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하는 인간 -6- 노동자의 권리
인권의 광범위한 맥락 안에서
16. 노동은, 그 모든 의미에 있어서, 하나의 책임 즉 의무이며, 이는 노동자 편에서 볼 때 권리의 원천이 된다. 이 권리들은 인간 권리 전체로서의 광범위한 맥락 속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인권은 인간이 타고난 것이며, 다양한 국제 기구들에 의해 수많은 인간 권리들이 천명되었고 각 국가들이 자국민들을 위해 인권을 보장하는 일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처럼 광범위한 인권의 존중은 현대 세계의 평화를 위한 근본 조건이 되고 있다. 그 평화란 특히 회칙 [지상의 평화] 이래 교회의 교도권이 수차례 강조한 것으로서 개별 국가 사회뿐 아니라 국제 관계의 평화를 말한다. 노동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인권은 인간 기본권의 광범위한 맥락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맥락 안에서, 노동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인권은 위에서 개설한 대로 인간 노동 특유의 본질에 상응하는 고유한 특성을 지닌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특성을 염두에 두고 그 권리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미 말한 대로, 노동은 인간의 편에서 볼 때 하나의 책임이며 의무이다. 그 말이 지닌 모든 의미에 있어서 이는 진실이다. 인간은 노동을 해야 한다. 우선 창조주가 노동을 명령했기 때문이고, 또 그 유지와 발전을 위해 노동을 필요로 하는 인간 자신의 인간성 때문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향한 관심에서 특히 자기 자신의 가족을 위하여 일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를 위해, 자신이 태어난 국가를 위해, 그리고 자신이 한 구성원으로 있는 전인류 가족을 위해 일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수많은 세대에 걸친 노동의 상속자이며 동시에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의 뒤를 따라올 사람들이 이룩할 미래 건설의 참여자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그 넓은 의미로 이해되는 노동의 도덕적인 의무를 이룬다. 우리가 노동과 관련하여 각자가 이러한 의무에 상응하는 도덕적 권리를 지녔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면, 우리는 노동하는 모든 주체의 노동이 잘 드러나는 광범위한 영역 전체의 관련 문제에 항상 유념해야 한다.
우리는 노동의 의무와 이에 따르는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말할 때 우선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의 관계(勞使關係)를 생각한다.
직접 고용주와 간접 고용주 사이의 구별은 노동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방법과 노동 현장에서 정당하거나 또는 부당한 관계들의 성립 가능성을 고려할 때 아주 중요하게 여겨진다.
직접 고용주는 노동자가 일정한 조건에 따라 직접 노동 계약을 맺는 사람이거나 단체이므로, 우리는 직접 고용주와는 달리 많은 요인들, 즉 노동 협약뿐만 아니라 인간의 노동 현장에서 정당하거나 부당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요인들을 간접 고용주로 이해해야 한다.
직접 고용주와 간접 고용주
17. 간접 고용주라는 개념은 개인들과 다양한 단체들뿐 아니라 그 개인들과 단체들이 규정하여 전 사회 경제 체제를 결정하거나 그 결과로 나타나는 집단 노동 계약과 행동 원리까지도 포함한다. 그래서 ‘간접 고용주’라는 개념은 다른 많은 요소들과 관련을 맺는다. 간접 고용주의 책임은 그 단어 자체가 책임이 한층 덜 직접적임을 지적하듯이, 직접 고용주의 책임과는 다르지만 진정한 책임을 지니는 것만은 사실이다. 즉, 간접 고용주는 여타의 노동 관계 국면을 실질적으로 규정하므로, 구체적인 조건하에서 실제 노동 협약과 노동 관계를 규정하려는 직접 고용주의 행동에 제약을 가한다. 이는 직접 고용주 자신의 책임을 면제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의 행동을 규제하는 전반적인 영향력에 주의를 환기시킬 뿐이다. 윤리적으로 올바른 노동 정책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이 모든 영향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노동자의 객관적 권리들이 충분히 존중될 때 비로소 그 정책은 올바른 것이 된다.
