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노동의 영성 교회의 특별한 임무 24. 회칙 [새로운 사태] 반포 90주년을 맞이하여 인간의 노동에 관하여 고찰해 온 이 반성의 마지막 부분을 그리스도교적인 의미에서 노동의 영성에 할애하는 것이 옳겠다. 노동은 그 주체적인 면에서 볼 때 항상 인간의 행위(Actus Personae)이다. 따라서 영과 육의 전인간이 노동에 - 육체 노동이든 정신 노동이든 - 참여한다. 살아계시는 하느님의 말씀, 즉 구원의 복음 메시지 또한 전인간을 지향하고 있다. 이 메시지 안에서 우리는 인간의 노동에 관한 많은 점을 발견하며, 복음 메시지는 인간의 노동을 특별히 조명해 준다. 이러한 점들은 올바르게 이해되어야 한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인도를 받는 인간의 영혼 편에서의 어떤 내적인 노력은 이러한 점들을 통하여 개개 인간의 노동이 하느님 앞에서 가지는 의미를 부여받게 되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의미 때문에 노동은 그와 관련된 다른 정상적이고 특별히 중요한 요소들과 동등하게 구원 과정 안에 들어간다. 교회는 노동에 관하여, 노동의 인간적인 가치와 노동에 속하는 도덕적 질서라는 관점에서 말하는 것을 의무로 여기며, 교회는 이를 복음적 메시지 전체를 전하는 봉사의 중대한 과제 가운데 하나로 본다. 동시에 교회는 노동의 영성 형성을 특별한 의무로 인식하고 있다. 이 노동의 영성은 사람들이 노동을 통하여 창조주이며 구세주이신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갈 수 있게 하며, 인간과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참여하게 한다. 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웅변적으로 가르치는 대로, 사제요 예언자요 왕이신 그리스도의 삼중 직무에 신앙을 통하여 실제로 참여함으로써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깊게 해줄 것이다. 창조주의 활동에 참여하는 노동 25.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말하는 대로, “인간이 세기를 통하여 생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노력해 온 이 거대한 노력은 그 자체가 하느님의 계획에 부합한다는 것이 신자들에게는 명백한 일이다. 과연,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은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하며 의롭고 성스럽게 우주를 통치하고, 하느님을 만물의 창조주로 인식하며 자신과 전우주를 하느님께 바쳐드리라는 명을 받았다. 따라서 인간은 만물을 인간에게 복종시킴으로써 하느님의 이름이 전우주에 빛나도록 해야 한다.”27) 하느님의 계시된 말씀은,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이 자신의 노동을 통해 창조주의 활동에 참여하며 자신의 인간적인 역량의 한계 내에서 어떤 의미로는 창조주의 활동을 계속 발전시키고 우주 만물 전체에 내포되어 있는 가치와 자원을 발견하여 이를 더욱더 진보시키고 그 창조 활동을 완성시킨다는, 근본 진리로서 심오하게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진리를 성서의 첫 장인 창세기에서 발견하는데, 창조 활동 자체는 하느님께서 ‘엿새’동안 하신 ‘일’28)과 일곱째 날의 ‘휴식’29)이라는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게다가 성서의 마지막 책은 “전능하신 주 하느님, 주께서 하시는 일은 크고도 놀랍습니다”30) 하고 선포함으로써 하느님께서 당신의 창조적인 ‘노동’을 통하여 이룩하시는 업적에 관하여 동일한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 이것은 하루 하루 창조의 날에 대한 묘사를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31)라는 진술로 결론을 내리는 창세기와 비슷하다. 창세기 맨 첫 장에서 발견되는 창조에 대한 이러한 서술은 또한, 어떤 의미에서 최초의 ‘노동의 복음’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노동의 존엄성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즉, 인간만이 홀로 하느님을 닮았다는 독특한 특성을 지녔기 때문에, 인간은 노동을 하면서 자신의 창조주인 하느님을 닮아야 한다는 것을 창세기는 가르쳐주고 있다. 하느님 자신이 당신의 창조 활동을 ‘노동과 휴식’이라는 형태로 표현하시기를 원하셨으므로, 인간은 노동을 하면서 그리고 휴식을 하면서 하느님을 닮아가야 한다. “내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32) 하고 증언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이러한 창조 활동은 이 세상에서 항상 계속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당신이 무에서 존재에로 부르신 세상의 실존을 창조하시는 힘으로 일하시며, 태초부터 당신 ‘아버지의 집’33)에서 ‘당신과 일치하여 쉬도록’34) 운명지어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구원하시는 힘으로 일하신다. 