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영종도 와 고인돌 3 기
지난 8월10 일자 경향신문에서 고인돌에 관한 발견기사를 보았었다.
그 내용을 그대로 옮겨보면
인천 서구 대곡동 일대에서
선사시대 돌무덤인 고인돌(일명 지석묘)이 무더기로 발견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인하대 박물관은 올 3~6월 말까지 서구 대곡동 가현산 북쪽 일대를 대상으로 학술조사를 벌여 모두 100여기의 고인돌을 무더기로 발견했다고 9일 밝혔다.
이 고인돌은 반경 1㎞ 안에 5개 군(群) 형태로 밀집돼 있으며
고인돌 외에도 대형 고인돌의 하부구조로 추정되는 유적도 추가로 발견됐다.
인하대 박물관 견수찬 학예연구사는 “대곡동 고인돌 군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전북 고창, 전남 화순, 인천 강화 등 고인돌 군을 제외하고 중부 내륙지방에서 발견된 고인돌 군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이라고 말했다.
인하대 박물관은 고인돌이 발견된 장소가 가현산 주변의 낮은 구릉지인데다 한강 하류에 펼쳐진 넓은 퇴적평원을 끼고 있어 청동기시대의 집단 거주지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이번에 발견된 고인돌 대부분은 사유지에 위치해 있어 훼손 정도가 심해 문화재 지정 등이 시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학술조사를 의뢰한 인천 서구는 문화재청과 협의해 고인돌 보호 방안을 마련한 뒤 이곳에 고인돌 공원과 박물관 등을 지을 계획이다.
인천에서 고인돌이 처음 발견된곳은 1927년 학익동 이었다.
그 이후 1957 년도에 발견된 주안 고인돌,
1962년 에 발견된 문학산 도천현 고인돌이 있다.
이렇게 고인돌이 흩어져 발굴되는것을 보면
인천지역에는 집단적이라기 보다는 산재하여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다고 볼수있겠다.
사람이 모인곳에 분명 죽음은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곤돌재 현장에서의 사진(방향을 바꿔 사진을 찍어보았다.)
영종에도 고인돌 군 이 한곳 있다.
이 지석묘는
구읍에서 약 4 키로 들어온 영종초등학교를 지나 중촌마을과 관창마을 의 경계인
내가 살던 집 뒷산 정상에 이제는 서있지 못하고 뉘어져 있는 돌군이 1개 남아 있다.
큰 규모는 아니지만 받침돌 2 개와 위를 덮었던 돌 1 개가 고스란히 뉘어져 보전되어 있는것이
다.
이 고인돌은
지난 1962 년 인천고등학교 향토반 학생들에 의해 발견되어 외부에 알려졌으며
1963 년 6 월 인천시립박물관 이 최숙경교수와 공동으로 발굴했다.
그때 그곳에서 토기등 문화재 유물이 발견되었던 바도 있다.
발굴 당시 고인돌의 좌향은 곤좌인향 으로 석질은 규암 이었으며
개석의 크기는 좌우폭 160 센티미터, 전후폭 130센티미터, 두께가 15 센티미터 정도였고
이보다 작은규모의 지석묘 2 기가 더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확인할수 없다.
최숙경교수의 분석으로는
이러한 유형은 선사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조성되었던 유형으로
이 고인돌의 연대는 최고 선사시대 일것으로 추측되어
영종에 인간이 살았다고 하는 신석기 시대와 시기를 같이하고 있슴을 알수있다.
( 인천시립박물관 조사보고서 참조, 1966년도 )
(1966, 최숙경,영종도 운남리 지석묘, 김애마박사 이화근속40주년기념논문집,이화여대출판부)
한편으로
생존하는 노인들의 구전으로는
이 고인돌이 묘지가 아니라 고대 제단으로 사용한 소위 돌멘 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이 돌위에 제물을 차려놓고 중국대륙을 향해 매년 산신제를 올렸다고 전하기도하며
국태민안과 마을의 안녕, 그리고 풍년을 염원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 의식이 단절된 시기는 알수가 없다.
나의 견해로는 설득력이 없는 소수설일 뿐이다
중촌과 관창마을, 그리고 잔다리를 오가던,
그러니까
구읍- 전소간 회주도로 중간 (중구 운남동 32 - 1 번지)에서 북쪽방향 산으로 진입하여
잔다리와 관창마을 방향으로 가는, 사람의 머리 가르마와 같은 모양의 좁은 산속 오솔길을
일명 " 곤돌재" "고들재" 라고 예로부터 칭 하기도 했으며 (그 오솔길 옆에 고인돌이 있음)
지금도 노년층은 그렇게 칭하고 있으나
교통의 발달로 통행로로 이용하지 않게되면서 모두에게 그 명칭은 잊혀지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