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철대철베드로
2004. 7. 26.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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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에 입회한 지 10년 정도 지난 때로 기억합니다. 제 나름대로 노력한다고 많이 노력했지만 노력만큼이나 갈등이 많았던 시기,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뇌를 거듭하던 시기, 더구나 최종 선택을 해야 하는 종신서원을 앞둔 시기였습니다.
여러 측면에서 다가오던 스트레스, 거기다 지극히 소심했던 성격은 제 영혼과 육신을 완전히 소진시켰습니다. "이렇게 소화가 안 되고, 통증은 계속되고 혹시라도 큰 병은 아닐까? 아직은 좀 더 살아야 되는데" 하는 걱정에 몇번이나 내시경을 해봤지만 별다른 원인을 찾아내지 못하고, 정말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식사를 제대로 못하다 보니 몸이 맛이 가고, 몸이 맛이 가다 보니 정신도 약간씩 맛이 간다는 느낌까지 들었습니다.
그런 상황이 지속되다 보니 공동생활도 제대로 못하고 그로 인한 죄책감으로 또 다시 스트레스를 받고, 그런 악순환이 거듭되면서 수도생활을 포기해야 할 지경에까지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소문을 통해서 제 근황을 알게 된 어머니께서 하루는 큰 가방을 들고 수도원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수도생활도 좋지만 일단 살고 봐야 되지 않겠니?"
당시 너무도 심신이 지쳐있던 저는 '그 말씀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과 함께 "이만큼 노력했는데, 시대가 나를 안 받쳐주니 어쩔 수 없지" 하면서 어머니와 함께 귀향열차를 탔습니다.
하릴없이 천장만 바라보고 누워있던 어느 순간이었습니다. '그래도 10년 세월, 청춘을 바쳤는데, 이건 정말 아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가는 데까지 한번 가봐야 되지 않겠나?' 하는 오기가 은근히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이부자리를 털고 일어난 저는 자주 다니던 성당으로 달려갔습니다. "하느님, 정말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하며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나쁜 짓 하려는 것도 아니고 수도자로서 봉헌된 삶, 봉사의 삶을 살려고 하는데, 이렇게 협조 안 하시냐?"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께 대들면서, 때로 안타까운 마음으로 외치면서, 때로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나?' 심각하게 반성하면서 간절한 기도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 시절, 제 안에 남아 있던 에너지 전부를 기도에만 다 쏟아부었습니다.
돌아보니 참으로 절실히 기도하던 순간이었습니다. 모든 기력이 다 소진되었다고 느껴지던 어느 순간, 하느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제게 건네셨습니다.
"이제야 알겠느냐? 네게 시련을 보낸 이유를. 네겐 아직도 정화와 단련이, 바닥 체험과 거듭남이 필요했었단다. 이제 안심하고 다시 한번 새 출발해 보거라."
이토록 부끄러운 고백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살아가면서 그 당시 고통의 세월을 가장 큰 선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고통을 보내시는 이유는 보다 절실한 기도, 보다 열렬한 기도를 통한 새 삶을 준비하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간절한 기도는 반드시 하늘에 닿는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나 자신이나 내 가족의 안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선을 위한 것, 한 차원 도약을 위한 것, 영적인 삶을 위한 것, 고통 중에 있는 이웃들을 위한 것일 때 하느님께서는 100%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드리는 간곡한 기도는 절대 허공을 맴돌다가 사라진다든지,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비록 모든 상황이 순식간에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뒤바뀌는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간절한 기도는 한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절실히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는 자신의 나약함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기도하는 가운데 어렴풋이나마 하느님 뜻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진실로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가 바치는 기도의 취약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의 기도가 지나치게 이기적인 기도, 너무도 허무맹랑한 기도였음을 자각하게 됩니다.
간절하게 기도하는 사람의 삶은 정직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간절한 기도를 바치는 사람은 서서히 자신의 기도를 정화시켜 나갑니다. 기나긴 정화 과정을 거친 기도야말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기도입니다. 결국 그 기도는 보다 순수한 기도, 지극히 이기적인 바람이 배제된 기도, 세상을 위한 기도,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위한 기도이기에 100% 이루어질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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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평화신문 제 78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