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 헌장 4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
CONSTITUTIO PASTORALIS DE ECCLESIA IN MUNDO HUIUS TEMPORIS
GAUDIUM ET SPES
1965. 12. 7.
강대인 번역
차례 |
1. 온 인류 가족과 교회의 긴밀한 결합 2. 공의회는 누구를 향하여 말하는가? 3. 인간에 대한 봉사 |
4. 희망과 고뇌 5. 급격한 변화 6. 사회 질서의 변화 7. 정신과 도덕, 종교의 변화 8. 현대 세계의 불균형 9. 인류의 보편적 열망 10. 인류의 심각한 의문 |
11. 성령의 인도에 따르는 응답 |
12.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 13. 죄 14. 인간의 구조 15. 지성의 존엄, 진리와 지혜 16. 도덕적 양심의 존엄 17. 자유의 우월성 18. 죽음의 신비 19. 무신론의 형태와 근원 20. 체계적 무신론 21. 무신론에 대한 교회의 태도 22. 새 인간 그리스도 |
23. 공의회의 의도 24. 하느님의 계획 안에 있는 인간 소명의 공동체적 특성 25. 개인과 사회의 상호 의존성 26. 공동선의 증진 27. 인간 존중 28. 반대자에 대한 존경과 사랑 29. 모든 사람의 본질적 평등과 사회 정의 30. 개인주의 윤리의 극복 31. 책임과 참여 32. 사람이 되신 말씀과 인간 연대 |
33. 문제 제기 34. 인간 활동의 가치 35. 인간 활동의 규범 36. 현세 사물의 정당한 자율성 37. 죄로 타락한 인간 활동 38. 파스카 신비 안에서 완성된 인간 활동 39. 새 땅과 새 하늘 |
40 교회와 세계의 상호 관계 41. 교회가 개인에게 주고자 하는 도움 42. 교회가 인류 사회에 주고자 하는 도움 43.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인간 활동에 기여하고자 하는 도움 44. 교회가 현대 세계에서 받는 도움 45. 알파와 오메가이신 그리스도 |
46. 서론 |
47. 현대 세계의 혼인과 가정 48. 혼인과 가정의 거룩함 49. 부부 사랑 50. 혼인의 풍성한 열매 51. 부부 사랑과 인간 생명의 존중 52. 혼인과 가정의 행복을 도모하여야 할 모든 사람의 의무 |
53. 서론 |
54. 새로운 생활 양식 55. 문화의 창조자인 인간 56. 문제와 임무 |
57. 신앙과 문화 58. 그리스도의 복음과 인간 문화의 복합적 관계 59. 다양한 문화 형태의 조화 |
60. 문화 혜택에 대한 만인의 권리 인정과 그 실현 61. 전인 교육 62. 문화와 그리스도교 교육의 조화 |
63. 경제 생활의 몇 가지 측면 |
64. 인간에게 봉사하는 경제 발전 65. 경제 발전에 대한 인간의 통제 66. 제거되어야 할 엄청난 경제 사회적 격차 |
67. 노동, 노동 조건, 여가 68. 기업 참여, 세계 경제 구조 참여, 노동 쟁의 69. 모든 사람을 위한 지상 재화 70. 투자와 통화 71. 재산 취득, 재화의 사적 지배, 대토지 72. 경제-사회 활동과 그리스도 왕국 |
73. 현대의 공공 생활 74. 정치 공동체의 본질과 목적 75. 모든 사람의 공공 생활 협력 76. 정치 공동체와 교회 |
77. 서론 78. 평화의 본질 |
79. 전쟁의 야만성 방지 80. 전면 전쟁 81. 군비 경쟁 82. 전쟁의 절대 금지와 전쟁 회피를 위한 국제 협력 |
83. 분쟁의 원인과 그 대책 84. 민족들의 공동체와 국제 기구 85. 경제 분야의 국제 협력 86. 몇 가지 적절한 규범 87. 인구 증가에 관한 국제 협력 88. 원조 제공에 관한 그리스도인들의 임무 89. 국제 공동체에서 활동하는 교회의 효과적 현존 90. 국제 기관에서 수행하는 그리스도인의 역할 |
91. 신자 개인과 지역 교회의 임무 92. 모든 사람의 대화 93. 세계 건설과 그 목표의 성취 |
하느님의 종들의 종 바오로 주교는 거룩한 공의회의 교부들과 더불어
영구적인 기록으로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1)을 공포한다.
온 인류 가족과 교회의 긴밀한 결합
1.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다. 참으로 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든 신자들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 그리스도 제자들의 공동체가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모인 그들은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를 향한 여정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모든 사람에게 선포하여야 할 구원의 소식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그리스도 제자들의 공동체는 인류와 인류 역사에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체험한다.
공의회는 누구를 향하여 말하는가?
2. 그러므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의 신비를 더욱 깊이 고찰한 다음, 이제 교회의 자녀들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뿐 아니라 곧바로 인류 전체를 향하여 말하며, 현대 세계에서 교회의 현존과 활동을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든 이에게 밝히고자 한다.
따라서 공의회는 인간의 세계를, 곧 인류 가족 전체와 인간이 살아가는 온갖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 인류 역사의 무대인 이 세계에는 인간의 노력과 실패와 승리가 새겨져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계가 창조주의 사랑으로 창조되고 보존된다고 믿는다. 죄의 노예 상태에 떨어졌으나,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악의 권세를 쳐부수시고 해방시키신 이 세계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변혁되고 마침내 완성될 것이다.
인간에 대한 봉사
3. 오늘날 인류는 자신의 발명과 자신의 능력을 경탄하면서도 흔히 현대 세계의 변화, 우주 안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 개인 노력과 집단 노력의 의미, 마침내 사물과 인간의 궁극 목적과 관련하여 고뇌에 찬 문제들을 제기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모으신 하느님 백성 전체의 신앙을 증언하고 제시하는 공의회는 그러한 여러 문제에 대하여 인류 가족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그 문제들을 복음에서 이끌어 낸 빛으로 비추어 주고, 교회가 성령의 인도로 그 창립자에게서 받은 구원의 힘을 인류에게 풍부히 제공함으로써, 그 백성이 들어 있는 온 인류 가족에 대한 연대와 존경과 사랑을 가장 웅변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진정 구원을 받아야 하고 인간 사회는 쇄신되어야 한다. 따라서 인간이, 육신과 영혼, 마음과 양심, 정신과 의지를 지닌 단일한 전인간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이야기의 중심 축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공의회는 인간의 숭고한 소명을 천명하고 인간 안에 심어진 신적인 어떤 씨앗을 긍정하며, 이 소명에 응답하는 모든 이의 형제애를 증진하고자 교회의 성실한 협력을 인류에게 제공한다. 교회는 결코 현세적 야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교회는 오로지 하나의 목적을 추구한다. 곧 성령의 인도로 바로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을 계속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오셨으며,2) 심판하시기보다는 구원하시고 섬김을 받으시기보다는 섬기러 오셨다.3)
희망과 고뇌
4. 이러한 임무를 완수하고자 모든 시대에 걸쳐 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여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각 세대에 알맞은 방법으로 교회는 현세와 내세의 삶의 의미 그리고 그 상호 관계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물음에 대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그 세계의 기대와 열망 그리고 때로는 극적이기도 한 그 특성을 인식하고 이해하여야 한다. 현대 세계의 주요한 몇몇 특징들은 다음과 같이 묘사할 수 있다.
