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주시는 주님(Dominum et Vivificantem) 제2-2부
33. 우리가 시작에 관한 창세기의 증언에서 발견하는 것은 죄의 정체에 관한 것입니다. 125)하느님의 계시된 말씀에 따르면, 다른 모든 죄악의 기원과 뿌리는 죄입니다. 우리는 인류의 역사와 또 구원의 경륜 전체 안에서 죄의 원초적 실재에 부닥치게 됩니다. 우리는 악의 신비가 이 죄로부터 연유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충실성의 신비가 지니는 구속 능력이 특별히 돋보이고 뚜렷이 나타나는 것은, 역시 그것을 죄에 비추어볼 때라는 점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성 바오로께서 첫 아담의 “불순종”에 대응하여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의 “순종”을 대치시켜 놓은 것도 그런 뜻에서였습니다. “죽음에까지 이르는 순종”126)을 그리스도께서는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한처음에 관한 증언에 따르면, 원초적 실재 그대로의 죄는 인간의 의지 - 그리고 양심 - 안에서 “불순종”, 곧 하느님의 의지를 거슬러 인간이 자기의 의지를 내세우는 일로 이루어집니다. 이 원초적 불순종은 하나의 거절 행위를 전제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말씀 속에 들어있는 진리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을 전제합니다. 이 말은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이었으며”, “세상이 그를 통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분 없이 “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 말씀이십니다.127) 그는 모든 법의 원천인 영원한 법으로서 세계와 특히 인간의 행위를 관장하는 그런 말씀이십니다. 수난 전날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죄에 대해 말씀하실 때, 이 슬픔에 가득 찬 말씀 속에는 창조의 신비 안에 원초적 형태로 희미하게 들어있는 죄를 멀리서나마 염두에 두셨던 기미가 엿보입니다. 실상 말씀하시는 분께서는 사람의 아들이실 뿐만 아니고,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시기도 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 곧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왕권과 주권과 세력의 여러 천사들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모두 그분을 통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 또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128) 이 진리에 비추어볼 때, 우리는 시작의 신비 안에서 “불순종”이, 같은 “불신앙” - 파스카 신비에 직면해서 맞닥뜨리게 될 “그들은 믿지 않았다.”와 같은 반응을 전제하고 있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말한 대로, 문제는 아버지의 말씀 안에 들어있는 진리를 거절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로부터 멀어져 나가는 태도에 있는 것입니다. 거절이 실제로는 하나의 “불순종”으로, “거짓말의 아비”129)로부터 나오는 유혹에 떨어져 수행한 어떤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인간적 죄의 근원에는 아버지의 말씀에 들어있는 진리를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행위로서의 거짓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창조주의 사랑에 찬 전능은 아버지의 이 말씀으로 표현됩니다. 그것은 “아버지이시며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전능이며 동시에 사랑입니다.