간접 고용주라는 개념은 모든 사회에, 우선적으로는 국가에 적용될 수 있다. 그것은 국가가 정당한 노동 정책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현재의 세계적인 경제 체제에서 개별 국가들 사이에 다양한 유대가 맺어지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예컨대 수출입 과정, 즉 원자재이든 반제품이든 완제품이든 간에 경제적인 재화의 상호 교환 속에서 그 유대가 맺어지고 있다. 이러한 유대는 또 상호 의존을 유발시켜 그 결과 어느 나라에서든, 아무리 경제 강국이라 해도, 완전한 경제 자립 또는 자급 자족을 할 수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상호 의존 체제는 그 자체로는 정상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체제는 또한 여러 가지 유형의 착취나 불의의 기회로 쉽게 이용될 수 있으며, 그 결과 개별 국가의 노동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마침내 노동의 정당한 주체인 개개의 노동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예를 들면, 고도로 산업화된 국가들과 나아가 대규모의 산업 생산 수단들을 운용하는 기업들(이른바 다국적 기업 또는 국제 기업들)은 자기네들의 생산품 가격을 가능한 한 최고 가격으로 책정하는 반면에 원자재나 반제품에 대해서는 최저 가격을 책정하려고 한다. 이것은 국가간의 소득 불균형을 점점 더 크게 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다. 대단히 부유한 국가들과 극도로 가난한 국가들 사이의 격차가 줄어들거나 현상이라도 유지하기는커녕 갈수록 더욱 깊어지고 있어, 가난한 국가들을 명백하게 손상시키고 있다. 분명히 그 격차는 각 지역의 노동 정책과 경제적으로 불리한 사회에 있는 노동자의 현실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마련이다. 그러한 여건하의 체제에서, 직접 고용주는 노동자들의 객관적인 요구에 미치지 못하는 노동 조건을 정한다. 특히 직접 고용주 자신이 경영하는 기업에서(또는 생산 수단의 소유가 ‘사회화된’ 상황하의 자영 기업으로부터) 가능한 한 최대의 이윤을 얻으려고 할 때 그런 노동 조건을 설정한다.
간접 고용주라는 개념과 관련된 이러한 의존 형태의 구조가 극히 광범위하고 복잡 미묘하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 구조는 기존 사회와 국가의 경제 생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모든 요인들뿐 아니라 더욱 광범위한 의존 관계와 그 형태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러나 노동자의 권리 추구를 단순히 대규모든 소규모든 최대 이윤이라는 기준에 의해 운용되는 경제 체제의 결과라고만 운명지울 수는 없다. 그와는 반대로, 노동자 즉 육체 노동자이거나 정신 노동자이거나 또는 공장 노동자이거나 농업 노동자 등 모든 형태의 노동자의 객관적인 권리에 대한 존중은, 개별 사회나 국가 차원에서 그리고 세계의 모든 경제 정책과 거기서 파생되는 국제 관계의 모든 체제 안에서, 전체 경제를 형성하는 타당하고 근본적인 기준이 되어야 한다.
국제 연합을 필두로 해서 이에 관심있는 모든 국제 기구들은 이러한 방향으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 국제 연합의 국제 노동 기구와 국제 식량 기구(FAO) 그리고 이와 유사한 다른 단체들 또한 이 점에 관해서 새로운 공헌을 해야 하는 것이다. 각국에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 행정 부서나 공공 기관은 물론 다양한 사회 단체들이 설립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은, 이미 위에서 말한 대로, 노동자의 온전한 권리 존중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간접 고용주가 중요하다는 것을 효과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인간의 권리는 모든 사회 도덕 질서의 핵심인 것이다.
고용 문제
18. '간접 고용주’, 즉 국가적 국제적 차원에서 노동 정책의 수립 과정 전체를 책임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관련하여 노동자들의 권리를 고찰하자면, 우리는 먼저 근본적인 문제, 즉 일자리를 찾는 문제, 달리 말해서, 노동력을 지닌 모든 사람들의 적절한 고용 문제에 우리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분야에 있어서 정의롭고 올바른 상태에 대립되는 것은 실업 상태, 즉 노동 능력이 있는 사람을 위한 일자리가 없는 상태이다. 이는 전반적인 실업 문제일 수도 있고 어떤 분야의 노동에만 국한되는 실업 문제일 수도 있다. 간접 고용주라는 이름에 속하는 사람들의 역할은 실업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실업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죄악이며, 실업이 어느 수준에 이르면 실제로 사회의 재앙이 될 수 있다. 특히 실업이 문화적이고 기술적인 준비와 직업적인 준비를 제대로 갖추고도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젊은이들에게 악영향을 미치고, 공동체의 경제 사회적 발전에 책임 있게 참여하겠다는 젊은이들의 각오와 일을 하려는 그 진지한 소망이 비참하게 좌절되는 것을 보기란 고통스러운 일이다. 실업 수당을 제공해야 할 책임, 즉 실업자와 그 가족들의 생계 유지를 위해 불가피한 적절한 구호금을 마련해야 할 의무는 이 영역의 도덕 질서에 대한 근본 원리, 즉 재화의 공동 사용 원리 또는 다른 간단한 말로 표현하자면 생명과 생존의 권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실업의 위험에 대처하고 완전 고용을 보장하기 위해서, ‘간접 고용주’로 정의된 사람들은 기존 사회의 경제 생활뿐 아니라 문화 생활까지도 형성해 가는 다양한 종류의 노동에 관한 전반적인 계획을 마련하여야 한다. 그들은 또한 그 노동을 올바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조직하는 데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결국 이에 대한 전반적인 책임을 국가가 져야 하지만 이 말은 공권력에 의한 일방적 중앙 통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정의롭고도 합리적인 조정이 문제이다. 그러한 조정의 구조는 인간 노동의 주체성에 관하여 앞에서 얘기한 바를 유념하면서, 개인이나 자유 집단, 지역의 노동 단체나 산업 단지의 자율성을 보장하여야만 한다.