오늘날 인류는 그 역사의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시대에는 급격한 변화가 점차 전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다. 인간의 지능과 창조적 노력에서 일어난 변화는 인간 자체를 변화시켜, 개인과 집단의 판단과 열망, 사물과 인간에 대한 사고 방식과 행동 양식을 바꾸고 있다. 이제는 진정한 사회적 문화적 변혁을 말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변혁은 종교 생활에도 미치고 있다.
어떠한 성장의 위기에서나 그러하듯, 이 변혁에도 가볍지 않은 어려움들이 따른다. 이렇듯 인간은 자신의 힘을 그토록 널리 펼치면서도 언제나 그 힘이 인간을 섬기도록 다스리지는 못한다. 인간 정신의 내면을 더욱 깊숙이 파고들려고 노력하면서도 흔히 제 자신에 대해서는 더더욱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회 생활의 법규는 점차 더욱 분명하게 찾아 내면서도, 사회 생활의 방향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인류가 이토록 풍요로운 재화와 능력과 경제력을 누려 본 적은 결코 없었다. 그러나 아직도 세계 인구의 상당수는 기아와 빈곤에 허덕이고 있으며 무수한 사람들이 완전 문맹에 시달리고 있다. 인간이 오늘날처럼 예리한 자유 의식을 가져 본 적이 결코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심리적 예속이 일어나고 있다. 세계는 또한 각자의 상호 의존과 필연적인 연대로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그토록 절감하면서도, 서로 싸우는 세력들이 일으키는 극도의 대립으로 분열되어 있다. 정치, 사회, 경제, 인종, 이념의 극심한 분쟁들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모든 것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전쟁의 위험도 없지 않다. 사상의 교류는 증대되고 있지만, 주요 개념들을 표현하는 말마디 자체가 서로 다른 이념 속에서 아주 다른 뜻을 지니고 있다. 끝으로, 더 나은 현세 생활은 열심히 추구하고 있지만, 정신적 발전은 걸맞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토록 복합적인 상황에 놓인 수많은 우리 동시대인들은 영원한 가치를 참으로 깨닫지 못하고 또 이를 새로운 발견과 조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러기에 희망과 고뇌의 와중에서 동요하고 있는 사람들은 세계의 현재 상황에 대하여 서로 물어 보며 불안에 짓눌려 있다. 그러한 세계 상황은 사람들에게 응답을 촉구하고 또 강요하고 있다.
급격한 변화
5. 오늘날의 정신적 동요와 생활 조건의 변화는 더욱 광범위한 세계 변혁과 직결되어 있다. 그 결과로 정신 형성에서는 수학과 자연 과학 또는 인간 자체를 다루는 과학이 더욱 중시되고, 행동 영역에서는 그러한 과학의 소산인 기술이 더욱더 중시되고 있다. 이러한 과학 정신이 과거와는 다른 문화 형태와 사고 방식을 지어 내고 있다. 기술의 발전은 지구의 면모를 바꾸어 놓고 이제는 우주 정복에 나서고 있다.
인간 지성은 또한 시간에 대한 그 지배 영역을 어느 정도 확장하였다. 역사 지식의 힘으로 과거를 지배하고 예측 노력과 계획화로 미래를 지배하게 되었다. 생물학, 심리학, 사회학의 진보는 인간이 자신을 더 깊이 인식하도록 도와 줄 뿐 아니라 기술을 활용하여 사회 생활에 직접 영향을 미치도록 도와 준다. 동시에 인류는 인구 증가의 예측과 그 조절에 대하여 더욱더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역사 자체의 흐름도 개인이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급격히 빨라지고 있다. 인류 사회는 이제 하나의 공동 운명을 지니게 되어, 더 이상 여러 가지 역사로 흩어질 수 없다. 이렇게 인류는 정적인 세계관에서 더욱 역동적이고 발전적인 세계관으로 넘어가고 있다. 여기에서 수많은 문제들의 방대하고 새로운 복합성이 출현하며, 이는 새로운 분석과 종합을 요구한다.
사회 질서의 변화
6. 그리하여 가부장제의 가족, 씨족, 부족, 부락과 같은 전통적 지역 공동체들과 다양한 집단과 사회의 인간 관계는 날로 더욱 극심한 변화를 겪고 있다.
산업 사회의 형태가 점차 확산되어, 어떤 나라들을 경제적인 풍요로 이끌며 수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사회 생활의 개념과 조건을 완전히 변화시키고 있다. 비슷하게, 도시 생활의 문화와 그 욕구가 증가하여, 도시들과 도시인들이 불어나고 또 도시 생활이 시골 사람들에게까지 확산되고 있다.
사회 커뮤니케이션의 효율적인 새로운 수단들이 여러 사건들을 알리고 사상과 감정을 매우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확산시키는 데 기여하여 수많은 연쇄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또 수많은 사람이 여러 가지 이유로 이주하게 되고 거기에서 자신의 생활 방식을 바꿀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사실도 경시할 수 없다.
이렇게 서로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리는 인간 관계가 끊임없이 증가되고 동시에 ‘사회화’ 자체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있지만, 사회화가 언제나 적절한 인격 성숙과 진정한 인간 관계(‘인간화’)를 증진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경제 발전과 기술 진보의 편의를 이미 누리고 있는 나라들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이는 또한 자기 지역에서 산업화와 도시화의 혜택을 얻고자 열망하는 민족들이 여전히 개발 노력을 기울이도록 부추기고 있다. 그러한 민족들은, 특히 더 오랜 전통을 지닌 민족들은 동시에 더욱 성숙하게 더 개인적으로 자유를 행사하려는 움직임을 겪고 있다.
정신과 도덕, 종교의 변화
7. 인간 정신과 사회 구조의 변화는 흔히 기존 가치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서 그렇다. 젊은이들은 때때로 인내심을 잃고 또 고뇌로 반항하기도 하며, 사회 생활에서 자신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더 일찍 사회 생활에 참여하기를 바란다. 이 때문에 흔히 부모들과 교육자들은 자신의 임무 수행에서 날로 더욱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실제로 선대에서 물려받은 제도와 법규, 사고 방식과 생활 감정이 오늘날의 현실 상황에 언제나 잘 맞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행동 방식과 그 규범에 중대한 혼란이 일어난다.
마침내 새로운 상황은 종교 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편으로, 더욱더 날카로워진 비판력이 마술적인 세계관과 아직도 떠도는 미신에서 종교를 정화하고, 날로 더욱 인격적이고 적극적인 신앙 생활을 요구한다. 이로써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더욱더 생생하게 깨닫게 된다. 또 한편으로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종교 실천에서 멀어지고 있다. 지난 시대와 달리, 신이나 종교를 부정한다거나 거기에서 이탈한다는 것은 더 이상 이상하거나 유별난 일이 아니다. 오늘날 이는 마치 과학의 진보나 어떤 새로운 인본주의의 요구처럼 드물지 않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여러 지역에서 철학자들의 주장으로 표현될 뿐 아니라, 문학, 예술, 인문 과학과 역사 해석, 그리고 국가 법률에까지 널리 영향을 미쳐,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동요되고 있다.
