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갑 의원..
[스포츠서울닷컴ㅣ손현석 박형남기자] “어린 시절 재미난 추억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어요.(웃음)”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가 추억여행을 떠나기 전 던진 말이다. 어린 시절 자칭 ‘맹랑했다’는 강 대표는 학창시절 사고뭉치로 이름을 날렸다. 초등학교 시절 반 친구들 사이에서 대장처럼 행동해 선생님들까지 부담스러워 했다고. 그 탓에 나쁜 짓을 하면 모든 죄를 뒤집어 써야 했다.
물에 빠져 사경을 헤매거나 독사에 물려 한 달 가까이 입원했던 추억 등을 더듬는 강 대표는 범상치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지독한 가난 탓에 정작 유년시절을 돌이켜 볼 수 있는 추억의 사진이 단 한 장도 없는 눈물겨운 사연도 숨어있다.
“20대 초반이후의 사진들만 소장하고 있다”며 아쉬움을 토로한 강 대표는 아쉽지만 그가 보관하고 있는 앨범 속 사진을 꺼내들고 추억에 잠겼다.
존경하는 아버지…20년 넘게 머슴살이
강 대표에게 가장 존경하는 분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치매로 돌아가신 아버지”라고 말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 덕분에 농민운동을 할 수 있었고, 지금의 정치인이 될 수 있었기 때문.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 그의 아버지는 9살 때부터 부잣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다. 20여년 동안 머슴살이를 한 댓가로 곡괭이 하나만을 가지고 1,000평의 ‘논’을 장만했다.
아버지는 머슴살이를 한 부잣집 주인이 6만평 넘는 산을 팔려고 하자 그 산을 구입하기도 했다. 이 산을 농장으로 개척하길 원하던 강 대표를 위해 손수 나선 사람 역시 아버지였다. 가난했지만 자식들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진 아버지의 희생정신을 생각하며 강 대표 자신도 국민들의 ‘종’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누나는 수녀님'...강 대표 세례명은 '로베트로'
수녀가 된 누님과 가족들이 함께 한 사진이 인상적이다. 수녀가 된 누나로 인해 온 가족이 ‘카톨릭 집안’이 됐고, 강 대표도 ‘로베트로’라는 가톨릭 세례명을 받았다.
그리고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발생하면서 사천 성당에 온 신부님의 권유를 받고 수도자 길에 들어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기도 했다. 당시 카톨릭 농민회 운동을 했던 강 대표는 “수도자로서도 어려운 사람을 구원 할 길이 있다”는 신부님의 조언을 듣고 30대 초반부터 38살까지 7년 동안 수도원 생활을 했다.
농촌 총각 장가보내기…“장가 못 보내면 수염 안 깎아!”
8년간 수도생활을 한 강 대표는 다시 ‘농민운동’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농민들이 자살하는 등 농민문제가 심각하다고 판단, 농촌 총각 결혼대책 위원회를 운영하며 간사를 맡았다. 그는 이곳에서 지금의 부인을 만났다.
강 대표는 “한 쌍이라도 결혼을 성사시킬 때까지 머리카락, 수염을 깎지 않았다”며 “1년 동안 한 쌍도 맺어주지 못해 수염이 한짐인 적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후 자연스러운 것이 좋다는 마음으로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강 대표는 앞으로도 수염없는 강기갑이 될 생각이 없다며 현 상태를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 대표 장가가는 날…“대통령보다 농군이 더 가치 있다”
강 대표는 농촌 총각 결혼대책 위원회에서 활동했을 당시 함께 일했던 14살 연하의 도시 여성 박영옥 여사와 결혼했다. 20쌍의 결혼을 성사시킨 후 21번째 커플의 주인공이 바로 자신이었던 것이다. 강 대표는 “해가 뜨면 눈을 뜨고 해지면 자고, 한 달에 한 번 지리산도 갈 수 있으니 대통령보다 농사꾼이 더 가치 있고 좋은 직업”이라는 말로 청혼했다고 한다.
수염을 말끔히 깎고 전통혼례 복장을 입은 강 대표의 모습이 새롭게 보인다.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뚝심의 사나이지만 신부의 눈물에 난감해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당시 강 대표는 정장 한 벌을 혼수로 받았지만, 지금까지도 입지 않아 먼지만 수북히 쌓여있다고 한다.
