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Catholic/그분과 함께..
[생활 속의 복음] 더욱 보편적 기도, 이타적 기도
김대철대철베드로
2004. 10. 15. 09:50
아이들과 함께 기도하는 시간은 참으로 의미있는 시간인 동시에 재미있는 순간입니다. 언젠가 한 아이의 간절한 청원기도를 듣고 다들 '뒤집어졌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너무도 단순하고 순수한 아이였기에 기도 역시 너무나 솔직했습니다.
이런저런 청원기도들이 대충 끝난 후의 일이었습니다. 마무리 기도인 '주님의 기도'가 언제 시작되나 다들 기다리고 있는데, 그 아이가 큰 목소리로 자신의 간절한 바람을 솔직하게 외쳤습니다.
"주님, 제발 저 장가들게 좀 해주십시오!"
아이들은 담당 수사님의 심각해진 얼굴 때문에 대놓고 웃지는 못하고 속으로 웃느라고 다들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 와중에도 다들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를 빼먹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아이는 기도시간이 끝난 후 사감 수사님에게 불려가 장시간에 걸친 '정신교육'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 아이는 때로 '오버'도 많이 했지만 천사같은 마음을 지닌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 특기는 청원기도였습니다. 7~8개 청원기도 가운데, 절반을 도맡아서 하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더욱 기특한 것은 아이가 바치는 청원기도의 내용이었지요. 언제나 나가서 고생하고 있는 친구들, 병원에 입원해 있는 친구들, 아픈 동생들, 재판을 앞두고 초조해하는 아이들을 위해서 아주 간절히 기도하곤 했습니다.
어디서 그런 정보를 입수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아이는 언제나 기도 거리들을 잔뜩 가지고 있습니다. 그 아이의 간절한 기도 덕분인지 나간 아이들이 별탈 없이 귀가하곤 했습니다.
그 아이의 강력한 '기도발', 그 배경에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봤을 때, 그 아이가 바치던 모든 기도는 다 이웃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리라는 제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려봅니다.
그 아이를 생각하면서 '나는 과연 무엇을 청하고 있는가?'하고 반성해 봤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부끄럽게도 너무나 이기적인 기도를 바쳐왔습니다. 내 한 몸 고통이 없기를, 내가 행하는 사목이 무난히 돌아가도록, 만사형통하기를, 건강 잃지 않기를, 나와 연관된 사람들 일이 잘 풀리기를 등…. 정말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기도였습니다.
다시 한번 한 차원 높은 기도, 간절한 마음이 담긴 기도, 순수하고 진실한 기도를 바쳐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그 기도는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바치셨던 기도이겠지요.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라고 간구하셨던 예수님 기도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고통을 더욱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힘을 청하는 기도, 더욱 보편적 기도, 이타적 기도를 바치고 싶습니다.
나 자신의 사리사욕만이 아니라 이웃의 선익을 위한 간절한 기도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기꺼이 들어주신다는 것을 늘 체험하며 삽니다. 아이들 미래를 위한 투자에 도움을 청할 때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여러 천사들을 보내시어 간단하게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바치는 모든 기도가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의 결핍과 고통에로 향하는 이타적인 기도, 진지한 기도, 간절한 기도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언제 단 한번이라도 간절히 기도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밤새워 눈물을 펑펑 쏟으며 예수님께 매달려 본 적이 있는지요? 간절한 기도는 하늘까지 닿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절대로 외면하지 못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간절함과 절박함이 담긴 기도, 열과 성이 지극한 기도, 이웃 선익을 위해 바치는 순수한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자주 최선의 노력이나 간절한 기도도 해보지 않고 당면한 문제를 쉽게 포기하곤 합니다. 그리고 일이 잘 안 풀린 결과에 대해 하느님 뜻으로 돌리며 우리 자신을 합리화시키곤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릇된 자세는 하느님 존재나 역할을 지극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틀 안에 규정해놓고 초월적이며 초자연적인 하느님 역할을 무시하는 경향입니다.