현대 세계의 불균형
8. 이토록 급속한 사태의 변화, 흔히 무질서하게 진행되는 변혁은 물론, 세상에 가득 찬 불평등에 대한 한층 더 예리한 의식 그 자체가 모순과 불균형을 낳고 또 심화시킨다.
인간 자체에서도 현대의 실천적 지성과 이론적 사색 사이에 더욱더 자주 불균형이 일어나, 자기 지식의 총체를 지배하지도 못하고 이를 종합하여 직접 정리하지도 못한다. 또한 실용 능률의 추구와 도덕적 양심의 요구 사이에서, 또 사회 생활 조건과 개인의 사색과 명상의 요구 사이에서 자주 불균형이 생겨난다. 끝으로, 인간 활동의 전문화와 사물의 전체적 전망 사이에서 불균형이 일어난다.
그리고 가정에서는 인구, 경제, 사회의 중압적인 조건에서, 또는 세대 차에서 오는 어려움에서, 또는 남녀간의 새로운 사회 관계에서 불평등이 생겨난다.
또한 여러 종족들 사이뿐 아니라 사회의 여러 계층 사이에서, 부강한 나라와 빈약한 나라 사이에서, 여러 민족들이 평화 염원으로 만든 국제 기구와 자기 이념 선전의 야욕은 물론 국가나 다른 단체의 집단적 탐욕 사이에서 커다란 불평등이 생겨나고 있다.
거기에서 상호 불신과 증오, 분쟁과 환난이 일어나, 인간 자신이 바로 그 원인이 되고 동시에 희생제물이 된다.
인류의 보편적인 열망
9. 그러면서도 피조물들에 대한 지배를 날로 더욱 강화할 수 있고 또 강화하여야 한다는 인류의 확신이 커져 간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날로 더 나은 봉사를 하고 개인과 집단이 본연의 존엄을 긍정하고 발전시키도록 도와 주는 그러한 정치, 사회, 경제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 인류의 의무라는 확신도 커져 가고 있다.
여기에서 많은 사람들은 뚜렷한 의식을 지니고 불의와 불공정 분배로 착취당하였다고 여기는 저 재산을 치열하게 요구하고 있다. 최근에 독립한 나라들과 같은 개발 도상국들은 정치 분야뿐 아니라 경제 분야에서도 현대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자 하며 세계에서 자신의 역할을 자유로이 수행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더 빨리 발전하는 다른 부유한 나라들과 개발 도상국들의 격차는 날로 커져 가고 동시에 흔히 경제적 예속도 심화되고 있다. 굶주림에 짓눌린 사람들이 더 부유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호소하고 있다. 남녀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법률과 실제에서 여자들이 남자들과 같은 평등권을 요구하고 있다. 노동자들과 농어민들은 생활 필수품을 마련하고 노동으로 자기 인격을 발전시키고자 하며, 경제, 사회, 정치, 문화 생활 조직에도 참여하기를 바란다. 이제야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모든 민족이, 문화 혜택은 실제로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질 수 있고 또 베풀어져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 모든 요구의 이면에는 더 깊고 더욱 보편적인 열망이 감추어져 있다. 곧 개인과 집단이 인간 품위에 알맞은 만족스럽고도 자유로운 삶, 현대 세계가 인간에게 그토록 풍요롭게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스스로 누리는 그러한 삶을 갈망하고 있다. 더욱이 여러 나라들이 하나의 세계 공동체를 형성하려고 날로 더욱 힘찬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다 보니, 현대 세계는 동시에 강하면서도 약하고, 최선을 이루거나 최악을 저지를 수 있으며, 자유와 예속, 진보와 퇴보, 형제애와 증오의 길이 열려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은 스스로 불러일으킨 힘들이 인간을 억압할 수도 있고 인간에게 봉사할 수도 있으므로 그 힘들을 바르게 다스리는 것이 인간 자신의 책임임을 깨닫게 된다. 여기에서 인간은 스스로 묻는다.
인류의 심각한 의문
10. 참으로현대 세계를 괴롭히는 불균형은 인간의 마음 속에 뿌리박힌 더욱 근본적인 저 불균형에 직결되어 있다. 바로 인간 자체 안에서 여러 요인들이 서로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피조물로서 여러 가지로 자기 한계를 체험하면서도 다른 편으로는 참으로 무한한 자기 욕망을 느끼며 더 높은 삶으로 부름 받았음을 자각하고 있다. 수많은 유혹에 이끌리는 인간은 끊임없이 어떤 취사 선택을 강요당하고 있다. 더구나 인간은 연약하고 또 죄인이므로 바라지 않는 일을 하고 바라는 일을 하지 않는 수가 드물지 않다.4) 그래서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서 분열을 겪고 있으며 바로 거기에서 이토록 허다한 사회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실제로 실천적 유물론에 젖어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을 분명하게 인식하기를 외면하며, 그리고 불행에 짓눌린 사람들은 이를 생각해 볼 겨를도 없다. 많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제시되는 사물의 해석에서 스스로 안식을 찾았다고 여긴다. 또 어떠한 사람들은 오로지 인간의 노력만으로 진정하고 완전한 인류 해방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하며, 장차 지구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자기 마음의 온갖 소망을 채워 주리라는 자기 확신을 지니고 있다. 또한 인생의 의미에 절망한 나머지 인간 실존은 고유한 의미가 전혀 없다고 여기며 오로지 인간의 능력만으로 인생에 모든 의미를 부여해 보려고 노력하는 자들의 만용을 찬미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그렇지만 세계의 현재 발전을 직시하며 가장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거나 새삼 예민하게 절감하는 사람들이 날로 더욱 많아지고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토록 커다란 발전이 이루어졌음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고통과 불행과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막대한 대가를 치르고 얻은 저 승리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인간은 사회에 무엇을 줄 수 있고 또 사회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이 지상 생활 다음에는 무엇이 따라오는가?
교회는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으며5) 당신 성령을 통하여 인간에게 빛과 힘을 주시어 인간이 자신의 드높은 소명에 응답할 수 있게 하셨다고 믿는다. 또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다른 이름은 하늘 아래에서 아무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다고 믿는다.6) 마찬가지로 교회는 인류 역사 전체의 관건과 중심과 목적을 자신의 스승이신 주님 안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더 나아가서 교회는 모든 변천 속에도 변하지 않는 많은 것이 들어 있으며, 그 불변의 것들은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그리스도7) 안에 궁극의 토대를 두고 있다고 확언한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습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신 그리스도의8) 빛 아래에서 공의회는 인간의 신비를 밝히고 현대의 주요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데에 협력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고자 한다.