파격적 변신…“청바지 입고 춤까지!”
18대 총선을 위해 자신의 오피스텔 전세금을 빼고, 선거운동에 참여했던 강 대표. 경남 사천에서 한나라당 이방호 전 의원을 눌렀을 당시 별명은 ‘골리앗을 이긴 다윗’이었다. 그렇다면 골리앗을 이긴 다윗의 원천적인 힘은 무엇일까. 톡톡 튀는 춤 솜씨와 청바지가 한몫(?) 했단다.
이에대해 강 대표는 “대학생들과 좀더 가깝게 지내려고 했던 생각의 연장선이었다”고 말한다. 파격적인 변신 덕택이었을까. 청바지 차림으로 율동을 하며 선거운동을 하는 강 대표의 모습이 지금봐도 더없이 흥겨워 보인다.
다리미질은 기본…내 집은 의원실(?)
강 대표는 토종 기러기 아빠다. 가족들은 사천에서 농사를 짓고 있고, 강 대표는 서울에서 거주하고 있다. 덕분에 다리미질 등은 기본항목에 포함될 정도로 집안일에도 이골이 났다. 혼자 지내다 보니 간혹 일이 바쁠 때는 의원실에서 잠을 청할 때도 있다. 그래서일까.
강 대표의 의원실은 다른 의원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언제든지 이곳에서 책상만 치우면 잠을 청할 수 있도록 평상을 놓은 방으로 개조했다. 때문에 신발을 벗고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한 때 서울에서 집을 구하지 못해 의원실에서 숙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아픔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국민 위해 ‘주먹 불끈’…“내 한 몸 쯤이야~”
지난해 촛불투쟁 때 시민들과 함께 촛불투쟁에 참석해 도포자락을 휘날리는 강 대표. 어느 영화 주인공보다 카리스마가 넘치는데 묘하게 누군가를 닮았다. 그 날, 강 대표를 본 국민들 역시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강달프!”
강 대표의 수염자락과 근엄한 표정이 영화 '반지의 제왕'에 등장한 마법사 ‘간달프’와 닮았다며 붙여진 별명이었다. 강 대표의 마음 역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애썼던 간달프와 닮았다. 강 대표는 늘 “국민들의 뜻에 역행한다면 이 한 몸 희생시키겠다”며 각오를 불사르고 있다.
청와대 앞 시위…“단식은 중지하고 회복이 더 힘들어”
한미 FTA를 반대하며 청와대 앞에서 강 대표가 단식투쟁을 하던 당시 사진 한 장. 강 대표는 “단식 투쟁을 할 때보다 단식을 중지하고 원상태로 회복하는 과정이 더 힘들다”고 토로했다. 강 대표는 혼자서 단식을 하거나 의원단과 함께 단식을 자주해 왔었다. 한미 FTA 등을 비롯해 수많은 일들이 벌어질 때마다 ‘단식’이라는 강수를 두곤 했다.
그러나 ‘단식전문가’ 강 대표는 “최근 들어 건강이 많이 안 좋아졌다”며 “단식을 한 이후 여전히 체중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고, 단식하는 것도 점점 힘들어진다”고 털어놨다. 그렇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거꾸로 가는 정책을 펼친다면 앞으로도 단식투쟁을 불사하겠다는 각오다.
가장 사랑스러운 가족들…“마음은 떨어져도 몸은 하나”
강 대표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는 바로 가족들이다. 슬하에 3남1녀를 뒀다. 첫째 주원과 둘째 주호는 현재 충북 제천에 있는 간디학교에서 기숙사생활을 하고 있다. 막내는 사천에서 부인과 함께 지내고 있다고 한다. 비록 아이들과 몸은 떨어져 있지만 하루에 3번씩 전화통화를 할 정도로 착한 아버지다.
특히 막내와는 호랑이 놀이, 보물찾기 등을 즐기는데 가끔 강 대표의 수염이 막내의 장난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 삼보일배 등으로 인해 집에 자주 내려가지 못하는 까닭에 수화기 너머 아이들은 “언제 오느냐”고 아우성이다. 그럴 때마다 강 대표는 “가슴이 아프다”고 말한다.
