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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주시는 주님(Dominum et Vivificantem) -제1부

김대철대철베드로 2004. 8. 8. 00:36

생명을 주시는 주님(Dominum et Vivificantem)

 

제1부 아버지와 아들의 영이시며 교회에 주어진 성령

    1. 파스카 잔칫상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계시와 약속

3.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떠나실 때가 이르렀을 때, 그분께서는 사도들에게 “다른 파라클리토”를 보내주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16)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요한 복음사가가 기록하기를, 당신께서 수난하시고 돌아가시기 전날에 베풀어졌던 파스카 잔칫상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주겠다. 그러면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다시 파라클리토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17) 이 진리의 성령을 예수님께서는 파라클리토라고 부르십니다. 파라클리토란 “위로자” “협조자” 또는 “변호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다른” 또는 두 번째 파라클리토를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그분 자신께서 우선 첫 번째 파라클리토이시기 때문입니다.18) 그분께서는 과연 기쁜 소식을 가져다 주신 첫 번째 파라클리토이십니다. 성령께서는 그분 다음에, 또 그분을 통해 오시어 교회를 매개로 구원의 기쁜 소식이라고 하는 사업을 세상에서 계속 추진하시는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업을 성령을 통해 이어 나가시겠다고 거듭 밝히셨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떠나심, 곧 수난과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에 제자들을 미리 대비시키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인용할 말씀들은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 하나하나는 이 약속과 선언에 어떤 새로운 내용을 추가시키는 것들입니다. 동시에 이 말들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이 말들이 같은 사건들을 지시하고 있다는 뜻만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신비라는 관점에서도 이 말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에서입니다. 실상 이 신비가 여기에서처럼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대목은 성서 전체에서도 달리 없는 것입니다.

