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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뵙고싶었던 나의 어린시절의 큰스님 ..

김대철대철베드로 2005. 8. 22. 22:36

나는 지금은 천주교회에 다니는 신자이지만..

내어릴적에 집안의 사정으로 서울의 관악구 본동에 있는 한국불교 태고종의 총본산인 극락정사에서 살은적이 있었는데...그당시 나를 무척 귀여워 해주시던 차몽월 스님이 계셨는데...이제는 그 큰 스님을 뵐수는 없다.   스님은 옛사람이 되시었기에...

 

여기 그 스님이 현대 불교라는 불교 잡지에 기고하신 글을 올려본다...

 


몽월스님<극락정사 조실>


“마음의 등불 하나켜면 우주 전체가 환해져요”

“눈앞에 이익만 얻으려하니

마음속 번뇌 사라지지 않아

자신의 근본을 찾으세요

*약력

·1919년 서울生

·27년 연주암 월해스님을 은사로

득도

·42년 건봉사 불교전문강원

대교과 졸업

·43년 관악산 11개사 주지대표 역임

·91년 태고종 서울종무원장

·95년 본동사회복지관, 현정어린

이집, 불교신협 운영

·98년~현재 태고종 승정추대

·현재 극락정사 오봉정사

연화정사 회주

◇1984년 극락정사에서 열린 국제보살계수계식 장면. 앞줄 왼쪽에서 세번째부터 몽월스님, 서경보스님, 스리랑카 피아다시종정스님.

夢踏萬境夢無形

몽답만경몽무형

月照千江月無心

월조천강월무심

無形無心是實相

무형무심시실상

夢覺天下月長明

몽각천하월장명

꿈에 만가지 형상을 밟아도 꿈은 형상이 없고

달이 천강을 비치되 달은 마음이 없더라.

형상이 없고 마음도 없는 것이 실상이나니

꿈을 깬 천하에는 달만이 길히 밝더라.

세상을 살다보면 뜻하지 않은 재난과 고통, 그리고 욕망때문에 한시도 우리의 마음속에서 번뇌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눈앞의 행복만을 추구하며 어떻게든지 자신의 평안만을 얻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그로인해 번뇌에 사로잡혀 헤매는 것입니다.

불교의 대의는 성불에 있는데 그길은 자기를 찾는 것입니다. 성불하기 위해서는 자기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음은 진리의 본성이고 자신의 근본이지요. 그러므로 우주적 진리인 자기자신의 마음이야말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임을 인식하고 사막같은 답답한 마음을 옥토와 같은 풍요로운 마음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小)니 대(大)니, 많고 적음의 분별심을 부셔야 합니다. 명예니 돈이니 하는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참나가 나옵니다. 참나를 찾으면 인생이 풍요로워지고 행복은 저절로 찾아오지요.

한낱 촛불이 굴속을 밝힐 수 있다면 마음의 등불은 세상과 우주를 밝힐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나는 1919년에 안양 삼막사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가 스님이셨기 때문이지요. 부친 영은스님은 원래 경기와 서울지역에서 유명했던 침술사이셨는데 45세의 나이에 모든것을 버리고 출가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절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 영은스님은 한살차이이며 똑같은 달, 똑같은 시에 태어난 동생 무월스님과 내가 출가하기를 바랐습니다. 항상 동생과 나에게 스님이 되어 불교의 진리를 아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 하셨지요.

그러다가 내가 8살이 되자 아버님은 나를 관악산 연주암 월해스님에게 득도를 시켰습니다. 그러나 나는 오직 좀더 자유스럽게 생활하며 공부만 하고 싶지 불가에는 뜻이 없었습니다.

사실 당시 스님들은 밥먹기도 힘들고, 사람들에게 별 대우도 못받았거든요. 어린눈으로 봤을 때 왜 저러면서 스님이 될까? 하는 의문밖에 없었어요. 그러다보니 연주암에서도 오래 있을 수가 없었지요. 안양으로 다시 돌아와 안양서당에 나갔습니다.

동생과 나는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배우며 1,2등을 다퉜지요. 그러던 어느날 많은 어린이들이 학교에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학교에 가고싶다고 했더니 훈장께서 종아리를 막 때려요. 다음날 학교에 편입하려하니 일본어를 모르면 따라갈 수 없다고 거절하는 것입니다. 당시가 일제시대여서 수업이 일본어로 진행됐던 것이지요.

