이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 사랑을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자초한 대가다. 따라서 지옥에 대한 교리는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자유의지를 책임감있게 올바로 사용하라는 호소이자 경고이기도 하다.
**공심판(최후심판) 교회는 성서와 전통에 근거해서 세상 종말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공심판(최후심판)이 있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성서가 전하는 최후심판 과정에 따르면, 최후 심판에 앞서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죽은 모든 이가 부활하며 △그리스도께서는 천사들을 거느리고 오실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을 불러놓고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그들을 갈라 놓으면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천국)에 들고 악인들은 영원히 벌받는 곳(지옥)으로 쫓겨간다.
최후심판은 단순한 선과 악의 판결이 아니다. 인류 역사에서는 때로는 선이 패배를 하고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비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의의 하느님, 선의 하느님이 어디계시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그러나 최후심판은 사람들이 저지른 모든 불의에 대해 하느님 정의가 승리한다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드러낼 것이다.
최후심판에 대한 가르침은 한편으로는 아직 심판의 때가 이르지 않은 지금 회개하라고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하시는 호소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을 믿고 바라며 하느님 나라를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영광스럽게 오시리라는 희망을 북돋아준다.
**종말 그렇다면 최후심판, 즉 종말은 언제 올 것인가. 사람들은 종말의 때가 언제일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성서와 교회 가르침과 맞지 않는 그릇된 것이다. 종말의 시간과 날짜는 하느님만이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종말은 인류 역사의 비극적 끝이 아니라 인류 역사의 종국적 완성, 곧 하느님 나라의 완전한 도래임을 교회는 강조한다. 종말에 나타나는 "새 하늘과 새 땅"(2베드 3,13)은 창조 때부터 뜻하신 하느님 계획이 결정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그때는 하느님께서 원하신 인류의 궁극적 일치가 실현되는 때이며, 인류 역사가 완성되는 때다.
그러나 이 새 하늘 새 땅 곧 종말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에 대한 신앙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을 도피하거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더 낫게 가꾸려는 관심을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고 교회는 강조한다. 비록 현세 진보를 하느님 나라 발전과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현세 진보가 인간 사회의 더 나은 발전에 이바지한다면 그것은 하느님 나라에도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말 신앙은 신자들에게 매일매일을 충실히 살면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깨어 준비하도록 해준다. 이것이 사이비 종말론자들의 주장과 그리스도교적 종말 신앙을 구별해 주는 기준이 될 것이다.
정리=리길재 기자teotokos@pbc.co.kr
평화신문 기자 pb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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