성령의 인도에 따르는 응답
11. 하느님의 백성은 온 누리에 충만하신 주님의 성령께 인도되고 있음을 믿는 그 신앙에 따라, 현대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참여하는 사건과 요구와 염원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그 계획의 진정한 징표가 무엇인지 알아 내려고 노력한다. 신앙이야말로 모든 것을 새로운 빛으로 밝혀 주고 인간의 소명 전체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 주며, 따라서 참으로 인간적인 해결로 마음을 이끌어 준다.
공의회는 특히 오늘날 가장 높이 평가되고 있는 저 가치들을 신앙의 빛으로 식별하고 그 신적 원천에 비추어 판단하고자 한다. 이러한 가치들은 하느님께 받은 인간 재능에서 나오므로 매우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 가치들은 인간 마음의 타락으로 그 올바른 방향에서 벗어나는 일이 드물지 않으며 따라서 정화가 필요하다.
교회는 인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현대 사회의 건설을 위하여 무엇을 권고하여야 한다고 보는가? 전세계에서 인간 활동의 궁극 의미는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대답이 기대되고 있다. 여기에서 인류와 그 속에 사는 하느님의 백성이 서로 봉사하며, 교회의 사명이 종교적이고, 또 바로 이 사실 자체에서, 지극히 인간적이라는 것이 더욱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
12. 세상 만물은 인간을 그 중심과 정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에는 신자이든 비신자이든 거의 일치한다.
그러면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제 자신에 대하여 다양하고도 상반되는 수많은 의견을 내놓았고 또 내놓고 있다. 흔히 인간을 절대적 규범으로 들어 높이거나 또는 절망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무시하며, 거기에서 회의와 고뇌를 한다. 이러한 어려움을 잘 알고 있는 교회는 계시하시는 하느님의 가르침으로 거기에 대답을 할 수 있고, 그 대답으로 진정한 인간의 조건을 그리고 그 연약함을 밝히는 동시에 인간의 존엄과 소명을 올바로 깨닫게 할 수 있다.
성서에서 가르치는 대로,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고, 자기 창조주를 알고 사랑할 수 있으며, 창조주로부터 세상 만물의 주인공으로 세워져1) 만물을 다스리고 이용하며 하느님을 찬양한다.2) “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나이까. 그 종락 무엇이기에 따뜻이 돌보시나이까. 천사들보다는 못하게 만드셨어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나이다.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삼라 만상을 그의 발 아래 두시었나이다”(시편 8,5-7[4-6]).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외롭게 창조하지 않으시고 처음부터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지어 내셨으며”(창세 1,27), 남녀의 결합이 인간 사회의 최초 형태를 이루었다. 인간은 그 깊은 본성에서 사회적 존재이므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도 없고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성서에 다시 나오는 대로,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31).
죄
13 .하느님께서 의롭게 창조하신 인간은 그러나 악의 유혹에 넘어가 역사의 시초부터 제 자유를 남용하여, 하느님께 반항하고 하느님을 떠나서 제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다. 그들은 하느님을 알았지만 그분을 하느님으로 찬양하지 않았고,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이 어둠으로 가득 차 창조주보다는 오히려 피조물을 섬겼다.3) 하느님의 계시로 우리에게 알려진 이 사실은 바로 우리의 경험과 일치한다. 인간이 제 마음을 살펴볼 때, 선하신 자기 창조주에게서는 올 수 없는 악에 기울어져 있고 수많은 죄악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은 흔히 하느님을 자기 자신의 근원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며, 자신의 궁극 목적을 지향하는 당연한 질서마저 무너뜨리고 동시에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과 이루는 조화를 깨트려 버렸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 안에서 분열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인간의 모든 삶은 개인 생활이든 사회 생활이든 참으로 선과 악, 빛과 어둠의 극적인 투쟁으로 드러난다. 더욱이 인간은 자기 자신만으로는 악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이겨 낼 수 없음을 깨닫고, 또 누구든지 저마다 사슬에 묶여 있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인간을 해방하시고 그 힘을 북돋아 주시려고 주님께서 친히 오시어 인간을 내적으로 새롭게 하시고, 인간을 죄의 종살이에 묶어 두었던 “이 세상의 통치자”(요한 12,31)를 밖으로 쫓아 내시었다.4) 죄는 인간을 위축시켜 완성을 추구하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인간들이 체험하는 드높은 소명과 깊은 불행은 바로 이 계시의 빛 속에서 그 궁극 이유를 발견한다.
인간의 구조
14. 육체와 영혼으로 단일체를 이루는 인간은 그 육체적 조건을 통하여 물질 세계의 요소들을 자기 자신 안에 모으고 있다. 이렇게 물질 세계는 인간을 통하여 그 정점에 이르며 창조주께 소리 높여 자유로운 찬미를 드린다.5) 그러므로 인간은 육체적 생활을 천시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반대로 인간은 하느님께 창조되고 마지막 날에 부활할 자기 육체를 좋게 여기고 존중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죄로 상처받은 인간은 육체의 반역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성 자체가 자기 육체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요구하고6) 육체가 마음의 악한 경향을 따르게 내버려 두지 않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육체적 관심사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깨닫고 또 자신이 자연의 한 조각이거나 인간 사회의 한 무명 요소일 수만은 없다고 여겨도 속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그 내면성으로 만물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마음 속으로 돌아갈 때 이 깊은 내면성을 찾는 것이고, 거기에서 속마음을 들여다보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기다리고 계시며,7) 바로 하느님의 눈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자기 자신 안에서 영적인 불멸의 영혼을 인식하게 될 때에 인간은 다만 물리적 사회적 조건에서 흘러 나오는 허상에 우롱당하지 않고 오히려 정반대로 사물의 심오한 진리 자체와 만나게 되는 것이다.
지성의 존엄, 진리와 지혜
15. 하느님의 지성의 빛을 나누어 받은 인간이 자기 지성으로 만물을 초월한다고 하는 것은 옳은 판단이다. 인간은 오랜 세기에 걸쳐 꾸준히 자기 재능을 발휘하여 경험 과학, 기술, 학문 예술에서 발전을 거듭하여 왔으며, 또한 현대에 이르러서는 특히 물질 세계의 탐구와 정복으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인간은 언제나 더욱 심오한 진리를 탐구하고 또 발견하였다. 실제로 인간 지성은 오로지 현상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므로, 비록 죄의 결과로 어느 정도 흐려지고 나약해지기는 하였지만, 실재를 참으로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다.
인간의 지적 본성은 마침내 지혜를 통하여 완성되고 또 완성되어야 한다. 지혜는 인간 정신이 참되고 좋은 것을 찾고 사랑하도록 부드럽게 이끌어, 지혜를 지닌 인간은 보이는 것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것에 이르게 된다.
인간이 찾아 내는 온갖 새로운 것들을 더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자면, 현대에는 지난 세기들보다 더욱더 이러한 지혜가 필요하다. 실제로 더욱더 지혜로운 사람들이 일어서지 않으면 세계의 미래 운명은 위기에 빠질 것이다. 더 나아가서, 경제적으로는 가난하지만 풍요로운 지혜를 지닌 여러 민족들이 다른 민족들에게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여야 한다.