그러므로 인간의 노동도 단지 ‘일곱째 날’35)마다 한 번씩 쉬기를 요구할 뿐만 아니라, 또한 노동은 단지 외적인 행동으로 인간의 힘을 사용하는 것만일 수는 없다. 인간의 노동은 인간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더욱더 인간 본연의 존재가 되어 주님이 당신의 종과 친구들을 위해 마련한 ‘휴식’36)을 누릴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 인간의 노동이 하느님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인식은 공의회의 가르침대로 “지극히 일상적인 활동”에까지 고루 미쳐야 한다. 왜냐하면 “자기와 가족들의 생활 유지를 위하여 노동하면서 동시에 사회에 적절히 봉사하는 남녀는 자신의 노동으로 창조주의 사업을 계속하고 형제들에게 도움을 제공하며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계획을 성취시키는 데에 개인의 노력으로 이바지한다고 여기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37) 노동의 이러한 그리스도교 영성은 모두가 나누어갖는 유산이어야 한다. 특히 현대에서 정신과 마음이 긴장되고 여유가 없기 때문에, 노동의 영성은 성숙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인간이 스스로의 재능과 힘으로 만들어낸 것을 하느님의 권능에 배치된다거나 이성을 가진 피조물을 창조주의 경쟁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인류의 승리는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증거요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계획의 결실이라고 확신한다. 인간의 능력이 커질수록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인간의 책임도 더욱 확대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우주 건설에서 인간들을 외면시키거나 동료들의 복지에 무관심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위하여 노력하도록 강력히 촉구하고 있음이 명백하다.”38) 노동을 통하여 인간이 창조 사업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여러 분야에서 노동을 받아들이는 아주 심원한 동기를 이룬다. 교회 헌장에서 우리는 이를 보게 된다. “그러므로 평신도들은 피조물 전체의 깊은 본질과 그 가치와 하느님의 찬미를 위한 그 목적을 인정하고 세속 활동을 통해서도 더욱 성스러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서로 도와주어야 한다. 그로써 세상은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젖을 것이며 정의와 사랑과 평화를 누리며 스스로의 목적을 더욱 효과적으로 성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평신도들은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아 내적으로 고양되어 세속의 분야에서 그들의 역량과 활동을 통하여 힘차게 노동을 해야 한다. 그러할 때 창조주의 섭리와 그 말씀(성자)의 비추심을 따라, 인간의 노동과 기술과 문명으로써, 창조된 재화를 완성시킬 수 있다.”39) 노동하는 인간, 그리스도 26. 노동을 통하여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느님 자신의 활동에 참여한다는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강조하셨다. 나자렛에서 그분을 처음 본 청중들이 “저 사람이 어떤 지혜를 받았기에 저런 기적들을 행하는 것일까? 그런 모든 것이 어디서 생겨났을까?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40) 하고 놀라워하였던 그 예수님에 의해서 강조되었다. 실로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맡겨진 영원한 지혜의 말씀인 ‘복음’을 말로만 선포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행동으로 실천하셨다. 그것은 또한 ‘노동의 복음’이었다. 복음을 선포한 그분 자신이 나자렛의 요셉처럼 노동하는 인간, 즉 장인이셨기 때문이다.41) 우리는 그분의 말씀에서 노동을 하라는 특별한 명령은 찾지 못한다 하더라도 - 오히려 어느 기회에 노동과 생활에 대한 지나친 걱정을 금하신 것을 볼 수 있다42) -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노동하는 세상’에 속해 있으며 인간의 노동을 이해하고 존중하신다는 것을 그분의 분명한 삶이 웅변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참으로 그분은 인간의 노동과 그 여러 형태를 사랑으로 대하셨고, 노동의 여러 형태 안에서 각기 창조주요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닮은 인간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셨던 것이다.