하느님은 진리의 하느님, 정의의 하느님이시기도 하지만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우리 인간들 사고방식이나 기준을 여지없이 깨뜨리시는 파격적인 하느님이시며, 때론 불가능을 가능케하시는 능력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으로 인한 불가능 앞에서 좌절과 포기만 거듭할 것이 아니라 최선의 모든 인간적 노력과 함께 하느님의 개입과 도우심도 적극적으로 구하는 이 한 주간이 되길 바랍니다.
이런저런 청원기도들이 대충 끝난 후의 일이었습니다. 마무리 기도인 '주님의 기도'가 언제 시작되나 다들 기다리고 있는데, 그 아이가 큰 목소리로 자신의 간절한 바람을 솔직하게 외쳤습니다.
"주님, 제발 저 장가들게 좀 해주십시오!"
아이들은 담당 수사님의 심각해진 얼굴 때문에 대놓고 웃지는 못하고 속으로 웃느라고 다들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 와중에도 다들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를 빼먹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아이는 기도시간이 끝난 후 사감 수사님에게 불려가 장시간에 걸친 '정신교육'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 아이는 때로 '오버'도 많이 했지만 천사같은 마음을 지닌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 특기는 청원기도였습니다. 7~8개 청원기도 가운데, 절반을 도맡아서 하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더욱 기특한 것은 아이가 바치는 청원기도의 내용이었지요. 언제나 나가서 고생하고 있는 친구들, 병원에 입원해 있는 친구들, 아픈 동생들, 재판을 앞두고 초조해하는 아이들을 위해서 아주 간절히 기도하곤 했습니다.
어디서 그런 정보를 입수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아이는 언제나 기도 거리들을 잔뜩 가지고 있습니다. 그 아이의 간절한 기도 덕분인지 나간 아이들이 별탈 없이 귀가하곤 했습니다.
그 아이의 강력한 '기도발', 그 배경에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봤을 때, 그 아이가 바치던 모든 기도는 다 이웃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리라는 제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려봅니다.
그 아이를 생각하면서 '나는 과연 무엇을 청하고 있는가?'하고 반성해 봤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부끄럽게도 너무나 이기적인 기도를 바쳐왔습니다. 내 한 몸 고통이 없기를, 내가 행하는 사목이 무난히 돌아가도록, 만사형통하기를, 건강 잃지 않기를, 나와 연관된 사람들 일이 잘 풀리기를 등…. 정말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기도였습니다.
다시 한번 한 차원 높은 기도, 간절한 마음이 담긴 기도, 순수하고 진실한 기도를 바쳐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그 기도는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바치셨던 기도이겠지요.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라고 간구하셨던 예수님 기도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고통을 더욱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힘을 청하는 기도, 더욱 보편적 기도, 이타적 기도를 바치고 싶습니다.
나 자신의 사리사욕만이 아니라 이웃의 선익을 위한 간절한 기도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기꺼이 들어주신다는 것을 늘 체험하며 삽니다. 아이들 미래를 위한 투자에 도움을 청할 때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여러 천사들을 보내시어 간단하게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바치는 모든 기도가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의 결핍과 고통에로 향하는 이타적인 기도, 진지한 기도, 간절한 기도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언제 단 한번이라도 간절히 기도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밤새워 눈물을 펑펑 쏟으며 예수님께 매달려 본 적이 있는지요? 간절한 기도는 하늘까지 닿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절대로 외면하지 못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간절함과 절박함이 담긴 기도, 열과 성이 지극한 기도, 이웃 선익을 위해 바치는 순수한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자주 최선의 노력이나 간절한 기도도 해보지 않고 당면한 문제를 쉽게 포기하곤 합니다. 그리고 일이 잘 안 풀린 결과에 대해 하느님 뜻으로 돌리며 우리 자신을 합리화시키곤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릇된 자세는 하느님 존재나 역할을 지극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틀 안에 규정해놓고 초월적이며 초자연적인 하느님 역할을 무시하는 경향입니다.
하느님은 진리의 하느님, 정의의 하느님이시기도 하지만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우리 인간들 사고방식이나 기준을 여지없이 깨뜨리시는 파격적인 하느님이시며, 때론 불가능을 가능케하시는 능력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으로 인한 불가능 앞에서 좌절과 포기만 거듭할 것이 아니라 최선의 모든 인간적 노력과 함께 하느님의 개입과 도우심도 적극적으로 구하는 이 한 주간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