성령의 은혜로 인간은 하느님 계획의 신비를 바라보고 믿음으로 깨달을 수 있다.8)
도덕적 양심의 존엄
16. 인간은 양심의 깊은 곳에서 법을 발견한다. 이 법은 인간이 자신에게 부여한 법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이 거기에 복종하여야 할 법이다. 그 소리는 언제나 선을 사랑하고 실행하며 악을 회피하도록 부른다. 필요한 곳에서는 마음의 귀에 대고, 이것을 하여라, 저것을 삼가라 하고 타이른다. 이렇게 인간은 하느님께서 자기 마음 속에 새겨 주신 법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 법에 복종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존엄이며 이 법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9) 양심은 인간의 가장 은밀한 핵심이며 지성소이다. 거기에서 인간은 홀로 하느님과 함께 있고 그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다.10) 양심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이행되는 저 율법을11) 놀라운 방법으로 알려 준다. 양심에 충실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결합되어 진리를 추구하고 개인 생활과 사회 관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도덕 문제들을 진리 안에서 해결하게 된다. 그러므로 바른 양심이 우세하면 할수록 개인이나 집단이 무분별한 방종에서 더욱 멀어지고 객관적 도덕 기준에 부합하도록 더욱 노력한다. 어쩔 수 없는 무지에서 양심이 잘못을 저지르는 수도 드물지 않지만, 양심이 그 존엄성을 잃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진리와 선을 추구하는 데에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고 죄의 습관으로 양심이 차츰 거의 다 어두워졌을 때에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자유의 우월성
17. 오로지 자유로이 인간은 선을 지향할 수 있다. 현대인은 자유를 중시하고 또 열렬히 추구한다. 참으로 옳다. 그러나 자주 그릇된 방법으로 자유를 옹호한다. 자신을 즐겁게만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악이라도 할 수 있다는 방종까지도 자유라고 옹호한다. 그러나 참 자유는 인간 안에 있는 하느님 모습의 탁월한 표징이다.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제 의지의 손에 맡겨 두고자 하셨다.12) 그것은 인간이 자유 의지로 자신의 창조주를 찾아 그분을 따르며 자유로이 충만하고 복된 완전성에 이르도록 바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성은 의식적이고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행동하도록 요구한다. 곧 맹목적인 내부 충동이나 순전한 외부 강박 아래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적 동기와 권고에 따라 인격적으로 행동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온갖 욕정의 예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선을 선택하여 자기 목적을 추구하고 적절한 도움을 받아 효과적으로 슬기롭게 행동할 때에 인간은 이러한 존엄성을 얻는다. 그러나 죄로 손상된 인간의 자유는 하느님 은총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지향을 완전히 실현할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은 저마다 자기가 한 선악에 따라 하느님의 법정에서 자기 일생에 대한 셈을 치러야 할 것이다.13)
죽음의 신비
18. 죽음 앞에서 인간 운명의 수수께끼는 절정에 이른다. 인간은 꺼져 가는 육체의 쇠약과 고통에 괴로워할 뿐 아니라 영원한 소멸의 공포에 더더욱 괴로워한다. 바로 자기 마음의 본능에 따라 그렇게 여기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완전한 몰락과 결정적인 파멸을 배척하고 거부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영원의 씨앗은 한갓 물질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어서 죽음을 거슬러 일어선다. 온갖 기술의 시도가 제아무리 유익하다 하여도 인간의 불안을 해소시킬 수는 없다. 생물학적 수명의 연장은 인간의 마음 속에 결코 지울 수 없이 새겨진 저 피안의 삶에 대한 갈망을 만족시킬 수 없다.
죽음 앞에서는 온갖 상상이 다 힘을 잃어버리지만, 하느님의 계시를 받은 교회는 인간이 지상 불행의 한계를 넘어 행복한 목적을 위하여 하느님께 창조되었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서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육체의 죽음도 없었을 것이며,14) 인간이 자기 죄로 잃어버린 구원을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구원자께서 다시 회복시켜 주실 때에 죽음은 패배를 당할 것이라고 그리스도교 신앙은 가르친다. 하느님께서는 영원 불멸하는 신적 생명의 친교 안에서 전 존재로 당신을 따르도록 인간을 부르셨고 또 부르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 승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인간을 죽음에서 해방시키시고 생명으로 부활하시어 거두신 것이다.15) 따라서 확고한 논증에 바탕을 둔 신앙은 깊이 생각하는 모든 사람에게 미래의 운명에 대한 그의 불안에 해답을 준다. 또한 동시에 신앙은 이미 죽음으로 먼저 빼앗긴 사랑하는 형제들과 더불어 그리스도 안에서 친교를 이루는 힘을 주며, 그들이 하느님 곁에서 참 생명을 얻었으리라는 희망을 가져다 준다.
무신론의 형태와 근원
19. 인간 존엄성의 빼어난 이유는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도록 부름 받은 인간의 소명에 있다. 인간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과 대화하도록 초대받는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창조되고 언제나 하느님의 사랑으로 보존되지 않는다면 인간은 결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 사랑을 자유로이 인정하고 자기 창조주께 자신을 맡겨 드리지 않고서는 인간은 온전히 진리를 따라 살아갈 수 없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과 이토록 친밀한 생명의 결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거나 노골적으로 배척하고 있다. 따라서 무신론은 현대의 극히 중대한 문제로 여겨야 하고 더욱더 치밀한 검토를 하여야 한다.
무신론이란 말은 서로 매우 다른 현상들을 가리킨다. 명백히 신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인간은 신에 대하여 전혀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신에 대한 문제가 무의미하게 보이도록 하는 그러한 방법으로 문제를 다루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은 부당하게도 실증 과학의 한계를 넘어서 만사를 과학 이론만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거나 그와 반대로 더 이상 어떠한 절대 진리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 거의 무력해질 정도로 인간을 들어 높인다. 신 부정보다는 인간 긍정에 더 기울어진 것으로 보인다. 다른 사람들은 스스로 신을 만들어 놓고 그 형상을 부정하지만, 그러한 신은 결코 복음의 하느님이 아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신에 관한 문제를 전혀 다루지도 않는다. 그들은 종교적 불안을 체험하지도 못하는 것 같고, 종교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조차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무신론은 세상의 죄악에 대한 격렬한 저항에서 생기고 또는 어떤 인간 가치를 부당하게 절대화하여 그것이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해 버리는 데에서 생기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바로 현대 문명이, 그 자체가 그렇지는 않더라도 지상 사물에 너무 얽혀 있어, 흔히 하느님께 대한 접근을 더욱 어렵게 할 수 있다.