4. 위에서 언급한 말씀을 하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다음 내용을 덧붙이십니다. “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께서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주실 것이다.”19) 이제 성령께서는 비록 보이지 않지만,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기쁜 소식의 스승으로서 사도들과 교회 한가운데에 계시면서 그들의 위로자가 되실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가르쳐주실 것이다.”라든지 “그분께서는 되새기게 해주실 것이다.”라든지 하는 표현은 그분께서 당신 특유의 방식으로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도록 영감을 계속 불어넣어 주시겠다는 뜻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지니는 참된 의미를 이해하도록 도와주실 것이라는 뜻도 아울러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환경과 상황이 바뀌더라도 그것이 지니는 의미가 변질되지 않고 계속 살아있도록 지켜주시겠다는 뜻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령께서는 사도들이 스승께 들은 진리 자체가 교회 안에 고이 간직되도록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5. 기쁜 소식을 소식을 다음 세대에 넘겨 전달해 주는 일에서 사도들은 특별한 방식으로 성령과 일치될 것이었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여 너희에게 보낼 협조자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께서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20)
    사도들은 직접 증인, 목격자들이었습니다.
복음사가 요한이 다른 곳에서 말하고 있듯이 그들은 스승의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고” “실제로 목격하고” “손으로 만져보기”까지 했습니다.21) 그리스도께 대한 인간적이고 직접적이며 “역사적”인 증언은 성령의 증언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시리라.” 사도들의 인간적 증언은 진리의 성령께서 해주시는 증언 안에서 최상의 버팀목을 발견합니다. 또 그 이후로도 계속 사도들의 증언은 세기를 통해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신자들을 매개로 끊임없이 이어질 것인데, 이때 그 증언의 계속성을 내적으로 밑받침해 주는 역할을 성령의 증언이 떠맡게 될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인간에게 내려주신 최상의 완전한 하느님 계시임을 우리가 잘 아는 바이지만, 이를 알려주고 보장해 주며 사도들의 설교와 기록물들을 통해서 손상없이 전달해 나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성령의 증언입니다.22) 한편 사도들의 증언은 교회와 인류의 역사 안에서 그 인간적 표현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6. 이 모든 사실은 우리가 방금 살펴본 선언과 약속의 내용과 의도 사이에 있는 상관 관계에서도 드러납니다. 이 상관 관계는 또한 요한복음의 다음 말씀에도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직도 나는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너희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께서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대로 일러주실 것이며 앞으로 다가올 일들도 알려주실 것이다.”23)
    앞에서 본 말씀들 속에서는 예수님께서 파라클리토를 진리의 성령으로 제시하시면서, 그분을 “가르쳐주실 분”, “되새기게 해주실 분”, 당신을 “증언해 주실 분”으로 소개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분께서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주실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주시리라.”는 말씀은 사도들이 “지금은 알아들을 수 없다.”는 말씀과 연결되어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하고 계시던 순간으로서는 바로 임박해 있던 수난과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통한 그리스도의 자기비허(自己卑虛)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온전히 깨닫도록 이끌어주시리라.”는 말씀은 십자가의 걸림돌을 뛰어넘어,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24) 모든 것에까지 확대 적용된다는 사실 이후에 확실해졌습니다. 실상, 그리스도의 신비는 전체적으로 신앙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계시된 신비의 실체로 올바르게 인도하는 것은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온전히 깨닫도록 이끌어주시는 일”은 신앙 안에서 또 신앙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것은 진리의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며, 인간 안에서 수행하시는 그분의 역사(役事)가 이루어내는 결과입니다. 이 점에서, 성령께서는 인간의 최상 안내자요, 인간 정신을 비추는 빛이시어야 합니다. 이 말은 우선 사도들에게 해당됩니다. 목격 증인으로서 사도들은 이제부터,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신” 것, 특히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모든 사람에게 알려주어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또, 좀더 넓은 안목으로 볼 때, 모든 시대에 계속 이어질 스승의 제자들과 그분의 증인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왜냐하면 이들이야말로 인간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신비, 이 역사의 궁극적 의미를 밝혀주는 계시된 신비를 신앙 안에서 받아들이고 분명하게 선포해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7. 그러므로 구원의 경륜 속에서 성령과 그리스도 사이에는 내밀한 끈으로 이어진 관계가 있습니다. 이 불가분의 관계로 성령께서는 인간 역사 안에 “다른 파라클리토”로 역사하시니, 나자렛의 예수님께서 계시하신 기쁜 소식을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하고, 공간적으로 널리 전파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의 신비와 활동 안에서 우리 구속주(救贖主)의 역사적 현존을 끊임없이 보장해 주시고 지상에서 그분께서 계속 함께 계시면서 당신의 구원 사업을 추진하게 해주시는 성령-위로자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은 찬연히 빛납니다. 다음에 이어 나오는 요한의 말씀은 바로 이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분, 곧 성령께서는 나에게서 받은 것을 너희에게 열어 보여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25) 이 말씀은 앞에서 언급한 바를 다시 한번 확인해 줍니다. “그분께서는 가르쳐주시리라. …… 그분께서는 일깨워 주시리라. …… 그분께서는 증언해 주시리라.” 하느님께서 스스로를 열어 보여주시는 최고의 완전한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었거니와 - 사도들의 설교가 이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 그것은 교회 안에 보이지 않는 파라클리토, 진리의 성령을 파견하심으로써 계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성령의 파견이 그리스도의 파견과 얼마나 긴밀히 맺어져 있고, 그것이 얼마나 이 그리스도의 파견에서 전적으로 흘러 나와 역사 안에서 그 구원의 열매를 무르익게 하고 발전시키는지를 표현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받는다”라는 단어입니다. “그분께서는 나에게서 받은 것을 너희에게 열어 보여주시리라.” 예수님께서는 마치 이 “받는다”라는 말을 설명해 주시고, 신적이고 삼위적인 원천의 단일성이 밝히 드러나게 하려는 의도에서인 듯이, 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나로부터 받은 것을 너희에게 열어 보여주시리라고 내가 말했던 것이다.”26) “나로부터 받은 것”은 바로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분께서 받으실 것”이라는 이 표현의 의미를 거울삼아,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일 전날 만찬 석상에서 성령에 대해 하신 다른 말씀들의 의미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 그분께서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께서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보내겠다. 그분께서 오시면 죄와 정의와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잡아 주실 것이다.”27) 이 말씀에 대해서는 따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에 다음으로 미루기로 합니다.

