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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부활의 의미-정순택 신부(가르멜 수도회)
김대철대철베드로
2010. 3. 27. 09:50
예수 부활사건은 그리스도교 신앙 운동의 출발점인 동시에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 신앙의 정수다. 그러나 부활사건 자체를 눈으로 목격한 증인은 아무도 없고, 또 어느 복음사가도 부활사건을 묘사하지 않는다. 예수 부활은 그만큼 중요하면서도 또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다.
부활사건은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사건과 부활 그 자체, 빈무덤과 발현사화, 그리고 예수승천과 성령강림까지를 함께 일컫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부활의 의미를 신학적으로 규명해 보는 것이 아니라 부활사건 안에서 우리가 함께 음미해보고 싶은 몇 가지 의미들을 다루고자 한다.
먼저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와 만남은 그분과 '새로운 관계'에 들어감을 시사한다. 이는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는 새로운(더 진전된) 호칭으로 부르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부활한 예수와 만남이 그분과 새로운 관계로 들어간다는 사실은 막달라 마리아와 대화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요한 20,11-18). 막달라 마리아는 처음에 부활한 예수를 몰라보지만 예수가 '마리아'라고 이름을 부르자 그 순간 예수를 알아본다. 여기서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당시에 이름은 존재의 본질을 담고 있다고 여겼다. 따라서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그 존재의 본질을 회복시켜 주는 기능을 갖는 것이었다. 나아가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새로운 창조와도 연결됐다. 부활한 예수와 만남은 '새로운 창조물'이 되게 하며, 내 안에 '새로운 창조'를 이루게 하는 사건이었다.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불러 주고 있다. 우리는 일상의 소란스러움과 소음 속에서 살고 있지만 이웃을 통해 우리를 부르는 예수의 음성을 들어보자. 우리 삶의 외면으로 향해 있는 우리 관심을 내면으로 돌려 보자. 우리 이름을 불러주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부활사건에서 우리가 함께 음미해보고 싶은 두번째 점은 성서에서 예수의 부활을 표현하고 있는 단어의 특별한 형태이다.
신약성서에서 '부활하다'를 표현하는 희랍어 동사 두개를 꼽는다면 하나는 '일어나다'(ανιστημι)이고, 다른 하나는 '일으키다, 일어나다'(εγειρω)이다. 신약성서에서 예수의 부활을 표현할 때는 거의 예외 없이 수동태 꼴을 쓰고 있다. 이를 '신적 수동태'라고 하는데, 예수 스스로 일어났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를 일으켜주셨다는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이러한 수동태 쓰임을 통해 성부께 모든 것을 맡기는 예수의 완전한 의탁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성자 예수가 성부께 자신을 온전히 내어맡기는 '거룩한 의탁','거룩한 수동성'을 음미해야 한다. 자동차와 컴퓨터로 대변되는 현대 문화는 '나'의 주도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각자가 삶의 주인공이라는 긍정적 단계를 넘어 '나'가 하느님 위치까지 차지하고자 하는 '능동성의 과잉'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시대 풍조에서 예수 부활은 하느님 아버지 뜻에 온전히 모든 것을 의탁하고, 하느님이 우리 삶의 중심임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모든 인간이 갈구하고 있는 '참 행복'은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 삶의 기준이 될 때, 그리고 그와 같은 삶을 살 때 하느님 선물로서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다.
또한 예수 부활은 먼저 돌아가신 분들과 우리를 연결시켜 준다. 고린토 1서 15장 13-16절을 보면 사도 바오로는 같은 말을 세번이나 반복하고 있다. 즉 만일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일으켜지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세상을 떠난 이들 가운데 처음으로 부활한 사건인 동시에 세상을 떠난 이들의 부활을 보증하는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가 이미 떠나 보낸 사랑하는 이들이 참 생명이신 하느님 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다는 보증이며, 원동력이고 근거이다. 이미 돌아가신 분들과 이 세상에 살아있는 우리들 사이에는 부활한 그리스도가 연결점으로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우리가 부활한 그리스도의 참 생명에 더 깊이 동참할수록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과 더 깊이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생과 사의 절대적 이별이 아니다. 먼저 떠나간 이들과 사랑했던 순간들이 과거라는 박제된 시간에 묻히는 것이 아니라 부활한 그리스도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사랑의 관계로 여전히 남는 것이다.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이들이 그와 같은 사랑의 관계를 이어가는 것은 우리 이웃과 좀더 많은 사랑은 나누는 것뿐이다.
정리=남정률 기자njyul@pbc.co.kr">njyul@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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