여러 사회와 국가들의 상호 의존과 다양한 협력의 필요성이 의미하는 것은 사회와 국가가 그 사회 안에서 노동을 계획하고 조직하는 현장에서 각기 그 주권을 보존하면서도, 이 중요한 분야에 있어서 국제 협력 차원의 행동이 취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또한 이런 조약이나 협약의 기준은 더욱더 모든 인간의 기본 권리로 간주되는 인간 노동이라는 기준이어야 한다. 즉, 노동은 노동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비슷한 권리를 주며, 이러한 방법으로 다른 사회에 있는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에 있어 부당하고 또 폭력 반응까지 유발하기 쉬운 현저한 격차들을 점점 더 축소시킬 것이다. 이러한 분야에서 국제 기구들이 할 일은 막중하다. 그러한 기구들은 복잡 다단한 상황과 자연적이고 역사적이며 민족적이거나 또는 이와 비슷한 다른 환경이 일으키는 영향을 정확히 진단하여 스스로 그에 따르도록 해야 한다. 국제 기구들은 또한 공동으로 결정한 행동 계획들과 관련하여 더욱더 효과적이어야 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그 계획들을 시행하는 데 있어서 더욱 효과적이어야 한다.
이런 방향에서, 교황 바오로 6세의 회칙 [민족들의 발전」의 지침에 따라, 보편적이고 모든 사람들에게 알맞는 발전 계획의 실행은 가능하다. 이 발전에 있어서 건설적인 요소는 인간 노동의 지속적인 재평가이다. 또한 교회가 천명해 온 정의와 평화, 이를 위해 모든 개인과 모든 민족의 아버지에게 끊임없이 기도해 온 정의와 평화의 정신으로 그 발전을 평가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모든 노동의 객관적인 목적성에서 그리고 모든 노동의 주체, 즉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관점에서, 인간의 노동에 대한 지속적인 재평가라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발전이란 인간을 통해서 그리고 인간을 위해서 이루어져야 하고 인간 안에서 그 결실을 맺어야 한다. 이러한 발전의 시금석은 노동의 목적에 대해 점차로 성숙해지는 인식 그리고 노동의 주체인 인간의 존엄성에 상응하여 노동에 내재하는 권리에 대해 점차로 보편화되고 있는 존중이 될 것이다.
각 사회와 국가에 어울리는 인간의 노동에 대한 합리적인 계획과 올바른 조직은 다양한 고용, 즉 농업, 산업, 기타 용역 분야의 노동과 정신 노동, 학문적이거나 예술적인 노동 사이에서 개인의 역량에 따라 그리고 각기 사회와 인류 전체의 공동선을 위해, 다양한 고용 사이에서 올바른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노동이 지닌 많은 가능성에 따른 인간 생활의 조직은 적절한 교육 체제에 걸맞는 것이어야 한다. 교육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의 성숙을 목적으로 하며 또한 사회적으로 분화되어 있는 광범위한 노동 세계에서 적당한 일자리를 유리하게 얻을 수 있도록 사람들을 특별히 준비시킨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전세계 인류 가족 전체를 볼 때, 우리를 극도로 당혹하게 하는 사실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 사실이란 현저한 자연 자원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으면서도,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실직 또는 불완전 고용 상태에 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개별 정치 공동체 안에 그리고 대륙적 세계적 차원의 관계에 있어서 사회적으로 극히 중대한 핵심 문제인 노동과 고용의 조직과 관련하여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명해 주는 사실이다.