그럭 저럭 19살이 되었습니다. 절살림이 나아지지 않자 아버지 영은스님은 삼막사에 있으면서 다시 침술사 생활을 겸하게 됐어요. 식량을 마련하려는 뜻이었기에 농·어촌지역은 무료로 해주고 조금 나은 집은 수확때 보리한말을 받아왔지요.

아버지와 절친했던 최원홍스님이 우리절 옆 연주암에 계실때 일입니다. 때는 수확철이라 보리한말을 가져올 요랑으로 스님을 따라 나섰지요. 원홍스님과 함께 관악산 기슭의 한 양반집에 들렀는데 젊은사람이 나오더니만 진환갑이 지난 두스님에게 반말을 하는거예요. 스님들을 공손히 대하는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세번까지 반말하는 것을 듣다가 제가 이의를 제기하고 주먹으로 한대 쳐버렸어요. 그랬더니 난리가 난겁니다. 마을사람들까지 모여들더니 천한 중이 양반을 쳤다고 몰매를 때리려고 해요. 그래서 줄행랑을 치면서 생각했지요.

‘스님이 돼 불법에 도통하여 불교를 일으키고, 다시한번 이곳에 찾아오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당시에는 유교와 불교의 대립이 극심했던 시대였어요. 출가하기 전까지 유학자들에게 두번이나 몰매를 맞을 뻔 했지요.

그길로 큰절로가 수행하기로 결심하고 아버지 영은스님께 말씀 드렸더니 반가와 하시면서 금강산 건봉사 최원홍스님에게 가보라고 권했습니다. 건봉사는 당시 남한에서 가장 부유하고 큰절이었어요. 그러다보니 유학승도 가장 많았습니다. 또 사시사철 염불만일회도 열리고 있어 절에 상주하며 만일기도하는 불자들도 많았지요.

아우였던 무월스님이 먼저 건봉사 강원에 가 있었는데 우리는 강원에서도 1,2등을 다퉜지요. 건봉사에는 박한영, 진진홍 변설호스님과 함께 조선 4대 강백의 한분이었던 김일후스님이 계셨습니다. 스님은 당시 법문을 최고로 잘했고 경도 거꾸로 외울정도 였지요.

일후스님이 법상에 올라가 경책을 쫙 펼치고 법문을 하면 참 멋있기도 하고 내용도 귀에 쏙쏙 들어왔지요.

특히 일후스님의 야외수업은 일품이었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야외수업은 금강산 일주였어요. 금강산에 이력이 훤했던 스님은 학승들을 금강산 골골까지 데리고 다니며 설명한뒤, 유점사까지 가서 그곳에서 비구계를 받게 했습니다.

건봉사 법우강원에서 법우회장 소임을 맡아 보기도 하고 눈내리는 건봉사에서 학인들과 함께 산속을 헤집고 다니며 등산하고 공부할때는 피나게 정진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종무소에서 유학을 가라고 권했지만 모든 것을 팽개치고 만행을 떠났습니다.

가장 먼저 유점사 서울포교소였던 사간동 법륜사에 갔는데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냈던 대륜스님이 계셨지요. 스님은 어찌나 엄격하고 무섭게 대하셨던지 학승들 뿐아니라 신도들도 공부를 엄청나게 했지요. 신도들도 염불을 웬만한 스님보다 더 잘 할 정도였으닌까요.

송광사에 가서 구산스님과도 만났는데 스님은 해탈얘기를 하며 ‘껍데기를 벗어버려야 한다’고 누차 강조하였지요. 이 말이 어찌나 충격적이었던지 뇌리에 강하게 남았지요.

만행을 끝내고 현재 태고종 종정스님이신 덕암스님과 불교청년회 운동에 매진했지요. 청년회원들과 조직을 재건하고 본격적인 불교위상찾기에 나섰습니다.

불법에는 원을 새우면 안되는 일이 없어요. 원을 세우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극정성을 다하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불법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어렵다고 좌절하면 더이상 헤어나오질 못하고 무너져 버립니다. 그러나 굳건한 의지를 가지고 다시 일어서겠다는 강한 마음을 내면 그사람은 어려웠던 기억을 약으로 삼아 반드시 성공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부처님은 큰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어느정도 교훈을 일깨워 주는데 그것을 넘어서라는 것이예요. 땅에서 넘어진자 땅을 딛고 일어나라는 말이지요.