분명히 자유 의사로 자기 마음에서 하느님을 몰아 내고 종교 문제를 회피하여 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 양심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것이므로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흔히 신앙인들 자신도 어느 정도 여기에 대한 책임을 지니고 있다. 무신론이란 전체적으로 보아 원초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 가지 원인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그 원인들 가운데에는 종교에 대한 비판적 반동, 어떤 지역에서는 특히 그리스도교에 대한 반발이 보태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이 신앙 교육을 소홀히 하거나 교리를 잘못 제시하거나 종교, 윤리, 사회 생활에서 결점을 드러내어 하느님과 종교의 참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려 버린다면, 신앙인들은 이 무신론의 발생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체계적 무신론
20. 현대 무신론은 흔히 체계적 형태를 드러내는데, 다른 이유들도 있겠지만, 그 형태는 인간 자율의 열망을 지나치게 펼쳐 신에 대한 어떠한 의존도 어렵게 만들어 버린다. 이러한 무신론을 주창하는 자들은 인간이 스스로 자기 목적이 되고 고유한 자기 역사의 유일한 창조자요 형성자가 되는 데에 인간의 자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곧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목적이신 주님께 대한 긍정과 자유는 양립할 수 없다거나 적어도 자유는 그러한 신 긍정을 완전히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현대의 기술 발전이 인간에게 가져다 준 만능 의식이 이러한 이론을 주장할 수 있다.
현대 무신론의 형태 가운데에서 인간 해방을 특히 경제적 사회적 해방에서 기대하는 무신론을 간과할 수 없다. 종교는 본질상 이러한 인간 해방에 장애가 된다고 주장한다. 종교가 인간에게 허황된 내세의 삶에 대한 희망을 일으켜, 지상 국가의 건설을 외면하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론의 지지자들이 국가 통치를 장악하고 있는 곳에서는 종교를 맹렬히 공격하며, 특히 청소년 교육에서 공권력이 동원할 수 있는 압력 수단을 다하여 무신론을 전파하고 있다.
무신론에 대한 교회의 태도
21. 하느님과 인간을 충실히 섬기는 교회는, 슬프게도 인간 이성과 공통 경험에 반대될 뿐 아니라 인간을 그 고귀한 천품에서 추락시키는 저 위험한 이론과 운동을 과거에 배격하였던 것과 같이 단호히 배척한다.16)
그러나 교회는 무신론자들의 마음 속에서 신 부정의 숨은 이유를 찾아 내려고 노력하며, 무신론이 일으키는 문제들의 중요성을 깨닫고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에 이끌려 문제들을 진지하게 또 깊이 검토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신 긍정이 인간 존엄성에 결코 배치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존엄성은 바로 하느님 안에 기초를 두고 하느님 안에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느님께 지성과 자유를 지닌 사회적 존재로 창조되었고 더욱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며 하느님의 행복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더 나아가서 종말론적 희망이 지상 임무의 중요성을 감소시키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동기를 주어 지상 임무의 완수에 도움을 준다고 가르친다. 그와 반대로 하느님께 기초를 두지 않고 영생에 대한 희망이 없으면, 오늘날 흔히 그러하듯 인간의 존엄성은 극심히 손상될 것이며, 생명과 죽음, 죄와 고통의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아 사람들은 흔히 절망에 빠지고 말 것이다.
한편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어렴풋이만 이해되는 미결의 문제로 남아 있다. 실제로 어떤 기회에, 특히 인생의 주요 사건에서 앞서 말한 의문을 아무도 완전히 회피할 수는 없다. 이 물음에 오로지 하느님께서만 완전하고 가장 확실하게 답변하여 주신다. 하느님께서는 더 높은 사색과 더욱 겸허한 탐구로 인간을 부르신다.
그러므로 무신론의 치유는 한편으로는 교리의 올바른 제시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와 그 구성원들의 완전한 삶에서 기대하여야 한다. 교회가 할 일은 하느님 아버지와 강생하신 하느님의 아들을 마치 눈에 보이듯이 제시하고 성령의 인도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쇄신하고 정화하는 것이다.17) 그것은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성숙한 신앙의 증거, 곧 어려움을 분명히 알고 이겨 낼 수 있도록 훈련받은 신앙의 증거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빛나는 신앙의 증거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보여 주었고 또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신앙이 신자들의 전 생활에, 세속 생활에까지 젖어들어 신자들이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게 함으로써 그 풍요성을 드러내어야 할 것이다. 마침내, 한마음 한뜻으로 복음에 대한 믿음을 위하여 함께 분투하며18) 일치의 표지로 드러나는 신자들의 형제애는 하느님의 현존을 보여 주는 데에 매우 크게 기여한다.
그러나 교회는, 비록 무신론을 완전히 배격하지만,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모든 사람은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을 바로 건설하도록 힘을 합쳐야 한다고 진정으로 선언한다. 이는 분명히 진지하고 신중한 대화가 없다면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떤 국가의 지도자들이 인간의 기본권을 인정하지 않고 불의하게 자행하는,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별을 개탄한다. 그리고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 세상에 하느님의 성전도 세울 수 있는 실질적 자유를 요구한다. 또한 무신론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열린 마음으로 깊이 생각해 보도록 정중하게 권유한다.
교회가 이미 인간의 드높은 운명에 실망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되살려 주며 인간 소명의 존엄성을 수호할 때에 교회는 자신의 메시지가 인간 마음의 가장 깊은 열망과 일치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교회의 메시지는 인간을 위축시키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발전을 위하여 빛과 생명과 자유를 쏟아부어 준다. 또한 그 밖에는 아무것도 인간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없다. “주님, 주님을 위하여 저희를 내셨기에, 주님 안에 쉬기까지는 저희 마음이 찹찹하지 않삽나이다.”19)
새 인간 그리스도
22. 실제로,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 안에서만 참으로 인간의 신비가 밝혀진다. 첫 인간 아담은 장차 오실 분, 곧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예형이었다.20) 새 아담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신비와 그 사랑의 신비를 알려 주는 바로 그 계시 안에서 인간을 바로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 주시고 인간에게 그 지고의 소명을 밝혀 주신다. 그러므로 앞서 말한 진리들이 그리스도 안에 그 근원을 두고 그분 안에서 그 정점에 이른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골로 1,15)21)이신 그분께서는 완전한 인간이시며, 아담의 후손들에게 최초의 범죄 때부터 이지러졌던, 하느님과 닮은 모습을 회복시켜 주셨다. 그분 안에 받아들여진 인간 본성이 소멸되지 않았으므로,22)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우리 안에 있는 인간 본성도 고상한 품위로 들어 높여졌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바로 그분께서 당신의 강생으로 당신을 모든 사람과 어느 모로 결합시키셨기 때문이다. 인간의 손으로 일하시고 인간의 정신으로 생각하시고 인간의 의지로 행동하시고23) 인간의 마음으로 사랑하셨다.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어 참으로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셨으며, 죄 말고는 모든 것에서 우리와 같아지셨다.24)
무죄한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자유로이 흘리신 당신 피로 우리에게 생명을 얻어 주셨고, 또 그분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과 화해시키시고 우리를 서로 화해시켜 주셨으며25) 악마와 죄의 종살이에서 우리를 구해 내시어, 우리가 누구나 사도와 함께 이렇게 말할 수 있게 하셨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 주셨다”(갈라 2,20). 우리를 위하여 수난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모범을 보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26) 또또한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다. 우리가 그 길을 따른다면, 삶과 죽음이 거룩하게 되고 새로운 뜻을 가지게 된다.