    2.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8. 요한복음 본문의 특징은 거기서 아버지, 아들, 성령이 모두 확연히 위격(位格)들로 소개되며, 아버지는 아들이나 성령과 구분되고, 또 세 위격이 서로 구분되는 것으로 제시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파라클리토에 관해서 언급하실 때 계속 인칭 대명사인 “그”를 사용하시고, 동시에 고별사에서 그분께서는 아버지, 아들, 파라클리토를 상호 관계 안에서 하나로 이어주는 끈을 밝혀주십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 아버지로부터 오시며”,28) 아버지께서는 성령을 “주십니다.”29)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주시고”,30) 성령께서는 아들을 “증언하십니다.”31) 아들은 아버지께 성령-파라클리토를 보내달라고 청하시는데,32) 다른 한편으로는 십자가를 통한 당신의 “떠남”을 넌지시 비추시며, “내가 가면 그분을 보내겠다.”33)고 선언하시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께서는 아버지로서의 당신 권능으로 아들을 보내시듯이 성령을 보내십니다.34) 그러나 동시에 그분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구속의 힘으로 성령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성령께서는 아들에 의해 보냄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내가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눈여겨보아 두어야겠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하신 다른 약속들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떠나가신 다음에 오실 성령에 대해 말하고 있는 데 비해서, 요한복음 16,7-8의 말씀은 이 두 분의 출현 사이에 어떤 의존 관계가 있음을 함축하고 이를 뚜렷이 강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떤 의미로는 이 둘 사이에 어떤 인과 관계가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내가 가면 너희에게 그분을 보내겠다.” 성령의 오심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떠나심과 밀접히 관련되는 일이었습니다. 성령의 오심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 사업 다음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 구속 사업 때문에도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9. 이처럼 파스카 축제 석상의 고별사 속에서 우리는 성삼에 관한 계시의 정점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결정적 의미를 지니는 사건들과 말씀들을 만나게 되는 순간을 바로 앞두고 있는데, 이 말씀들은, 사도들을 선교 임무를 띠워 파견하고, 그들을 매개로 하여 교회를 같은 목적으로 파견하는 대파견 행위로 이어집니다.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내 제자로 삼아라.” 이 선교 파견은 세례의 성삼적 정식(聖三的 定式)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어라.”35) 이 정식은 하느님의 내밀한 신비를 반영합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께서 삼위의 신적 생명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별사를 이 삼위일체적 정식으로 이끌기 위해 특별히 마련된 준비 단계로 이해할 수도 있는데, 이 삼위일체적 정식 속에서 하나이시며 삼위이신 하느님 생명에의 참여를 실현시켜 주는 성사의 생명을 주는 능력이 잘 표현됩니다. 이 성사가 인간에게 초자연적 선물로서의 성화 은총을 부여해 주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 은총을 통해 측량할 수 없는 하느님의 생명에 초대되고 그 생명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10. 당신의 내밀한 생명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36) 그분께서는 본질적인 사랑으로, 이 사랑은 세 신적 위격들에 공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영으로서 위격을 지닌 사랑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되지 않은 사랑-선물로서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심연 깊이까지를 헤아릴 수 있는 것입니다.”37) 우리는 하나이며 셋이신 하느님의 내밀한 생명이 성령 안에서 온전히 선물로 되고, 신적 위격들 사이에 상호적 사랑의 교환이 되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 선물이라는 양식으로 “존재”하신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자기증여(自己贈與), 사랑으로 존재하는 일의 위격적 표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38) 그분께서는 위격이신 사랑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위격이신 선물이십니다. 이것이 하느님에게서 위격이란 무엇인가 하는 개념의 문제를 두고 실재의 헤아릴 길 없는 풍부함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해 줍니다. 이 풍부함을 어떤 언어로써도 표현해 낼 길이 없고, 계시만이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동시에, 성령께서는 신성에서 아버지와 아들과도 본질을 같이하시면서 사랑이요 창조되지 않은 선물이신데, 이 사랑을 원천(살아있는 샘)으로 피조물들에게 부여되는 모든 선물(창조된 선물)이 흘러 나옵니다. 말하자면, 창조 행위를 통해 모든 것에게 존재를 선사하고, 구원경륜 전체를 통해 인간들에게 은총을 선사하는 것입니다. 이는 바오로 사도께서 기록하신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39)

    3.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다

11. 파스카 잔칫상에서 하신 그리스도의 고별사는 특별히 이 “증여”, 성령의 이 “자기증여”와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 안에 들어있는 구원 신비의 가장 깊은 “논리”가 드러나 보입니다.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이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상호간의 표현할 수 없는 친교의 연장으로서의 구원 신비를 의미합니다. 성삼의 신비를 출발점으로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세상의 구원의 신비로 이끄는 것은 일종의 신적 “논리”입니다. 인간의 현세적 역사 속에 아들이 이루어놓으신 구속은, 십자가를 통한 그분의 “떠남”과 부활을 통해서 성취된 것인데, 그것은 동시에 그 모든 구원 능력과 함께 성령께로 넘겨지게 되었습니다. “나에게서 받을”40) 그분이신 성령께로 인계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본문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떠남”이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성령을 “보내시는 일”과 그 오심을 위해서 불가결한 조건임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말씀들은 동시에 그때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자기증여가 성령 안에서 시작된다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12. 첫 번째 시작에 비해서 이것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첫 번째 시작은 하느님께서 처음에 구원을 위해 당신 자신을 주신 일로서 그것은 사실상 창조의 신비를 말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첫 마디에서부터 우리는 이런 말씀을 발견합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 그리고 그 물 위에 하느님의 영(ruah Elohim)이 떠돌고 있었다.”41) 이 성서적 창조 개념은 우주에 존재를 주어, 있게 하는 일, 곧 존재의 부여만을 뜻하지 않고 또한 창조물 안에 하느님의 영이 임재함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당신께서 만드신 것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그들에게 주시는 일의 시작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엇보다도, 당신의 모습을 따라 당신을 닮게 창조하신 인간에게 해당됩니다. “우리 모습을 따라 우리를 닮은 사람을 만들자.”42) 여기서 창조주께서 스스로에 대해 사용하신 복수형 동사 “만들자”는 말은, 어떤 의미로 벌써 성삼의 신비를 넌지시 비추고 인간의 창조에 성삼께서 임재하셨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신비를 이미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말씀을 읽을 때는 그 안에서 그 신비의 흔적을 인정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쨌든, 창세기의 문맥을 살펴볼 때, 우리는 하느님의 인간 창조 안에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그분께서 당신 자신을 주시는 일의 첫 번째 시작을 식별해 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인간에게 당신의 “모습”을 따라 당신을 “닮도록” 창조해 주신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13. 예수님께서 고별사에서 하신 말씀들도 이 옛날의 “시작”, 창세기를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된 이 근본적 시작과 관련지어 이해해야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께서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보내겠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떠남”을 성령 내림의 조건으로 제시하심으로써,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성령 안에 자기증여를 새로 시작하시는 일과 구속의 신비 사이를 연결하십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첫 시작과 인간의 전역사 사이에 원조의 타락 이래 죄가 끼여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죄는 하느님의 영께서 창조물 안에 임재하시는 일을 저지하며, 무엇보다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주시는 일을 방해합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바로 이 죄악 때문에 “창조물이 …… 헛된 것에 예속되어 있고 ……, 그날까지 모두 신음하며 산고를 겪고 있다.”고 기록하시고, 또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도 쓰고 계십니다.43)

