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Catholic/그분과 함께..

[생활속의 복음] 아버지께서 주신 선물, 십자가

김대철대철베드로 2004. 7. 25. 20:29
양승국 신부(서울 대림동 살레시오수도원 원장)
   돌아보니 벌써 2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네요. 지난 2002년 8월5일,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많은 비가 오던 날, 참으로 안타까운 한 임종이 있었습니다. 참 교육자이자 참 신앙인이었던 최한선 예로니모 총장.

 그분은 1998년 한 가톨릭대학교 총장에 취임하게 됩니다. 당시 그분의 총장 임명은 사람들에게 많은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관례를 깨고 사제가 아닌 평신도가 가톨릭대학교 총장에 임명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최 총장은 취임과 동시에 뛰기 시작했습니다. 학교 발전과 쇄신을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마지막 소명으로 여기고 철저히 학교를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산더미같이 쌓여있던 현안들-학생 모집난, 재정난 등 지방대의 고민들-을 해결하기 위해 밤늦도록 고민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분은 기회 닿는 대로 학생들에게 가톨릭 신앙을 맛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돈보스코의 예방교육 정신에 따라 가능하면 학생들 가운데 현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학교 공식 행사를 간단한 의례로 대신하려 할 때 그분은 펄쩍 뛰며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학생들이 가톨릭대학교에 왔으면 그 맛을 보게 해야지요. 그러면 그들도 언젠가 세례를 받게 될 것입니다" 라고 강조하며 모든 행사를 미사로 시작하고 미사로 끝내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총장 재임시절 그분은 주변의 간곡한 당부에도 관용차나 관사를 끝까지 거부하는 등 철저한 청빈생활을 고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오래 전부터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한 여러 시설들을 남모르게 도와왔습니다. 또한 그분은 그 바쁜 총장직을 수행하면서도 꾸준히 살레시오 협력자회 양성을 받고 서약까지 한 적극적 신앙인이셨습니다.

 총장으로 부임하던 첫해, 그분은 크나큰 십자가를 맞이합니다. 의욕적으로 학교개혁을 추진하던 최 총장에게 의사는 대장암 선고를 내립니다. 안타깝게도 암이 이미 많이 진행되고 난 후였습니다. 끔찍한 통증으로 인한 고통 속에서도 그분은 편안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생사는 하느님께서 결정하실 문제이지 제가 걱정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지요. 하느님께 의탁하려고 합니다. 고통을 통해서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려야겠지요. 살 수 있는 데까지 즐겁게 살겠습니다." 대장암, 시한부 인생(길어야 2년)을 선고받고 나서도 의연히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에 최선을 다했던 최 총장의 삶에서 끝까지 자기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은 참 신앙인의 모습을 봅니다.

 수술을 받은 후, 그 고통스럽다는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가장 먼저 출근하던 그분의 모습, 끔찍한 고통 가운데서도 언제나 학교부터 먼저 챙기던 그분의 모습에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장례위원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또 다른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이미 오래전 후학들을 위해 자신의 시신을 의대에 기증했던 것입니다. 회의장은 한동안 숙연해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묵상해봅니다. 그는 이 땅 위에 발을 딛고 서 있지만 늘 이 세상을 떠나 사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몸 붙여 살아가지만 그에게는 이미 저 세상의 향기가 묻어있습니다. 죽음을 향해가면서도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버리는 일, 참으로 고통스런 일이지만 영원한 아버지 집을 향한 순례 여정을 걷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입니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란 새로운 가치관을 우리 안에 형성시키기 위해 어제의 낡고 닳아버린 우리 자신과 결별한다는 것입니다. 부족하고 부끄러운 어제의 나와 작별하고 다시 한번 일어서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매일 다가오는 십자가를 귀찮아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내 인생의 동반자로 주신 선물이려니" 하고 기꺼이 수용하는 일이야말로 진정 자신을 버리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