많은 형제 가운데 맏아들이신27) 성자의 모습을 닮게 된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첫 선물로”(로마 8,23) 받아, 그 선물로써 사랑의 새 계명을 지킬 수 있게 된다.28) “상속의 보증”(에페 1,14)이신 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 몸이 해방될”(로마 8,23) 때까지 온 인간이 내적으로 쇄신된다.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신 당신의 성령을 시켜 여러분의 죽을 몸까지도 살려 주실 것입니다”(로마 8,11).29) 분명히 수많은 환난 가운데에서 악을 거슬러 싸우고 죽음까지도 겪어야 할 필요와 의무가 그리스도인을 재촉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파스카 신비에 결합되고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화되어 부활을 향한 희망으로 힘차게 나아갈 것이다.30)
이것은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그 마음에서 은총이 보이지 않게 움직이고 있는 선의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들어맞는 말이다.31)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32) 또 인간의 궁극 소명도 참으로 하나 곧 신적인 소명이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하느님만이 아시는 방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이 파스카 신비에 동참할 가능성을 주신다고 믿어야 한다.
인간의 신비는 이와 같이 위대한 것이며, 이것은 그리스도교 계시를 통하여 믿는 이들에게 밝혀지는 신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고통과 죽음의 수수께끼가 밝혀지며, 그분의 복음을 떠나면 우리는 그 수수께끼에 짓눌려 버린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으로 죽음을 쳐부수고 부활하셨으며, 풍성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33) 우리가 성자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성령 안에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34)
공의회의 의도
23. 현대 세계의 주요 양상 가운데 하나는 인간 상호 관계의 복합성이며, 그러한 전개에는 현대 기술의 진보가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형제적 대화는 이러한 진보가 아니라 인간 공동체 안에서 더 깊이 이루어진다. 그 대화는 인간의 완전한 정신적 존엄에 대한 상호 존중을 요구한다. 참으로 그리스도교 계시는 이러한 인간 친교의 증진에 커다란 도움을 주는 동시에 창조주께서 인간의 정신적 도덕적 본성에 새겨 주신 사회 생활 법칙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준다.
교회 교도권의 최근 문서들이 인간 사회에 관한 그리스도교 교리를 더 상세히 제시하였으므로1) 공의회로서는 다만 몇 가지 더 중요한 진리만을 상기시키고 그 진리의 토대를 계시의 빛으로 밝힌다. 그런 다음에 우리 시대에 더 중요한 어떤 영향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하느님의 계획 안에 있는 인간 소명의 공동체적 특성
24. 만민을 아버지로서 돌보시는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한 가족을 이루고 서로 형제애로 대접하기를 바라셨다. “한 조상에게서 모든 인류를 내시어 온 땅 위에서 살게 하신”(사도 17,26)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모든 인간은 똑같은 하나의 목적, 바로 하느님께로 부름 받고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첫째가는 가장 큰 계명이다. 성서는 우리에게 하느님 사랑을 이웃 사랑과 떼어 놓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 “그 밖에도 다른 계명이 많이 있지만 그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이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이다”(로마 13,9-10; 1요한 4,20 참조). 날로 더욱 서로 의존해 가는 사람들에게 또 날로 더욱 하나로 합쳐지는 세상에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더욱이 주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21-22) 하시며 성부께 기도하실 때 인간 이성이 미치지 못하는 시야를 열어 주셨으며, 진리와 사랑 안에 있는 하느님 자녀들의 결합과 신적 위격의 결합이 지닌 어떤 유사성을 가리켜 주셨다. 이 유사성은 지상에서 그 자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바라신 유일한 피조물인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주지 않으면 자신을 완전히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2)
개인과 사회의 상호 의존성
25. 개인의 진보와 그 사회의 발전이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인간의 사회적 본성에서 드러난다. 사실 인간은 바로 그 본성에서 반드시 사회 생활이 필요하므로, 모든 사회 제도의 근본도 주체도 목적도 인간이며 또 인간이어야 한다.3) 사회 생활은 인간에게 덧붙여진 우연한 그 무엇이 아니므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상호 의무, 형제적 대화 등으로 인간은 되도록 자신의 모든 재능을 키우고 자기 소명에 응답할 수 있다.
인간 계발에 필요한 사회적 유대들 가운데에서 가정과 정치 공동체 같은 어떤 유대는 인간의 가장 깊은 본성에 더 직접적으로 부합하고, 다른 유대는 오히려 인간의 자유 의사에서 나온다. 현대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상호 관계와 상호 의존성이 날로 복잡해지고 있다. 여기에서 공립이든 사립이든 다양한 연합과 단체가 생겨나고 있다. 사회화라 불리는 이 사실은 실제로 위험도 없지 않지만 개인의 역량을 고취하고 신장시키며 인권을 옹호하도록 수많은 이익을 가져다 주고 있다.4)
인간은 자기 소명, 종교적인 소명의 완수를 위하여 사회 생활에서 많은 것을 얻지만, 사람들이 어려서부터 그 속에 잠겨 살아가는 사회 환경 때문에 흔히 선행에서 멀어지고 악으로 기울어진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빈번히 일어나는 사회 질서의 혼란이 부분적으로는 경제, 정치, 사회 구조의 긴장에서 발생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더 깊숙이는 인간의 오만과 이기주의에서 생겨나며, 이는 또한 사회 영역까지 부패시킨다. 죄의 결과로 사물의 질서가 어지럽혀진 곳에서, 인간은 날 때부터 악에 기울어져 있고 그 다음에도 죄에 대한 새로운 충동과 부딪친다. 줄기찬 노력과 은총의 도움 없이는 이를 이겨 낼 수 없다.
공동선의 증진
26. 날로 더욱 긴밀해지고 점차 전세계로 확산되는 상호 의존성에서, 공동선은─곧 집단이든 구성원 개인이든 자기 완성을 더욱 충만하고 더욱 용이하게 추구하도록 하는 사회 생활 조건의 총화는─오늘날 더욱더 전세계적인 것이 되고 거기에 온 인류와 관련되는 권리와 의무를 내포하게 되었다. 어떠한 집단이든 다른 집단의 요구와 정당한 열망, 더욱이 온 인류 가족의 공동선을 고려하여야 한다.5)
또한 동시에 인간이 지닌 고귀한 존엄성에 대한 의식이 커지고 있다. 인간은 만물에 앞서고 또 인간의 권리와 의무는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참으로 인간다운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에 다가설 수 있어야 한다. 곧 의식주, 생활 신분의 자유로운 선택, 가정 형성, 교육, 노동, 명예, 존경, 적절한 정보, 자기 양심의 바른 규범에 따른 행동, 사생활 보호의 권리 그리고 종교 문제에서도 정당한 자유를 누릴 권리가 인간에게 주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사회 질서와 그 발전은 언제나 인간의 행복을 지향하여야 한다. 사물의 안배는 인간 질서에 종속되어야 하며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친히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6) 하셨을 때에 이를 가리키신 것이다. 사회 질서는 날로 발전하며, 진리에 토대를 두고, 정의 위에 세워져 사랑으로 활력에 넘쳐야 한다. 또한 자유에서는 날로 더욱 인간적인 균형을 잡아야 한다.7) 그리고 이렇게 되려면 정신의 개혁과 더불어 광범한 사회 변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오묘한 섭리로 시간의 흐름을 다스리시며 누리의 모습을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의 성령께서 이러한 발전을 도와 주신다. 또한 복음의 누룩이 인간 존엄의 억누를 수 없는 요구를 마음 속에 불러일으켰고 또 불러일으키고 있다.