34. 창조의 장면을 서술하는 성서의 말씀 중에 나타나는 “물 위에 떠돌던”130) 하느님의 영은 “하느님의 깊은 속을 헤아리는 영”을 가리킵니다. 그분께서는 창조의 신비 안에서 아버지와 말씀-아들의 깊은 속을 헤아리십니다. 그분께서는 아버지와 아들 상호간의 사랑 - 거기서 창조물이 나왔다 - 을 증언하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고, 자기 스스로가 그 사랑이시기도 합니다. 사랑으로서의 그분은 창조되지 않은 영원한 선물이십니다. 그분 안에 피조물에게 전달되는 모든 선물의 원천과 시작이 들어있습니다. 창세기를 비롯하여 모든 계시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시작에 관한 증언은 이 점에 관해서 명백하고 변하지 않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창조한다 함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부터 존재로 불러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보이는 세상이 사람을 위해 창조되었다면, 이 세상은 사람에게 주어진 것입니다.131) 그와 동시에 인간은 자기 인간성 안에 특별히 “하느님의 모습과 닮음”을 선물로 받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 본성이 그 본질적 구성 요인으로서 이성과 자유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만을 뜻하지 않고, 처음부터 인간은 하느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났다는 것도 의미합니다. 인간은 하느님과 나와 너의 관계를 유지하고, 따라서 관계(계약)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자기 자신을 건네주심으로써 관계는 이루어졌습니다. 결국, 하느님의 “모습과 닮음”을 배경으로 하여 “성령의 선물”은 우정으로의 초대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우정 안에서 하느님의 초월적 “깊은 속”은, 말하자면, 인간이 거기 참여할 수 있도록 열립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의하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골로 1,15; 1디모 1,17 참조)께서는 당신의 무한한 사랑으로써 친구를 대하시듯이 인간에게 말씀하시고(출애 33,11; 요한 15,14-15 참조), 인간과 사귀시며(바룩 3,38 참조), 당신과 공동체를 이루도록 인간을 부르시고 받아들이십니다.”132)
35. 따라서, “모든 것을 헤아리시고 하느님의 깊은 속까지 다 아시는” 성령께서는 “인간에 관한 것”을 처음부터 모두 아십니다.133)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분만이 홀로 처음부터 있었던 죄를 완전히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죄는 다른 모든 죄악의 뿌리이며 지상에 사는 인간이 나타내는 모든 패덕의 근원 - 그것은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 입니다. 진리의 영은, 이미 “심판을 받은”134) “거짓말의 아비”가 인간의 의지 속에 일으켜놓은 죄악의 원초적 실재를 잘 압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이 “심판”과의 관계를 고려한 죄에 관해서 세상의 유죄성을 들어 밝히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가운데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순종”135)으로 계시된 “정의”를 향해 끊임없이 사람을 이끄십니다.
인류의 기원에 이미 자리잡고 있는 죄를 확실히 들어 밝힐 수 있는 분은 성령밖에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시며 선물이신 그분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 인간의 기원에 도사리고 있는 죄는 거짓말과, 세상 및 인간의 시작을 결정한 선물과 사랑을 거부한 데에 있는 것입니다.
36. 창세기 안에서 발견되는 첫 번째(이면서 가장 갖추어진) 서술 다음으로, 성서 전체와 전통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시작에 관한 증언에 따르면, 원초적 형태 그대로의 죄는 “불순종”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그것은 다시 하느님께서 명하신 금령(禁令)을 어긴 행위로 나타납니다.136) 그러나 관계 구절의 문맥을 모두 살펴보면, 이 불순종의 뿌리는 인간이 처한 상황 전체를 심층 분석함으로써 찾아야 한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납니다. 인간 존재 - 남자와 여자 - 는 존재로 불린 하나의 피조물입니다. 이성과 자유의 현상으로 확인되는 “하느님의 모습”은 한 위격자로서의 인간 주체가 지니는 위대성과 존엄성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이 위격적 주체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피조물이고, 따라서 그 존재나 본질에서 창조주께 의존하고 있는 처지입니다. 창세기에 따르면 “선과 악을 아는 나무”가 인간에게 피조물로서의 넘을 수 없는 “한계”를 끊임없이 깨우쳐주고 그것을 표현하는 기능을 했어야 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내리신 금령도 이런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창조주께서는 남녀 인간에게 선과 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명합니다. 성서의 관계 구절이 전해 주는 표현에 따르면, 부추기는 말 곧 유혹의 말이 이 금령을 어기도록 충동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한계”를 넘어서도록 부추기는 것입니다. “그 나무 열매를 따먹는 날에는, 너희의 눈이 밝아져, 너희는 선과 악을 아는 신들처럼 되리라.”137) “불순종”이란, 피조물인 인간의 의지와 자유로써 범해서는 안될 이 한계를 뛰어넘음을 뜻합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는 실제로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계 안에서 윤리 질서의 유일하고 결정적인 원천이십니다. 인간이 좋고 나쁜 것을 제 스스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창조된 세계 안에서 하느님만이 선악 결정에서 첫 번째이며 최상의 원천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아버지와 본질을 같이하시는 영원한 아들, 말씀의 반영으로서의 존재의 내밀한 진리에 입각해서 그런 결정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된 인간에게 성령께서는 양심을 선물로 주시어, 이 양심을 통해, 모습이 그 원형을 충실히 반영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이 원형은 동시에 지혜이시요 영원한 법으로서 인간과 세상 안에 깃들여 있는 윤리 질서의 원천이신 것입니다. 죄의 원초적 요소로서의 “불순종”은 이 원천을 거부하는 행위를 뜻하는 바, 이는 사람이 제 스스로 선악 결정의 독자적이고 유일 원천이 되고 싶어하는 심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느님의 깊은 속을 …… 헤아리시는” 성령, 그러면서도 동시에 인간 양심의 빛이요 윤리 질서의 원천이 되시는 그분께서는 인류의 시작에 관한 신비 안에 깃들여 있는 죄의 본질을 정확하게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골고타에서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관련시켜 “세상이 그것을 깨닫도록 하는 일”을 계속하십니다.