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43) 하고 말씀하신 분, 창세기를 비롯하여 구약의 모든 전통 안에 이미 표현된 노동에 대한 근본 진리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 가르침 안에 담으셨던 분이 바로 그리스도 아닌가? 구약의 성서들은 인간의 노동에 대해 그리고 인간이 수행하는 각각의 직업에 대해 많은 것들을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의사44) 약제사,45) 목수 또는 장인,46) 대장장이47) - 이 말은 오늘날의 주물공에 해당될 수 있다 - 옹기장이48), 농부,49) 학자,50) 선원,51) 건축가,52) 음악가,53) 목자,54) 그리고 어부55) 등이다. 여성들의 노동에 대한 찬사는 잘 알려져 있다.56) 하느님 나라의 비유들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끊임없이 인간의 노동에 대해 언급하신다. 즉 목자,57) 농부,58) 의사,59) 씨뿌리는 사람,60) 관리인,61) 종,62) 청지기,63) 어부,64) 상인,65) 일꾼66) 등의 노동이다. 그분은 또한 여러 가지 형태의 여성의 노동67)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분은 사도직을 추수하는 사람들68)이나 어부들69)의 육체 노동에 비유하신다. 또한 학자들의 노동70)에 대해서도 언급하신다. 나자렛 시절 당신의 삶으로써 모범을 보이셨던 그리스도의 노동에 관한 이 가르침은 특히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에서 생생하게 반향되고 있다. 바오로는 자신의 노동하는 직업(그는 아마 천막 만드는 사람이었을 것이다.)71)을 자랑하며, 사도이면서도 자기가 먹을 것을 벌 수 있게 한 그 노동에 감사하였다.72) “우리는 여러분 중 어느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하며 애써 노동을 했습니다.”73) 그래서 그는 데살로니카인들에게 권고와 명령의 형식으로 노동에 관한 그의 가르침을 썼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런 사람들에게 명령하고 권고합니다. 말없이 일해서 제 힘으로 벌어 먹도록 하십시오.”74) 실제로 “게으른 생활을 하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남의 일에만 참견하는”75) 사람들을 보고 사도는 같은 맥락에서 주저없이 이렇게 말한다. “일하기 싫어 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76) 다른 곳에서 그는 이렇게 격려했다. “무슨 일이나 사람을 섬긴다는 생각으로 하지 말고 주님을 섬기듯이 정성껏 하십시오. 여러분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상으로 받게 되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77) 이방인들의 사도는 인간 노동의 도덕성과 영성에 관하여 그 핵심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사도의 그러한 가르침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과 가르침”78) 안에서, 그분의 생애와 비유들 안에서 드러나는 신중하고도 위대한 노동의 복음을 보완하는 중대한 내용이다. 교회의 원천 자체이신 분에게서 흘러나오는 이 빛을 근거로 하여, 현대어로 표현되어 있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교회는 항상 가르쳐왔다. “인간 활동은 인간에게서 나오듯 인간을 향하고 있다. 인간은 활동을 통하여 사물과 사회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또한 자신을 완성해 나간다. 많은 것을 배우고 자기 능력을 기르며 자기를 벗어나 자신을 초월한다. 이 같은 성장은 바로 이해한다면 외적 재산의 축적보다 훨씬 값진 것이다… 따라서 인간 활동의 규범은, 그것이 하느님의 계획과 그 뜻을 따라 인류의 진정한 복지에 부합하고,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인간으로서의 사명을 완전 무결하게 추구하며 실천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79) 이 같은 인간 노동의 가치에 관한 전망, 또는 달리 말해서 이 같은 ‘노동의 영성’은 올바른 진보의 의미에 관해 공의회의 사목헌장이 같은 항목에서 말하는 것을 충분히 설명한다. “인간의 가치는 무엇을 가졌느냐에 있지 않고 어떤 인간이냐에 있다. 마찬가지로, 더 나은 정의와 더 넓은 형제애와 더욱 인간다운 사회 관계의 질서를 확립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기술의 발전보다 훨씬 값진 것이다. 이런 기술의 발전이 인간 향상에 물질적 바탕은 마련할 수 있지만 그 힘만으로 인간 향상을 실현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80) 진보와 발전의 문제 - 현대의 사상을 지배하는 주제이다 - 에 관한 이러한 가르침은 오직 인간 노동에 관한 확인된 영성의 결실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오직 이러한 영성을 바탕으로 하여 그 가르침은 실현될 수 있고 또 실천될 수 있다. 