[스포츠서울닷컴 정치팀 ptoday@media.sportsseoul.com] 폴리피플들의 즐거운 정치뉴스 'P-TODAY'
[스포츠서울닷컴ㅣ손현석 박형남기자] “어린 시절 재미난 추억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어요.(웃음)”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가 추억여행을 떠나기 전 던진 말이다. 어린 시절 자칭 ‘맹랑했다’는 강 대표는 학창시절 사고뭉치로 이름을 날렸다. 초등학교 시절 반 친구들 사이에서 대장처럼 행동해 선생님들까지 부담스러워 했다고. 그 탓에 나쁜 짓을 하면 모든 죄를 뒤집어 써야 했다.
물에 빠져 사경을 헤매거나 독사에 물려 한 달 가까이 입원했던 추억 등을 더듬는 강 대표는 범상치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지독한 가난 탓에 정작 유년시절을 돌이켜 볼 수 있는 추억의 사진이 단 한 장도 없는 눈물겨운 사연도 숨어있다.
“20대 초반이후의 사진들만 소장하고 있다”며 아쉬움을 토로한 강 대표는 아쉽지만 그가 보관하고 있는 앨범 속 사진을 꺼내들고 추억에 잠겼다.
존경하는 아버지…20년 넘게 머슴살이
강 대표에게 가장 존경하는 분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치매로 돌아가신 아버지”라고 말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 덕분에 농민운동을 할 수 있었고, 지금의 정치인이 될 수 있었기 때문.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 그의 아버지는 9살 때부터 부잣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다. 20여년 동안 머슴살이를 한 댓가로 곡괭이 하나만을 가지고 1,000평의 ‘논’을 장만했다.
아버지는 머슴살이를 한 부잣집 주인이 6만평 넘는 산을 팔려고 하자 그 산을 구입하기도 했다. 이 산을 농장으로 개척하길 원하던 강 대표를 위해 손수 나선 사람 역시 아버지였다. 가난했지만 자식들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진 아버지의 희생정신을 생각하며 강 대표 자신도 국민들의 ‘종’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누나는 수녀님'...강 대표 세례명은 '로베트로'
수녀가 된 누님과 가족들이 함께 한 사진이 인상적이다. 수녀가 된 누나로 인해 온 가족이 ‘카톨릭 집안’이 됐고, 강 대표도 ‘로베트로’라는 가톨릭 세례명을 받았다.
그리고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발생하면서 사천 성당에 온 신부님의 권유를 받고 수도자 길에 들어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기도 했다. 당시 카톨릭 농민회 운동을 했던 강 대표는 “수도자로서도 어려운 사람을 구원 할 길이 있다”는 신부님의 조언을 듣고 30대 초반부터 38살까지 7년 동안 수도원 생활을 했다.
농촌 총각 장가보내기…“장가 못 보내면 수염 안 깎아!”
8년간 수도생활을 한 강 대표는 다시 ‘농민운동’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농민들이 자살하는 등 농민문제가 심각하다고 판단, 농촌 총각 결혼대책 위원회를 운영하며 간사를 맡았다. 그는 이곳에서 지금의 부인을 만났다.
강 대표는 “한 쌍이라도 결혼을 성사시킬 때까지 머리카락, 수염을 깎지 않았다”며 “1년 동안 한 쌍도 맺어주지 못해 수염이 한짐인 적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후 자연스러운 것이 좋다는 마음으로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강 대표는 앞으로도 수염없는 강기갑이 될 생각이 없다며 현 상태를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 대표 장가가는 날…“대통령보다 농군이 더 가치 있다”
강 대표는 농촌 총각 결혼대책 위원회에서 활동했을 당시 함께 일했던 14살 연하의 도시 여성 박영옥 여사와 결혼했다. 20쌍의 결혼을 성사시킨 후 21번째 커플의 주인공이 바로 자신이었던 것이다. 강 대표는 “해가 뜨면 눈을 뜨고 해지면 자고, 한 달에 한 번 지리산도 갈 수 있으니 대통령보다 농사꾼이 더 가치 있고 좋은 직업”이라는 말로 청혼했다고 한다.
수염을 말끔히 깎고 전통혼례 복장을 입은 강 대표의 모습이 새롭게 보인다.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뚝심의 사나이지만 신부의 눈물에 난감해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당시 강 대표는 정장 한 벌을 혼수로 받았지만, 지금까지도 입지 않아 먼지만 수북히 쌓여있다고 한다.