37. 시작에 관한 증언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그 창조 행위를 통해서 자신을 사랑으로서의 전능자로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분께서는, 자기 창조주의 “모습과 닮은 이”로서의 인간이 그 진리와 사랑에 참여하도록 불리었음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 참여란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과 일치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138) 그러나 인간은 “거짓말의 아비”에 속아 이 참여로부터 물러섰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로 물러선 것이겠습니까? 물론 순수한 영체(靈體)나 사탄의 경우처럼 완전한 정도로 물러난 것은 아닙니다. 인간 정신은 거기까지 이를 능력이 없습니다.139) 창세기의 서술에서 우리는 두 가지 경우에 발견되는 정도의 차이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처음부터 죄지은 자”(다시 말해서 죄 안에 머물러 사는 자),140) 그래서 이미 “심판을 받은 자”141)가 지니고 있는 “악의 숨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다음에는 인간 측의 불순종이라는 악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경우에서 죄의 정도는 큰 것입니다.
하지만, 이 불순종은 언제나 인간이 하느님께 등을 돌리는 일을 의미하며 어떤 뜻에서 인간적 자유를 그분과의 관계로부터 차단시키고 닫아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순종이란 또 이 자유를 - 앎과 인간적 의지의 - “거짓말의 아비”에게 열어놓는 일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의식적인 선택 행위는 단순한 “불순종”만이 아니고, 맨처음 죄로 이끌던 충동 안에 들어있던 그 동기에 가담한다고 하는 면도 같이 내포합니다. 이 동기는 인간의 지상 역사 전체에 걸쳐 언제나 새로운 형태로 나타납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그 열매를 먹는 날 눈이 열려, 너희가 선악을 아는 신들과 같이 되리라는 것을 아신다.”우리는 여기서 “반(反) 말씀” 즉 “반(反) 진리”를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진리는 왜곡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 존재와 자유의 넘지 못할 한계는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반(反) 진리”가 가능하게 된 것은, 그와 동시에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가 하는 데 대한 진리가 완전히 “왜곡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의 의식 속에서 창조주 하느님께서 의심의 대상이 되고, 나아가서는 비난의 표적이 된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비뚤어진 “의심의 명수”가 나타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창조 사업을 통해서, 스스로 흘러 넘치는 선으로서, 창조적 사랑으로서 자신을 드러내 보이셨는데, 그 의심의 명수는 이 선 자체이신 분, 절대선(絶對善)을 “왜곡시키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스스로 선물이시며 모든 너그러움의 원천이신 분, “하느님의 깊은 속을 헤아리시는” 분,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이신 분으로서의 성령이 아니라면, 누가 “죄를 온전히 들어 밝힐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인간의 원천적 불순종에 깔린 동기를 누가 파헤쳐 밝힐 수 있겠습니까?