임금과 기타 사회적 혜택
19. 인간의 노동이란 관점에서 양도할 수 없는 인권에 대한 존중을 보장하기 위해 모든 노동자들에게 고용의 기회를 배려해야 하는 중대한 역할을 살펴보았으므로, 요컨대 노동자와 직접 고용주 사이의 관계 안에 형성되어 있는 이 권리들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위에서 간접 고용주란 주제에 관해 다룬 모든 것은 이 관계들을 간접적으로 형성하는 다양한 조건들을 열거함으로써 이 노사 관계를 더욱 정확하게 정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고찰은 단지 서술만을 위한 것이 아니며 경제학이나 정치학에 관한 소론도 아니다. 이것은 의무적이고 도덕적인 국면을 강조하는 일이다. 여기에서 사회 윤리의 핵심 문제는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수 문제이다. 현재의 상황 아래서, 노동에 대한 보수는 올바른 노사 관계를 보장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생산 수단이 사유화된 체제나 생산 수단의 소유가 어느 정도 ‘사회화’된 체제에서 노동이 이루어질 때, 고용주(우선적으로 직접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의 관계는 임금, 즉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수를 토대로 하여 해결된다.
또한 사회 경제 체제의 정의와 어떠한 경우든 그 체제의 정의로운 기능은 결국 그 체제 안에서 인간의 노동이 정당한 보상을 받느냐 하는 데에서 평가된다는 점에 유의하여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윤리적 사회적 질서 전체의 제1원리, 즉 재화의 공동 사용 원리로 되돌아간다. 모든 체제에 있어서, 체제 내 자본과 노동의 근본 관계와는 무관하게, 임금 즉 노동에 대한 보수는 여전히 대다수의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 재화든 가공 재화든 공동 사용을 지향하는 그 재화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실제적인 수단이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에 대한 보수로 받는 임금을 통해서 그 재화에 접근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경우에 있어서 정당한 임금은 사회 경제 체제 전체의 정의를 실증하는 구체적인 수단이며, 또한 어떠한 경우이든 그 체제가 정의롭게 운용되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는 구체적인 수단이 된다. 정당한 임금은 판단의 수단일 뿐 아니라 특별히 중대한 수단, 즉 핵심 수단이 된다.
이 판단 수단은 거의 모든 가정에 관련된다. 한 가정을 책임지고 있는 성인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수란 가정을 꾸려 적절히 유지하기에 충분하고 가정의 장래를 보장하기에 충분한 보수를 의미한다. 이러한 보수는 이른바 가족 임금, 즉 가장의 노동에 대한 보수로 다른 배우자가 가사 이외에 다른 유급 직업을 갖지 않아도 가족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단순 임금이거나, 또는 가족 수당이나 가사에만 전념하는 어머니들에게 주어지는 배우자 보조금 같은 다른 사회 조처를 통해 주어질 수 있다. 이러한 보조금은 자신의 생활에 상응하는 책임을 질 위치에 있지 않는 동안은 실질적인 필요, 즉 부양 가족의 수에 상당하는 것이어야 한다.
어머니의 역할이 사회적으로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은 경험으로 확인되는 것이다. 어머니의 역할에 따르는 노고, 그리고 자녀들이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숙성하고 심리적으로 안정되어 책임있는 인격체로 자라날 수 있도록 애정어린 사랑으로 보살펴야 한다는 요구도 역시 재평가되어야 한다. 어머니가 자신의 자유를 침해당하지 않고 심리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차별 대우를 받지 않으며, 또 다른 여자들과 비교하여 아무런 열등 의식도 느끼지 않으면서, 자녀들의 나이에 따른 다양한 요구에 맞추어 자녀들을 보살피고 교육하는 데 헌신할 수 있게 한다면 이는 그 사회의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 가정 밖에서 보수가 따르는 노동을 하기 위해 이러한 과업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사회와 가정의 선익이라는 면에서 볼 때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머니로서의 사명이라는 근본 목적에 반대되거나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26)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전체 노동 과정은 각자의 필요와 생활 유형, 특히 가정 생활을 고려하고, 연령과 성별을 참작해서 조직되고 적용되어야 한다는 점이 더욱 일반적인 차원에서 강조되어야 한다. 실상 많은 사회에서 여성들은 거의 모든 생활 영역에서 노동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들은 그 본성에 맞게 그들의 과업을 완수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차별 대우를 받지 않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에서 제외되지 않고, 또한 그들 가족의 염원이 무시되지 않고 남자들과 더불어 사회의 선익에 공헌하는 여성 본래의 역할이 충분히 존중되는 가운데 여성들은 그 임무를 다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여성의 참다운 지위 향상이 이루어지려면 그 지위 향상을 위해 여성 본래의 것을 포기하거나, 어머니로서의 둘도 없는 역할을 지니고 있는 가정을 희생시키지 않도록 노동이 조직되어야 한다.