이것이 ‘노동의 복음’에 뿌리를 박은 가르침이며 또한 하느님의 계획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비추어본 인간의 노동 27. 인간의 노동에는 또 다른 한 국면이 있는데, 그것은 노동의 본질적인 차원으로서 복음에 근거한 영성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모든 노동은 불가피하게 노고와 연결되어 있다. 창세기는 이를 매우 예리한 어투로 표현하고 있다. 노동에 관한 원초적인 축복은 바로 창조의 신비 안에 들어 있고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들어올려진 인간의 고양과 관련되어 있다. 이 축복은 죄악이 가져온 저주와 대조를 이룬다.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리라.”81) 노동과 관련된 이 고생은 지상에서의 인간의 생활 방식을 나타내는 동시에 죽음의 선고를 이루고 있다. “너는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먹으리라.”82) 이 말을 반향이라도 하듯 지혜 문학서들 가운데 한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이 손으로 한 모든 일을 돌이켜보니, 모든 것은 결국 바람을 잡듯 헛된 일이었다.”83) 지상에 있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이 말을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일에 관한 또 다른 표현인 복음의 마지막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신비 안에서 발견된다. 우리는 인간 노동의 영성에 있어서 이토록 중대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여기서 찾아야 한다. 부활의 신비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 그분의 순명을 포함한다. 이 순명을 사도 바오로는 태초부터 지상의 인간 역사를 짓눌러온 불순명과 대비시키고 있다.84) 이 신비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성령의 힘으로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돌아오시는 그리스도의 고양도 포함한다. 인류의 현재 상황에서 노동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땀과 노고는,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부름받은 모든 이에게, 그리스도께서 성취하러 오신 일에85) 사랑으로써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한다. 이 구원 사업은 십자가 위의 고통과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노동의 수고를 참아냄으로써, 인간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의 아들과 협력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이 완수해야 할 사명으로 받은 일들에서 매일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86)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라는 것을 드러낸다. 그리스도는 “우리 모든 죄인을 위하여 죽음을 당하시며 당신 표양으로 평화와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 어깨에 육신과 세속이 지워주는 십자가도 져야 한다고 우리를 가르치시며,” 동시에 “당신 부활로써 주님이 되시어 천상 천하의 모든 권한을 받으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성령의 능력으로 인간들 마음속에서 이미 활동하고 계시며 … 스스로의 생활을 더욱더 인간답게 만들고 현세적인 모든 것을 이 목적에 종속시키려는 인류 가족의 간절한 소망을 일으켜주시고 정화하시고 북돋아주신다.”87)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노동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작은 부분을 발견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받아들이신 것과 같은 구속의 정신으로 그 십자가를 받아들인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를 비추어주는 그 빛으로, 우리는 노동 안에서 항상 새로운 생명의 서광을 발견하고 새로운 선의 서광을 찾는다. 그 서광은 분명히 노동에 따르는 노고를 통하여 인간과 세계가 참여하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88)의 선포일 것이다. 노고를 거쳐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결코 새 하늘과 새 땅에 참여할 수 없다. 한편으로 이것은 인간 노동의 영성 안에서 십자가가 필수 불가결한 요소임을 확인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 이 노고로써 이루어지는 십자가는 노동 자체로부터 솟아나오는 새로운 선(善)을 보여주고 있다. 