38. 실제로, 창조물과 거기에 깊이 관련된 구원경륜이 보여주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암흑의 영142)은 하느님을 당신 피조물의 원수로, 무엇보다도 인간의 원수로, 인간성을 위해서는 위험과 위협의 원천일 뿐인 것으로 제시하고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탄은 인간의 마음 안에 하느님을 반대하는 인자(因子)를 심어, 그분을 아버지로 보는 대신 “처음부터” 인간의 원수로 보게 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원수가 되는 방향으로 충동질을 당하는 것입니다.
죄를 그 원초적 차원에서 분석할 때, 인류의 역사가 진행되는 전기간 동안 인간이 하느님을 거부하게 하고 결국 그분을 증오하기까지에 이르도록 하는 “거짓말의 아비”로부터의 충동이 계속되어 왔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표현에 따르면, “하느님을 경멸하기까지에 이르는 자기애”가 있는 것입니다.143)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께서 자기를 제한하시는 분인 것처럼 생각하고, 자기 자유의 원천이며 선의 충만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무신론적 이데올로기들이 나타나, 종교는 근본적으로 인간을 “소외”로 이끌 뿐이라는 전제 하에, 그것을 말살시키려 드는 근대에 와서 우리는 이 사실을 다시 한번 절감합니다. 이런 사조에 따르면, 사람이 하느님의 관념을 받아들인 다음, 인간에게, 전적으로 인간에게 속한 것을 그 신에게 귀속시킬 때, 인간성 자체가 박탈되는 것으로들 생각합니다. 이런 사조로부터, 하느님을 거부하는 일이 그분의 “죽음”을 선언하는 데에까지 이르는 사상과 역사적 및 사회적 처신 방식이 도출되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는 개념에 있어서나 말마디에 있어서나 순전한 어불성설에 불과합니다. “하느님의 죽음”을 주장하는 이데올로기는 오히려 인간을 위협하는 것입니다. 이에 관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지상 현실들의 자주성”을 논의하는 기회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창조주 없이 피조물이란 허무로 돌아갈 수밖에 없고 …… 하느님을 잊어버릴 때, 피조물 자체도 이해할 수 없게 되고 만다.”144) “하느님의 죽음”의 이데올로기는 자기가 산출하는 결과를 통해,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인간 죽음”의 이데올로기일 뿐임을 쉽게 보여줍니다.
39. 예수님께서는 다락방의 고별사에서, 하느님의 깊은 속을 헤아리시는 영을 파라클리토라고 부르셨습니다. 실제로, 성령께서는 처음부터 언제나 “세상의 죄를 들어 밝혀주시리라.”는 “간청의 대상이 되어 오셨습니다.”145) 그분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가장 결정적인 방식으로 간청을 받으셨습니다. 죄를 들어 밝힌다는 말은 죄가 지니고 있는 악을 보여준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다시 악의 신비를 계시해 준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깊은 속을 헤아리지 않고서는” 죄가 지니고 있는 악의 참혹한 실체를 파악하기는 불가능합니다. 맨 처음부터, 세상에 있는 죄의 어두운 신비는 인간 자유의 창조주를 염두에 두고서만 밝혀지는 것이었습니다. 죄는 피조물인 인간이 하느님의 의지, 하느님의 구원적 의지를 거슬러서 하는 의지적 행위로 밝혀졌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죄는 이제 결정적으로 “심판을 받은” 거짓말을 근거로 하여 진리에 반대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바로 이 거짓말이 창조적 사랑과 구원자 자신을 늘 비난하고 언제나 의심하도록 유도해 온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거짓말의 아비”를 추종하여 생명의 아버지와 진리의 영을 배척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를 들어 밝힌다.”