임금 외에도,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생활과 건강을 보장하기 위한 다양한 사회 보장이 여기서 그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건강 보호를 위한 비용, 특히 노동 중에 일어나는 사고의 경우, 의료 혜택이 노동자를 위해 쉽게 베풀어져야 하며, 가능한 한 그 혜택은 저렴하거나 무상이어야 한다. 사회 보장의 다른 측면은 휴식의 권리와 관련된 분야이다. 우선 휴식의 권리는 적어도 일요일을 포함한 정기적 주간 휴식과 장기간의 휴가, 즉 1년에 한 번의 연가 또는 가능하다면 연중 수차례의 단기 휴가를 포함한다. 사회 보장의 셋째 분야는 연금의 권리와 노후 대책 그리고 산업 재해 보험에 대한 권리이다. 이러한 기본 권리들의 영역 안에서, 노동에 대한 보상과 더불어 노사 관계를 결정하는 전체적인 특수 권리 체계가 발전되어 나온다. 이러한 권리들 가운데서 노동자의 신체적인 건강이나 정신적인 건강에 손상을 끼치지 않는 노동 환경과 작업 과정에 대한 권리가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노동 조합의 중요성
20. 이 모든 권리들은 노동자들의 자기 보호를 위한 필요성과 더불어 다른 또 하나의 권리, 즉 단결권을 갖게 한다. 여러 직업 분야에 고용되어 사람들의 생존 권익을 옹호하기 위하여 제단체를 형성할 수 있는 권리를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단체들을 노동 조합이라 부른다. 노동자들의 생존 권익은 어느 정도 모든 노동자들에게 공통되는 것이지만, 동시에 여러 노동 형태와 직업 형태는 각기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어 이러한 단체들은 이를 특별히 고려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노동 조합은 그 기원을 중세 장인들의 동업 조합(Guild)에 두고 있는데, 그 단체들은 같은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노동을 토대로 하여 만들었다. 그러나 노동 조합과 동업 조합은 본질적인 점에서 서로 다르다. 현대의 노동 조합은 노동자들 - 일반 노동자들 그러나 특히 산업 노동자들 - 이 기업가들이나 생산 수단을 소유한 사람들과 맞서서 그들의 정당한 권리들을 보호하기 위한 투쟁에서 성장해 왔다. 이 노동 조합들의 임무는 노동자들의 권리와 관련된 모든 분야에서 그들의 실존적인 권익을 보호하는 일이다. 역사의 체험은 이러한 형태의 조직들이 특히 산업화된 현대 사회에 있어서 사회 생활의 불가분의 요소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분명히, 이는 오직 산업 노동자들만이 이런 형태의 단체들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든 직업의 대표자들은 그들 고유의 권리 보장을 위해 그러한 단체들을 이용할 수 있다. 그래서 농업 노동자들의 농민 조합, 정신 노동자들의 조합, 또한 고용주 단체들도 있다. 위에서 이미 말한 대로, 모든 단체들은 각기 구체적인 직업의 전문화에 따라 단체 또는 소단체로 세분된다.