1943년에 관악산 연주암 주지를 맡으면서 관악산 11개사 주지대표에 취임했습니다. 당시 운경스님(봉선사 회주) 법홍스님(원효종 종정) 입적한 서봉스님등과 함께 관악산에서 주지를 하고 있었는데 주지대표는 사찰에 식량을 대주는 책무가 가장 컸어요. 당시 사찰은 경제가 어려워 특별배급으로 생활했습니다. 동사무소에 가서 신청을 하고, 본산이었던 신촌 봉원사에 가서 배급을 받아왔지요.

그때를 잊지 말자는 의미로 당시 관악산 11개 사찰 주지였던 스님들과 자비회를 만들어서 지금까지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만 이제는 노쇠하다보니 모임에는 나가지 못하고 있지요.

연주암에 있을때부터 백일기도를 한뒤 3년간 관음기도를 했어요. 당시 얼마나 목탁을 부쉈는지 모릅니다. 목탁이 부서지면 절을 했는데 목탁에서 떨어진 나무조각들이 법당에 내려앉아 손자국이 날정도였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불자들에게 기도비를 안받습니다. 공양미를 한주먹 가져오면 그것으로 끝이지요. 백일기도가 끝나면 동참했던 불자들에게 꼭 백일기도 성만기념 염주를 목에 걸어줍니다.

선과 염불기도는 모두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수행법의 하나입니다. 어느것이 수승하고 못하고는 없어요. 단지 깨달음의 길로가는 여러갈래 길에서 내가 편하고 좋아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불자들 스스로 자기 근기에 맞는 수행법에 따라서 열심히 해야 합니다. 세속생활이라는 것이 잡념과 공상이 많은지라 불자들에게 염불기도 할 것을 권합니다.

기도는 마음을 비우고 정진해야 합니다. 형식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항상 있는 그곳에서 생활하며 기도할 수 있어요. 기도하는 마음은 부처님의 바다속에 있는 아름다운 진주와 같습니다. 기도를 하게되면 영원과 하나가 되고 무한한 힘을 이끌어 내주는 원천이 돼요.

자기자신과 가족을 위한 기도만이 아니라 이웃을 생각하고 남을 위해 베풀려는 지극한 마음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남을 생각하지 않는 나만의 기도는 커다란 힘을 이끌어내기가 어렵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기도를 하다보면 어느때부턴가 자기소리가 들리지 않게 됩니다. 그 정도까지 기도를 해야 비로소 득도의 경지에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나는 불자들에게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불교가르침의 핵심인 윤회 인과법칙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알아야 한다고요. 인과법은 원인과 결과의 법칙입니다. 자신이 나쁜일을 하면 그만큼 과보를 받아요. 일부 불자들은 어떤사람이 나쁜일을 하는데도 잘살고 착한일을 하는데도 못산다고 얘기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현생에서는 과보를 받지 않지만 다음생에서는 과보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 과보를 받는지 아십니까. 자신의 업때문이지요. 나쁜 생각 하나가 천가지 만가지 악업이 될수도 있어요. 항상 하던 습이 있다보니 업이 되어 다음 생에서 어김없이 과보를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의 전생을 알고 싶으면 현재 나의 모습을 보고, 다음 생의 나를 생각하려면 지금의 내모습을 보면 간단합니다.

미래와 다음생을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착한 선업을 쌓는 것 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어요.

불교를 믿는 목적도 분명해야 합니다. 차근차근 눈앞에 닥친 조그만 현실을 이루어 가면서 마음속으로 성불하겠다는 의지를 가지면 부처님의 가르침과 어긋나지 않는, 그런 원대한 목적과 같아질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우리의 믿는 목적이 일치될 때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자신감과 확신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자신의 마음밖에 있지 않아요. 우주에 두루 계신 부처님이 어찌 특정한 물체에 국한 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은 원래 진리 그 자체이므로 어떤 모양을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니지요. 그럼 부처님이 우리 모든사람의 마음에 이미와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계신 부처님을 뵐 수 있는 지혜가 열릴 그날까지 열심히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정리=김원우 기자(wwkim@buddhapia.com)

 
출처 : 현대불교  불기 2543년 12월 1일 24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