는 말이 고통을 계시한다는 뜻도 같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성서가 의인법적으로 생각하여 죄가 “하느님의 깊은 속”에 끼친 것으로 묘사하는, 어떤 의미로는 성삼의 마음속 깊이에 있는 그 형용할 길 없는 고통을 계시한다는 뜻도 같이 가지고 있지 않겠는가 말입니다. 교회는 계시로부터 빛을 받아서, 죄란 하느님께 끼쳐드린 모욕이라고 믿고 선언합니다.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의 헤아릴 길 없는 깊이 안에서, 이 “모욕”이나 사랑이시며 선물이신 성령을 거부하는 일을 수용할 만한 구석이 정말 있는 것이겠습니까? 필연적으로 대단히 완전한 존재라고 규정되는 하느님 개념 속에는 어떤 모자람이나 상처로부터 나오는 고통을 일체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깊은 속” 안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있어서, 인간의 죄 앞에서는 그것이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성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사람을 만든 것을 후회한다.”146) “주님께서는 세상이 사람의 죄악으로 가득 차고 사람마다 못된 생각만 하는 것을 보시고, 왜 사람을 만들었던가 싶으시어 마음이 아프셨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다. …… ‘나는 사람을 만든 것을 후회한다.’”147) 그러나 성서는 훨씬 자주, 인간의 고통을 나누시듯이 그에게 연민을 느끼시는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결국, 아버지의 이 헤아릴 수 없고 측량할 길 없는 “고통”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놀라운 구속적 사랑의 경륜이 탄생하도록 촉진했습니다. 그리하여 충실성의 신비를 통해 인간 역사 안에서 사랑이 죄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이 드러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결국, “선물”이 승리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죄를 들어 밝히시는” 분이라고 표현된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십니다. 또 이 사랑으로서 그분은 성삼의 선물이며, 한편으로는 하느님께서 피조물들에게 내리시는 사랑의 원천이시기도 합니다. 교부들과 신학자들의 전통 속에서, 구약과 신약의 정신을 따라, 하느님께 속하는 자비심이, 성령 안에서 하나의 위격체로 나타나고 초월적 방식으로 실현되어 있다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자비심은 이웃이 당하고 있는 불쌍한 처지를 같이 고통스러워 하고 함께 느끼는 태도를 포함합니다. 하느님에게, 사랑이신 성령께서는 인간의 죄를 생각할 때 그것이 구원적 사랑을 더욱 풍성히 베풀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하는 일치 속에서, 성령께서는 구원경륜을 일으키시어 인간의 역사를 구속의 선물들로 채워주십니다. 죄가 사랑을 거부함으로써 인간의 “고통”을 낳게 했고 그것이 어떤 방식으론가 전 창조계에까지 확산되었는데,148) 성령께서 인간과 우주의 고통 안으로 들어오시어 사랑을 새로이 쏟아 베푸심으로써 세상을 속량(贖良)하십니다. 구속자이신 예수님의 인간성 안에 하느님의 “고통”이 구체화했는데, 바로 그분의 입에는 자비 가득한 영원한 사랑을 표현하는 말 한마디가 자주 올려지곤 했습니다. “참 불쌍하다”(Misereor).149) 이처럼, 성령께 “죄를 들어 밝힌다.”는 일은 “헛된 일에 묶여있는” 창조계와 특히 인간의 가장 깊은 양심 앞에서, 하느님의 어린양에 의해 죄는 정복되었음을 밝혀주는 일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이 어린양은 “죽기에 이르기까지” 순종하는 종이 되었고, 그렇게 하여 그분께서는 인간의 “불순종”을 치유함으로써 세상의 구원을 이루어내셨습니다. 진리의 성령, 파라클리토께서는 이런 방식으로 “죄를 밝히시는 것입니다.”