가톨릭의 사회적 가르침은 노동 조합들이 단지 사회의 ‘계급’ 구조를 반영하는 것이라거나 불가피하게 사회 생활을 지배하는 계급 투쟁을 대변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노동 조합들은 노동자들의 개별 직업에 따라, 참으로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와 사회 정의를 위한 투쟁을 대변하는 것이다. 어떻든 이 투쟁은 정의로운 선을 ‘위한’ 정당한 노력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현재의 사정으로는, 직업으로 결합된 노동자들의 요구와 그 공헌에 상응하는 선을 위한 정당한 노력이어야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대항하는’ 투쟁이어서는 안된다. 비록 투쟁은 다른 사람들과 반대 성격을 드러낸다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하더라도, 이는 사회 정의의 선을 지향하려는 것이지, ‘투쟁’ 자체를 목적으로 하거나 반대자를 제거하려는 것은 아니다. 노동의 성격은 우선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데 있다. 여기에 노동의 사회적인 힘, 즉 공동체를 건설하는 힘이 있다. 결국에는, 노동을 하는 사람들과 생산 수단을 경영하거나 소유하는 사람들이 어떻든 간에 이 공동체 안에서 결합되어야 한다. 모든 노동의 이러한 기본 구조에 비추어서 - 결국 어떤 사회 체제에서든 노동과 자본은 생산 과정의 필수적인 구성 요소라는 사실에 비추어서 - 명확한 것은 비록 노동의 필요성 때문에 노동자들이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결합했다 하더라도, 노동자들의 조합은 사회 질서와 결속의 건설적인 요인이라는 사실이며, 이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같은 직업으로 연합한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정당한 노력은 국가의 전반적 경제 상황에 따른 제약을 항상 고려해야 한다.
노동 조합의 요구가 비록 생산 수단 소유 체제와 생산 수단 경영 방식에서 발견되는 모든 결함에 대한 시정을 - 사회 전체의 공동선이라는 관점에서 - 목표로 할 수 있고 또 이를 목표로 해야 하나, 노동 조합이 일종의 ‘이기주의’ 집단 내지 계층으로 전락될 수는 없다. 사회 생활과 사회 경제 생활은 확실히 ‘연결 기관’의 조직과 같아서, 특정 집단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모든 사회 활동은 이 체제와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노동 조합 활동은 분명히 공동선에 대한 지혜로운 관심으로 이해되는 정치 분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노동 조합의 역할은 오늘날 상식적으로 이해되는 표현으로서 ‘정치를 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 조합은 권력을 위해 투쟁하는 정당의 성격을 지니지 않았다. 노동 조합은 어느 정당의 결정에 예속되거나 정당과 너무 밀접하게 유착되어서는 안된다. 실상 이런 상황에서는, 조합이 그 고유한 역할, 즉 사회 전체의 공동선이라는 틀 안에서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를 보장해야 하는 역할을 쉽게 상실하고, 그 대신에 다른 목적을 위해 이용되는 하나의 도구가 된다.
개별 직업에 따라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를 보호한다고 이야기할 때, 우리는 물론 개별 직업에 있어서 무엇이 노동의 주체적 성격을 결정하는 것인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먼저 어떤 것이 노동 주체의 고유한 품위를 규제하는가에 유념해야 한다. 노동 조합의 활동은 바로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 많은 가능성들을 열어주고 있으며, 그 활동은 노동자들을 훈련시키고 교육시키며 또 노동자들의 자기 교육을 강화시키려는 노력을 포함한다. 이러한 활동 분야에서 발전해 왔으며 지금도 발전하고 있는 교육 사업, 즉 노동자 대학 또는 공민 대학으로 알려진 학교나 직업 연수 과정 등은 치하할 만한 일이다. 그러한 노동 조합들의 노력에 감사하며, 항상 바라는 것은 노동자들이 더욱 많이 소유하게 될 뿐만 아니라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것, 다시 말해서 노동자들이 모든 면에서 더욱더 충분히 인간성을 실현하게 되는 것이다.
노동 조합이 조합원들의 정당한 권리를 추구하기 위해 사용하는 하나의 방법은 상대 집단 특히 고용주들에게 대항하는 최종 수단으로서 파업 또는 작업 중지가 있다. 이 방법은 올바른 조건과 정당한 한도내에서는 합법적인 것이라고 가톨릭의 사회적 가르침은 인정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노동자들은 파업의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 따라서 파업에 참여했다고 하여 어떠한 개인적인 처벌이나 규제를 받아서는 결코 안된다. 파업이 합법적인 수단이란 것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우리는 파업이 어떤 의미에서는 극단적인 수단이란 것을 강조해야 한다. 파업이 남용되어서는 안된다. 특히 ‘정치적’ 목적을 위해 파업을 남용해서는 안된다. 더 나아가서 근본적인 공동체 봉사가 문제될 때, 필요하다면 적절한 입법 수단을 통해서라도 그러한 봉사는 어떤 경우에도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파업 무기의 남용은 사회 경제 생활 전체를 마비시킬 수 있으며, 이는 노동 자체의 본성에 따른 사회의 공동선의 요구에 상반되는 것이다.