파격적 변신…“청바지 입고 춤까지!”
18대 총선을 위해 자신의 오피스텔 전세금을 빼고, 선거운동에 참여했던 강 대표. 경남 사천에서 한나라당 이방호 전 의원을 눌렀을 당시 별명은 ‘골리앗을 이긴 다윗’이었다. 그렇다면 골리앗을 이긴 다윗의 원천적인 힘은 무엇일까. 톡톡 튀는 춤 솜씨와 청바지가 한몫(?) 했단다.
이에대해 강 대표는 “대학생들과 좀더 가깝게 지내려고 했던 생각의 연장선이었다”고 말한다. 파격적인 변신 덕택이었을까. 청바지 차림으로 율동을 하며 선거운동을 하는 강 대표의 모습이 지금봐도 더없이 흥겨워 보인다.
다리미질은 기본…내 집은 의원실(?)
강 대표는 토종 기러기 아빠다. 가족들은 사천에서 농사를 짓고 있고, 강 대표는 서울에서 거주하고 있다. 덕분에 다리미질 등은 기본항목에 포함될 정도로 집안일에도 이골이 났다. 혼자 지내다 보니 간혹 일이 바쁠 때는 의원실에서 잠을 청할 때도 있다. 그래서일까.
강 대표의 의원실은 다른 의원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언제든지 이곳에서 책상만 치우면 잠을 청할 수 있도록 평상을 놓은 방으로 개조했다. 때문에 신발을 벗고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한 때 서울에서 집을 구하지 못해 의원실에서 숙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아픔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국민 위해 ‘주먹 불끈’…“내 한 몸 쯤이야~”
지난해 촛불투쟁 때 시민들과 함께 촛불투쟁에 참석해 도포자락을 휘날리는 강 대표. 어느 영화 주인공보다 카리스마가 넘치는데 묘하게 누군가를 닮았다. 그 날, 강 대표를 본 국민들 역시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강달프!”
강 대표의 수염자락과 근엄한 표정이 영화 '반지의 제왕'에 등장한 마법사 ‘간달프’와 닮았다며 붙여진 별명이었다. 강 대표의 마음 역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애썼던 간달프와 닮았다. 강 대표는 늘 “국민들의 뜻에 역행한다면 이 한 몸 희생시키겠다”며 각오를 불사르고 있다.
청와대 앞 시위…“단식은 중지하고 회복이 더 힘들어”
한미 FTA를 반대하며 청와대 앞에서 강 대표가 단식투쟁을 하던 당시 사진 한 장. 강 대표는 “단식 투쟁을 할 때보다 단식을 중지하고 원상태로 회복하는 과정이 더 힘들다”고 토로했다. 강 대표는 혼자서 단식을 하거나 의원단과 함께 단식을 자주해 왔었다. 한미 FTA 등을 비롯해 수많은 일들이 벌어질 때마다 ‘단식’이라는 강수를 두곤 했다.
그러나 ‘단식전문가’ 강 대표는 “최근 들어 건강이 많이 안 좋아졌다”며 “단식을 한 이후 여전히 체중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고, 단식하는 것도 점점 힘들어진다”고 털어놨다. 그렇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거꾸로 가는 정책을 펼친다면 앞으로도 단식투쟁을 불사하겠다는 각오다.
가장 사랑스러운 가족들…“마음은 떨어져도 몸은 하나”
강 대표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는 바로 가족들이다. 슬하에 3남1녀를 뒀다. 첫째 주원과 둘째 주호는 현재 충북 제천에 있는 간디학교에서 기숙사생활을 하고 있다. 막내는 사천에서 부인과 함께 지내고 있다고 한다. 비록 아이들과 몸은 떨어져 있지만 하루에 3번씩 전화통화를 할 정도로 착한 아버지다.
특히 막내와는 호랑이 놀이, 보물찾기 등을 즐기는데 가끔 강 대표의 수염이 막내의 장난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 삼보일배 등으로 인해 집에 자주 내려가지 못하는 까닭에 수화기 너머 아이들은 “언제 오느냐”고 아우성이다. 그럴 때마다 강 대표는 “가슴이 아프다”고 말한다.
[스포츠서울닷컴 정치팀 ptoday@media.sportsseoul.com] 폴리피플들의 즐거운 정치뉴스 'P-TO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