40. 그리스도의 희생이 지니는 구속적 가치에 대해서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저자가 대단히 의미있는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저자는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육체를 깨끗하게 해준다.”는 구약의 제물을 상기시킨 다음, 덧붙여 말합니다. “하물며 성령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흠없는 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데나 죽음의 행실을 버리게 하고 살아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하는 데 얼마나 큰힘이 되겠습니까?”150) 물론 다른 해석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에 걸쳐서 성령의 현존이 있었다고 보는 우리의 견해에 이어, 이 구절 역시, 강생하신 말씀의 구속적 희생 안에서도 발견되는 성령의 현존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이 희생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처음의 말씀을 살펴보고, 다음에는 그것이 지니는 “양심을 깨끗이 하는 힘”에 대해서도 따로 생각해 봅시다. 실상, 영원한 영을 통해서(그 영의 역사를 통해서) 봉헌된 희생으로부터, 구원을 위해 “죄를 들어 밝히기 위한” 힘을 얻어내는 것입니다. 다락방에서 하신 약속에 따라 부활하신 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보내주신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당신의 십자가의 상흔을 보여주시며 “죄의 용서를 위해” 성령을 주셨던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다.”151)우리는 베드로가 고르넬리오의 집에서 말한 것처럼, “하느님께서 나자렛 예수님께 성령과 능력을 부어주셨음”152)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에 따라, 그분의 “떠남”의 파스카 신비를 알고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흠없는 제물로서 하느님께 바치셨는지”, 곧 그분께서 “영원한 영을 통해” 그렇게 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희생되실 때, 성령께서 그분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던 방식도 그전까지 하셨던 방식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곧, 그분의 수태 시, 세상에 탄생하실 때, 그분의 숨은 생활 기간, 또 공생활 기간 등에 성령께서 그분에게 현존하시고 활동하셨던 방식과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이 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게쎄마니와 골고타를 거쳐 당신의 “떠남”을 향해 나아가시면서, 그분께서는 인간성으로서의 자신을 성령-파라클리토의 활동에 온전히 열어놓으셨습니다. 이 성령께서 고통 속에서도 구원의 원천인 영원한 사랑이 나타나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당신을 죽음에서 구해 주실 수 있는 분에게 큰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마음을 보시고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겪음으로써 복종하는 것을 배우셨습니다.”153) 이처럼, 이 편지는 첫 아담의 자손들의 경우에는 인류가 죄에 종속되어 있었는데, 예수님께 이르러서는 하느님께 완전히 종속되고 그분과 일치해 있게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인류는 사람들에 대한 자비심을 충만히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새로운 인간성이 출현하게 되었는데, 이 새 인간성은 십자가의 수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담의 죄로 인해 배신당한 사랑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인간성은 성령이라는 원초적 선물의 신적 원천에서 다시 찾아낸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깊은 속을 헤아리시는 분”이며, 스스로가 사랑이시고 선물이십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으로서 수난 중에 드린 간절한 기도 속에서, 이미 당신의 인간성 밑바닥까지를 뚫고 들어오신 성령께서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십자가 위에서의 사랑의 희생물로서 그 수난을 하나의 완전한 희생 제사로 바꿀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홀로 이 제물을 봉헌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유일한 사제로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흠없는 제물로 바치셨습니다.”154) 그분께서는 인간으로서 그런 희생물이 될 자격을 갖추신 분이었는데, 그것은 그분만이 홀로 “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분께서는 그 제사를 “영원하신 영을 통해” 드리셨습니다. 이 사실은, 사람의 아들께서 자기 자신을 주시는 이 절대적 선물에서 성령께서는 특별한 방식으로 활동하시어, 고통을 구속적 가치가 있는 사랑으로 변화시켜 주셨음을 나타냅니다.
41. 구약성서에는 사람들이 봉헌한 제물을 태우던 “하늘의 불”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155) 그와 비슷하게, 우리는 성령을 십자가 신비의 가장 깊은 바닥에 작용하는 “하늘의 불”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성령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셔서 아들의 제사를 아버지께 향하게 하시고, 그분께서 성삼의 친교의 신적 실재 안으로 들여 보내십니다. 죄가 고통을 낳았다면, 이제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느님의 아픔은 성령을 통해 극히 인간적으로 표현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사랑의 역설적인 신비를 보게 됩니다. 다름아니라, 당신 자신의 피조물로부터 배척을 당하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고통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나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고통의 깊이로부터, 또 간접적으로는 “믿지 않았던 죄”의 깊이로부터 성령께서는 처음부터 인간과 창조물에게 내리셨던 선물을 한층 새로운 정도로 올려서 더욱 풍성히 내려주십니다. 사랑은 십자가 신비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활동하고, 이 사랑은 하느님 자신 안에 있는 생명에 참여하도록 인간을 이끕니다.