농업 노동의 존엄성
21. 노동의 품위와 인간 노동의 객관적이고 주체적인 차원에 대해 이토록 길게 얘기한 모든 것은 농업 노동의 문제와 들에서 땀을 흘리며 땅을 가꾸는 사람들의 상황에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농업 노동은 이 지구상에서 대단히 광활한 분야로, 어떤 대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또 발전과 진보가 이미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사회에만 제한된 것도 아니다. 농업 세계는 사회가 매일 그 유지를 위해 필요로 하는 재화를 공급해 주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농촌 인구와 농업 노동의 조건은 지역에 따라 다르고, 농민들의 사회적 지위는 나라마다 다르다. 이는 농업 기술의 발달 수준뿐 아니라 또한 그 이상으로 농업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에 대한 인정, 그리고 결국에는 노동의 사회적 윤리에 대한 인식 수준에 달려 있다.
농업 노동은 심각한 어려움을 안고 있다. 그 어려움으로는, 회복 불가능하고 때로는 소멸되어 버리는 육체 노력과 사회의 무관심을 들 수 있다. 그래서 농민들은 자신들을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으로 느끼게 되고, 농민들이 농토를 버리고 도시로 집단 탈출하는 이농 현상을 가속화하게 되며, 불행하게도 그들의 생활 여건은 더욱 비인간화되고 있다. 적절한 직업 훈련이나 마땅한 장비가 부족하고, 일종의 개인주의가 팽배해 있으며 또한 객관적으로 불의한 상황이 농업 노동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어떤 개발 도상국들에서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남의 땅의 소작을 강요당하고 있으며, 한치의 땅이나마 소유할 수 있다는 희망도 없이 대지주들에게 착취당하고 있다. 농업 노동자들 자신과 그 가족들이 노년이나 질병 또는 실직의 경우에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길도 없다. 오랜 기간의 어려운 육체 노동에 대한 보수도 빈약하기 짝이 없다. 지주들은 경작할 수 있는 땅도 방치해 두고 있다. 다년 간 직접 경작해 온 작은 땅덩이에 대한 법적 소유권도 권력을 가진 개인이나 집단의 ‘토지 소유욕’ 앞에서는 무가치해지거나 무력해진다. 과학적 연구와 기술의 발달 그리고 국가 정책으로 농업을 매우 유리한 수준에까지 올려놓은, 경제적으로 발전한 국가들까지도 농업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봉사와 관련한 결정에 참여할 가능성을 배제하거나 또는 농민들이 그들의 정당한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발전을 목표로 하여 자유롭게 단체를 형성하는 결사의 권리를 거부함으로써 노동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상황에서, 근본적이고도 긴급한 변혁이 요구되고 있다. 농업 - 그리고 농촌 사람들 - 의 가치를 사회 공동체 전체의 발전 안에서 건전한 경제의 근간으로 회복시키기 위한 변혁이 필요하다. 그래서 노동, 모든 노동 특히 농업 노동의 존엄성을 천명하고 증진시킬 필요가 있다. 농업 노동이야말로 인간이 하느님께로부터 선물로 받은 땅을 ‘정복’하여 가시적인 세상에서 인간의 ‘다스림’을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애인과 노동
22. 최근에 국가 단체와 국제 기구들은 노동에 관련되는 또 하나의 문제이면서도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문제인 장애인의 문제에 주의를 기울여왔다. 장애인들 또한 천부적이고 신성하며 침해할 수 없는 권리에 상응하는 온전한 인간 주체이며, 그들의 육체와 기관에 미치는 어떠한 제약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더욱 분명히 인간의 존엄과 위대함을 드러낸다. 장애인들도 모든 권리를 가진 주체이기 때문에, 그들은 사회 생활의 모든 분야에 그들의 능력에 따라 참여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아야 한다. 장애인은 우리 가운데 하나이며 우리와 똑같은 인간성에 온전히 참여한다. 그래서 기능이 온전한 사람들에게만 공동체 생활을 허락하여 노동을 하게 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부당하며, 만인에게 공통된 인간성을 거부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한다는 것은 강하고 건강한 사람이 약하고 병든 사람에게 실제로 심각한 차별 대우를 하는 것이 된다. 객관적 의미로서의 노동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인간의 존엄성, 즉 노동의 주체에 종속되어야 하지 경제적 이익에 종속되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노동계와 관련된 여러 단체들, 즉 직접 고용주와 간접 고용주 모두 효율적이고 적절한 조치로 장애인들의 직업 훈련이나 노동에 대한 권리를 보호하여, 장애인들이 그들에게 알맞는 생산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이 점에서 많은 실제적인 문제들이 법적인 면뿐 아니라 경제적인 면에서도 생겨난다. 