14.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44) 십자가를 통한 그리스도의 “떠남”에는 구속의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 하느님의 영께서 새롭게 피조물 안에 현존하시게 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성령 안에서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주시는 일을 새로 시작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에 관해 바오로 사도께서는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당신의 아들의 성령을 보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45) 최후의 만찬 석상의 고별사에서도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성령께서는 아버지의 영이십니다. 그와 동시에, 사도들 특히 다르소의 바오로께서 증언하시는 바와 같이, 그분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기도 합니다.46) 바오로께서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 마음속에” 이 영을 보내심으로써 “피조물이 간절히 기다리던” 그것이 실현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떠남”을 대가로 지불해야 오십니다. 이 “떠남”이 사도들 마음속에 슬픔을 주었고,47) 성금요일의 수난과 죽음에서 그 슬픔은 절정에 이르렀지만, “이 슬픔은 곧 기쁨으로 변할 것”이었습니다.48) 실상, 그리스도께서는 후에 구속적 가치를 지니는 당신의 “떠남”을 부활과 아버지께로의 승천이라는 영광으로 꾸미셨던 것입니다. 스승의 “떠남”을 앞두고 사도들이 느꼈던 슬픔, 그러나 그 “떠남”을 통해서 다른 “파라클리토가 오실 것이기에”49) “그들을 위해서 더 유익한” 그 떠남을 사도들은 겪어내지 않으면 안되었고, 실상 그들의 슬픔 속에서도 기쁨은 살아있었습니다. 성령께서는, 구속이 성취되는 장소인 십자가를 대가로 지불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파스카 신비의 능력에 힘입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오순절 축일에 오시어 사도들과 함께 머무르셨습니다. 사도들과 함께 머무르심은 교회와 함께 교회 안에 머무르시기 위함이었으며, 그것은 다시 교회를 통하여 세상 안에 머무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이시며 삼위이신 하느님께서 성령 안에, 인간과 세계의 구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스스로를 주시는 이 증여 행위가 결정적으로 다시 시작된 것입니다.

16) 요한 14,16.
17) 요한 14,13.16-17.

18) 1요한 2,1 참조.

19) 요한 14,26.

20) 요한 15,26-27.

21) 1요한 1,1-3; 4,14 참조.

22) 성서에 포함되고 표시되어 있는
하느님의 계시는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도움으로 기록된 성서는 같은 성령의 도움으로 읽고 해석해야 한다.”: 계시헌장, 11.12항.
23) 요한 16,12-13.

24) 사도 1,1.

25) 요한 16,14.

26) 요한 16,15.

27) 요한 16,7-8.

28) 요한 15,26.

29) 요한 14,16.

30) 요한 14,26.

31) 요한 15,26.

32) 요한 14,16.

33) 요한 16,7.

34) 요한 3,16-17.34; 6,57; 17,3.18.23 참조.

35) 마태 28,19.

36) 1요한 4,8.16 참조.

37) 1고린 2,10 참조.

38)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 Ia, qq.37-38 참조.

39) 로마 5,5.

40) 요한 16,14

41) 창세 1,1-2.

42) 창세 1,26.

43) 로마 8,19-22.

44) 요한 16,7.

45) 갈라 4,6; 로마 8,15 참조.

46) 갈라 4,6; 필립 1,19; 로마 8,11 참조.

47) 요한 16,6 참조.

48) 요한 16,20 참조.

49) 요한 16,7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