사랑과 선물로서의 성령께서는, 어떤 의미로, 십자가 위에서 바친 제사의 가장 중요한 핵심에 내려오십니다. 우리는 성서적 전통을 따라, 성령께서 사랑의 불로 이 제사를 태워 완성하시고, 이 사랑의 불은 성삼의 친교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을 일치시켜 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십자가 제사는 그리스도의 고유한 행위인 만큼, 이 제사에서도 그분께서는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성령을 충만히 받으시기 때문에, 다음 단계에서는 그분 자신이 -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그분만이 홀로 - 그 성령을 사도들에게, 교회에게, 또 인류에게 “주실” 수 있게 됩니다. 그분만이 홀로 아버지에게서 성령을 “보내주십니다.”156) 또 그분 홀로 다락방에 모여있는 사도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 위에 숨을 내쉬시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다.”157) 이것은 세례자 요한이 미리 알려주었던 그대로였습니다. “그분께서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158)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성령이 계시되었고, 동시에 파스카 신비의 가장 깊은 곳에서 활동하는 사랑으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지니는 구원적 능력의 원천으로서, 새롭고 영원한 생명의 선물로서, 그분께서 언제나 현존하시게 되었습니다. 성령에 관한 이 진리는 로마 전례 안에서 사제가 영성체 직전에 드리는 기도를 통해 날마다 표현되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주님께서는 성부의 뜻에 따라 성령의 힘으로 죽음을 통하여 세상에 생명을 주셨나이다. …….” 또 감사기도 제3양식에서 사제는 이 같은 구원경륜을 염두에 두고 하느님께 간구합니다. 성령께서 “저희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리는 영원한 제물이 되게 하여주소서”(역자 주:우리말 미사통상문에서는 이 부분을 “그리스도 몸소 저희를 영원한 제물로 완성하시어”라고 옮겼다.).
125) 창세 1-3장 참조.
126) 로마 5,19; 필립 2,8 참조.
127) 요한 1,1.2.3.10 참조.
128) 골로 1,15-18 참조.
129) 요한 8,44 참조.
130) 창세 1,2 참조.
131) 창세 1,26.28.29 참조.
132) 계시헌장, 2항.
133) 1고린 2,10-11 참조.
134) 요한 16,11 참조
135) 필립 2,8 참조.
136) 창세 2,16-17 참조.
137) 창세 3,5.
138) 창세 3,22 참조; “생명의 나무”에 관해서는 또한 다음을 참조하라: 요한 3,36; 4,14; 5,24; 6,40.47; 10,28; 12,50; 14,6; 사도 13,48; 로마 6,23; 갈라 6,8; 1디모 1,16; 디도 1,2; 3,7; 1베드 3,22; 1요한 1,2; 2,25; 5,11.13; 묵시 2,7.
139)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 Ia-IIae, q.80, a.4, ad 3 참조.
140) 1요한 3,8.
141)요한 16,11.
142) 에페 6,12; 루가 22,53 참조.
143) 「신국론」, XIV,28: CCL 48, 541면.
144) 사목헌장, 36항.
145) 그리스 말로 그 동사는 παρα~λειν이며 그 뜻은 “자기한테 부르다”, “간청하다”이다.
146) 창세 6,7 참조.
147) 창세 6,5-7.
148) 로마 8,20-22 참조.
149) 마태 15,32; 마르 8,2 참조.
150) 히브 9,13-14.
151) 요한 20,22-23.
152) 사도 10,38.
153) 히브 5,7-8.
154) 히브 9,14.
155) 레위 9,24; 1열왕 18,38; 2역대 7,1 참조.
156) 요한 15,26 참조.
157) 요한 20,22-23.
15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