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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연중제9주간목요일(100603.목)

김대철대철베드로 2010. 6. 3. 03:25

<연중 제9주간 목요일>(2010. 6. 3. 목)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사랑하라.”

 

신학교 입학 직전 마지막 성소자 피정 때였습니다.

마지막 날 아침을 굶기더니 오백 원씩 주면서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오전 동안 그 돈을 쓰면서 돌아다니다가 돌아와서 발표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다른 친구들의 발표를 들으면서 많이 감동 받았습니다.

어떤 친구는 그 돈으로 장미 다섯 송이를 사서

(그 당시는 장미 한 송이가 백 원이었을 때였습니다.)

근처 병원에 가서 혼자 외롭게 누워 있는 환자들을 위로했다고 했습니다.

 

어떤 친구는 그 돈으로 담배 한 갑을 사서

환경 미화원들이 모이는 곳에 가서 그분들을 위문했다고 했습니다.

어떤 친구는 그 돈으로 붕어빵 한 봉투를 사서 가지고 들어와

(그 당시엔 오백 원으로도 붕어빵을 많이 살 수 있었습니다.)

아침을 굶고 배고프다고 투덜거리는 성소자 친구들과 나눠 먹었습니다.

 

저는 교구청을 나서는 순간 마주친 거지 노인에게

그냥 그 돈을 다 주었습니다.

그 돈으로 익산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집에 가서 혼자 밥을 먹고 온 친구도 있었습니다.

 

똑같은 오백 원이었는데, 장미가 되기도 하고 붕어빵이 되기도 하고...

저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그 친구들이 부럽기도 하고,

그들의 행동에 감동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입니다.

장미꽃과 담배와 붕어빵을 샀던 그 친구들은 신학교에 입학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성적이 좀 모자랐던 것 같습니다.

그 마음에는 사랑이 넘쳐흘렀지만.... 성적은 모자랐다는...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온 친구는 신학생이 되었지만 중간에 나갔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사랑을 실천하더라도 공부를 먼저 해야 한다.”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그 친구들이 사랑을 실천한 것은 신학교 입학 여부와는 상관없다고.

평소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나온 것뿐이라고.

 

잘 보이려고 의도적으로 선행을 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아무래도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선행과 사랑은 그냥 저절로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친구들이 평소에도 그렇게 착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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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때였나, 어린 시절의 기억이 하나 떠오릅니다.

지금은 보기 어렵지만,

그 시절, 환경 미화원들이 리어카에 쓰레기를 산처럼 싣고서

힘들게 끌고 가는 모습을 자주 보았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그렇게 쓰레기가 산처럼 쌓인 리어카 한 대가

오르막길을 힘들게 겨우겨우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여선생님이, (그 선생님은 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그 리어카를 뒤에서 밀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쓰레기의 대부분은 먼지가 풀풀 날리는 연탄재였습니다.

정장 차림을 하고 출근을 하던 미혼의 젊은 여선생님이

전혀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연탄재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리어카를 밀어 준다....

제 눈에는 그 선생님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그날 이후 저도 그 선생님을 흉내 내면서 쓰레기 리어카를 밀어주곤 했습니다.

 

학년이 달라서 그 선생님이 무슨 과목을 담당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그날의 모습만큼은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합니다.

어떤 수업보다도 더 진한 감동의 기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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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을 보면,

길 가던 나그네가 하룻밤 묵게 해달라고 청하는 장면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요즘에는 그렇게 부탁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어린 시절에도 저희 집에 그런 나그네가 가끔 찾아왔습니다.

저희 집이 깊은 산골짜기에 있었는데,

고개를 넘어가려는 나그네가 밤늦게 찾아와서는

하룻밤 묵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일이 가끔 있었던 것입니다.

 

저의 어머니는 그런 나그네를 거절하지 않고 다 받아들였습니다.

집이라고 해봐야 초가삼간 오두막이었는데...

저는 그 시절에 그게 궁금했습니다.

동네에 좋은 집, 잘 사는 집도 많은데,

왜 제일 가난하고 초라한 오두막집으로 와서 부탁할까, 라고.

 

그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나그네들은 몸이 편한 것보다 마음이 편안한 쪽을 선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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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코 12,30).”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코 12,31).”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한다는 말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

돈 잘 벌고 출세하는 무슨 이상한 원리라고 내세운 사람도 있지만,

그건 터무니없는 짓이고...)

 

사랑이란 평소의 마음 그대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평소의 마음을 사랑으로 갈고 닦아야 합니다.

 

사랑이란 목숨을 걸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까워서 남기는 부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 하는 것입니다.

네 마음이 내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주는 쪽은 선행을 했다고 혼자서 흐뭇해하는데,

받는 쪽은 마음이 몹시 불편해져 있다면...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받는 쪽이 불편해하는 것을 자존심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는 데서 오는 불편함입니다.

“기껏 주었더니 받고서도 고맙다고 하지도 않더라.”

라고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받은 사람이 고맙다고 안 하는 것은 실제로 고맙지 않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 경우에는 주는 사람이 더 반성해야 합니다.

어떤 태도로 주었나, 무엇을 주었나.......

 

자기가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을, 버리기 아까우니까 주었다면,

그걸 누가 고맙다고 하겠습니까?

자기도 배고픈 것을 참고 먼저 먹으라고 줄 때,

그때가 진짜로 고마운 때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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