새로운 선은 노동의 깊은 의미와 그 모든 국면 안에서 이해되고 노동을 떠나서는 결코 이해될 수 없는 노동에서 솟아나온다. 인간 노동의 결실인 이 새로운 선은 이미 정의가 깃들어 있는 ‘새 땅’의 한 작은 부분이 아닌가?89) 인간의 노동에 수반되는 여러 형태의 노고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 새로운 선과 그리스도의 부활은 어떤 관계인가? 공의회는 계시된 말씀의 원천에 비추어서 이 물음에 답한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루가 9,25 참조)는 경고를 우리는 듣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땅에 대한 기대가 현재의 이 땅을 개발하려는 노력을 약화시켜서는 안될 것이고 오히려 그런 의욕을 자극시켜야 할 것이다. 이 지상에서 이미 새로운 시대를 어느 정도 암시해 주는 새로운 인류 공동체가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세적 진보를 그리스도 왕국의 발전과 분명히 구별해야 하겠지만 그것이 인간 사회의 질서를 개선하는 데에 이바지하고 있는 한,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도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90) 인간의 노동에 관한 이 고찰에서 우리는 인간 노동의 본질을 모두 강조하려고 하였다. ‘인간 활동의 결실’만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과 형제적 친교와 자유’가 인간의 노동을 통하여 이 지상에서 증대되어야91) 하기 때문이다. 기도하고 일하면서,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노동이 지상의 진보뿐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발전에서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알아야 한다. 성령의 능력과 복음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나라로 초대받고 있다. 이러한 반성을 마치면서, 본인은 여러분 모두에게, 존경하는 형제들과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기꺼이 사도적 축복을 보내드리는 바이다. 본인은 이 문헌을 맛새로운 사태맜 반포 90주년인 지난 5월 15일에 반포하려고 준비했으나, 퇴원 후에야 이 문헌을 마지막으로 손질할 수 있었다. 27. 사목 헌장, 34항. 28. 창세 2,2; 출애 20,8.11; 신명 5,12-14 참조. 29. 창세 2,3 참조. 30. 묵시 15,3. 31. 창세 1,4.10.12.18.21.25.31. 32. 요한 5,17. 33. 히브 4,1.9-10 참조. 34. 요한 14,2. 35. 신명 5,12-14; 출애 20,8-12 참조. 36. 마태 25,21 참조. 37. 사목 헌장, 34항. 38. 사목 헌장, 34항. 39. 교회 헌장, 36항. 40. 마르 6,2-3. 41. 마태 13,55 참조. 42. 마태 6,25-34 참조. 43. 요한 15,1. 44. 집회 38,1-3 참조. 45. 집회 38,4-8 참조. 46. 출애 31,1-5; 집회 38,27 참조. 47. 창세 4,22; 이사 44,12 참조. 48. 예레 18,3-4; 집회 38,29-30 참조. 49. 창세 9,20; 이사 5,1-2 참조. 50. 전도 12,9-12; 집회 39,1-8 참조. 51. 시편 107(108),23-30; 지혜 14,2-3a 참조. 52. 창세 11,3; 2열왕 12,12-13; 22,5-6 참조. 53. 창세 4,21 참조. 54. 창세 4,2; 37,3; 출애 3,1; 1사무 16,11 등. 55. 에제 47,10 참조. 56. 잠언 31,15-27 참조. 57. 예를 들면 요한 10,1-16. 58. 마르 12,1-12 참조. 59. 루가 4,23 참조. 60. 마르 4,1-9 참조. 61. 마태 13,52 참조. 62. 마태 24,45; 루가 12,42-48 참조. 63. 루가 16,1-8 참조. 64. 마태 13,47-50 참조. 65. 마태 13,45-46 참조. 66. 마태 20,1-16 참조. 67. 마태 13,33; 루가 15,8-9 참조. 68. 마태 9,37; 요한 4,35-38 참조. 69. 마태 4,19 참조. 70. 마태 13,52 참조. 71. 사도 18,3 참조. 72. 사도 20,34-35 참조. 73. 2데살 3,8. 성 바오로는 선교사들이 부양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인정한다: 1고린 9,6-14; 갈라 6,6; 2데살 3,9; 루가 10,7 참조. 74. 2데살 3,12. 75. 2데살 3,11. 76. 2데살 3,10. 77. 골로 3,23-24. 78. 사도 1,1 참조. 79. 사목 헌장, 35항. 80. 상동. 81. 창세 3,17. 82. 창세 3,19. 83. 전도 2,11. 84. 로마 5,19 참조. 85. 요한 17,4 참조. 86. 루가 9,23 참조. 87. 사목 헌장, 38항. 88. 2베드 3,13; 묵시 21,1 참조. 89. 2베드 3,13 참조. 90. 사목 헌장, 39항. 91. 상동.
카스텔 간돌포에서, 교황 재위 제3년, 1981년 9월 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