그러나 공동체, 즉 공권, 단체나 중재 집단, 기업과 그리고 장애인 자신이 그 생각과 힘을 다하여 포기할 수 없는 목표, 즉 장애인들에게도 그들의 능력에 따라 노동이 주어질 수 있다는 목표를 달성하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목표는 인격체로서, 노동의 주체로서의 그들의 존엄성이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각 공동체는 이런 사람들에게 정상적인 또는 적절한 직업을 제공하는 공기업이나 사기업에서 그리고 이른바 ‘보호’ 기업이나 그 주변에서 일터를 찾아주거나 만들어주는 적당한 제도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다른 노동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장애인들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노동 조건과 그들에게 주어지는 정당한 보상, 그들의 지위 향상 가능성, 그리고 여러 가지 장애의 제거 등에 특별한 배려를 해야 한다. 이는 복잡하고 어려운 과제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지는 않으나, 주체적 의미로서의 노동에 대한 올바른 개념이 그러한 환경을 조성하게 되기를 바란다. 장애인들이 노동계에서 동떨어져 있지도 않으며 사회에 의존하는 것만이 아니라, 유익하고 온전한 노동의 주체이며, 인간 존엄성을 존중받는 자로서, 그들 특유의 능력에 따라 가정과 공동체의 진보와 복지에 기여할 소명을 받았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노동과 이민 문제
23. 마지막으로, 일자리를 찾는 이민의 문제에 관해 간단하게나마 언급해야 하겠다. 이것은 대단히 오래된 현상이면서도 끊임없이 되풀이되어 왔고, 복잡한 현대 생활의 결과로서 오늘날에는 더욱 광범위하게 펼쳐지는 현상이다. 다른 지방에서 더 나은 생활 조건을 찾기 위하여, 인간은 여러 가지 동기에서 고향을 떠날 권리와 또한 다시 귀향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확실히 여러 가지 어려움이 없지는 않다. 우선 그가 뒤에 두고 떠나는 나라에서 보면 이민은 일반적으로 상실을 뜻한다. 그것은 역사와 전통과 문화로 결속되었던 큰 공동체의 한 구성원인 인간이 떠나는 것이며, 그가 다른 문화와 흔히 다른 언어로 결합된 다른 사회의 한가운데서 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이 경우, 노동의 주체 하나를 잃는 것이다. 그 주체는 심신의 노력으로 고국의 공동선에 기여할 수 있었을 터이나, 그 노력과 기여를 어떤 의미에서는 고국보다 열등한 권리밖에 없는 다른 사회에 바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민은 어떤 면에서는 하나의 악임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환경에서는 말 그대로 필요악이 된다. 이 물질적인 악이 더 큰 도덕적 손실을 수반하지 않도록 모든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 물론 현재까지 확실히 많은 조치가 취해지고 있다. 실제로 이민자의 고국과 이민국은 그 개인과 가정, 사회 생활에 이익을 보장하는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 분야의 많은 문제들은 정당한 법, 특히 노동자들의 권리와 관련되는 법에 달려 있다. 확실히 정당한 법에 대한 문제는 특히 노동자들의 권리라는 관점에서 현재 고찰하고 있는 맥락 속에 들어간다.
가장 중요한 일은 고향을 떠난 노동자가, 영구 이주자이든 계절 노동자이든 간에, 노동의 권리라는 문제에 있어서 그 사회에 있는 다른 노동자들과 비교해 볼 때 불이익의 처지에 놓여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일자리를 찾아나서는 이민이 결코 재정적 사회적 착취의 기회가 되어서는 안된다. 노동 관계에 있어서도, 해당 사회의 다른 모든 노동자들에게처럼 이민 노동자들에게도 동일한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 노동의 가치는 동일한 기준에 의해 평가되어야 하지, 국적이나 종교 또는 인종에 따라 달리 평가되어서는 안된다. 아무리 커다란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이민들 스스로 느끼는 절박한 처지를 착취에 이용해서는 안된다. 이 모든 상황은, 물론 특성이 고려된 후에, 인간의 존엄성에 밀착되어 있는 노동의 근본 가치에, 절대적으로 양보해야 한다. 즉, 한번 더 기본 원리를 반복해야 하겠다. 가치 질서와 노동 자체의 깊은 의미는 자본이 노동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 노동이 자본을 위해 이용되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