인간 존중
27. 실천적이고 더욱 긴급한 결론을 내려서, 공의회는 인간에 대한 존중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은 저마다 이웃을 어떠한 예외도 없이 또 하나의 자신으로 여겨야 하고 무엇보다도 이웃의 생활을 고려하여 그 생활을 품위 있게 영위하는 데에 필요한 수단들을 보살펴야 한다.8) 가난한 라자로를 조금도 돌보지 않았던 저 부자를 닮아서는 안 된다.9)
특히 현대에서는 우리 자신이 그 누구에게나 이웃이 되어 주고 누구를 만나든지 적극적으로 봉사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은 노인이든, 불의하게 천대받는 외국인 노동자이든, 피난민이든, 불법적인 결합으로 태어나 자기가 짓지 않은 죄 때문에 부당하게 고통을 받는 어린이이든, 그리고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하신 주님의 말씀을 상기시키며 우리 양심에 호소하는, 굶주리는 사람들을 도와 주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 온갖 살인, 집단 학살, 낙태, 안락사, 고의적인 자살과 같이 생명 자체를 거스르는 모든 행위; 지체의 상해, 육체와 정신을 해치는 고문, 심리적 억압과 같이 인간의 온전함에 폭력을 자행하는 모든 행위; 인간 이하의 생활 조건, 불법 감금, 추방, 노예화, 매매춘, 부녀자와 연소자의 인신 매매와 같이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 또한 노동자들이 자유와 책임을 지닌 인간이 아니라 이윤 추구의 단순한 도구로 취급당하는 굴욕적인 노동 조건; 이 모든 행위와 이 같은 다른 행위들은 참으로 치욕이다. 이는 인간 문명을 부패시키는 한편, 불의를 당하는 사람보다도 그러한 불의를 자행하는 자들을 더 더럽히며, 창조주의 영예를 극도로 모욕하는것이다.
반대자에 대한 존경과 사랑
28. 사회, 정치, 종교 문제에서 우리와 달리 생각하고 달리 행동하는 사람들까지도 우리는 존경하고 사랑하여야 한다. 우리가 참으로 친절과 사랑으로 그들의 사고 방식을 더 깊이 이해할수록 그들과 더욱 쉽게 대화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이러한 사랑과 호의가 진리와 선에 대하여 우리를 무관심하게 만들어서는 결코 안 된다. 오히려 바로 그 사랑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진리를 선포하도록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재촉하고 있다. 그러나 오류와 오류를 저지르는 사람을 구별하여야 한다. 오류는 언제나 배격하여야 하지만, 오류를 저지르는 사람은 비록 그릇되거나 부정확한 종교적 개념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언제나 인간 존엄성을 간직하고 있다.10) 하느님 홀로 심판자이시며,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누구의 내적인 죄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11)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우리가 받은 모욕까지 용서하라고 요구하며, 사랑의 계명을 모든 원수에게까지 확대시킨다. 이것이 신약의 계명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3-44).”12)
모든 사람의 본질적 평등과 사회 정의
29. 모든 사람이 이성적 영혼을 갖추고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어 같은 본성과 같은 기원을 가지고 있으므로, 또 그리스도께 구원을 받고 동일한 신적 소명과 목적을 지니고 있으므로, 모든 사람의 근본적 평등은 더욱더 인정을 받아야 한다.
분명히 육체적 능력이 다르고 지성적 도덕적 역량이 다르므로 모든 사람이 동등하지는 않다. 그러나 인간 기본권에서 모든 형태의 차별, 사회적이든 문화적이든, 또는 성별, 인종, 피부색, 사회적 신분, 언어, 종교에서 기인하는 차별은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극복되고 제거되어야 한다. 그러한 인간 기본권이 아직도 어디에서나 온전히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이를테면 자유로이 배우자를 선택하고 생활 신분을 받아들일 권리, 또는 남성이 받을 수 있는 것과 동등한 교육과 문화의 기회가 여성에게 거부되는 경우가 그렇다.
더욱이 인간들 사이에 정당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평등한 인간 존엄성은 더욱 인간답고 공평한 생활 조건에 이르게 되기를 요구한다. 하나인 인간 가족의 구성원들이나 민족들 사이의 지나친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은 추문을 일으키고, 사회 정의, 평등, 인간 존엄성은 물론 사회적 국제적 평화에 배치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립이든 공립이든 모든 인간 단체는 인간의 존엄과 목적에 봉사하며 온갖 사회적 정치적 예속을 거슬러 줄기차게 투쟁하고 모든 정치 체제 아래에서 인간의 기본권을 수호하도록 진력하여야 한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단체들은 바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때로는 상당히 긴 시간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모든 것 가운데에서 가장 드높은 정신적 실재에 점차 부응해 나가야 한다.
개인주의 윤리의 극복
30. 심각하고 급속한 사태의 변화는 어느 누구도 사태의 추이에 무관심하거나 게으름으로 무기력해져 순전히 개인주의 윤리에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고 더욱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각자 자신의 능력과 타인의 필요에 따라 공동선에 기여하고 사립이든 공립이든 인간의 생활 조건 개선에 이바지하는 단체들을 밀어 주고 도와 줌으로써 정의와 사랑의 의무를 더욱더 잘 이행할 수 있다. 그러나 풍부하고 관대한 견해를 내세우면서도 언제나 실제로는 사회의 요구를 전혀 돌보지 않는 것처럼 살아가는 자들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회의 법률과 규정을 무시한다. 또한 갖가지 사기와 간계로 정당한 세금이나 사회에 대한 다른 의무의 회피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또 다른 사람들은 사회 생활의 어떤 규범들, 예를 들어 보건 위생법이나 차량 운전 법규 등을 경시하며, 자기가 이러한 부주의로 자신과 타인의 생명을 위태롭게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사회적 연대 책임을 현대인의 주요 의무로 여기고 이를 존중하여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한다. 세계가 하나로 결합될수록 더욱 분명히 인간의 임무도 개별 집단을 뛰어넘어 점차 전세계로 확대되어 간다.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려면 반드시 각 개인과 개별 단체들이 스스로 도덕적 사회적 덕을 닦고 그 덕행을 사회에 확산시켜야 한다. 그렇게 하여 필요한 하느님 은총의 도움으로 참으로 새로운 인간, 새로운 인류의 창조자들이 나타나기를 바란다.
책임과 참여
31. 각 개인이 자기 자신과 그 소속 집단에 대한 양심의 의무를 더욱 엄밀하게 이행하려면, 오늘날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수많은 수단을 이용하여 더욱 폭넓은 정신 교양을 쌓도록 부지런히 배워야 한다. 특히 어떠한 사회적 출신이든 모든 청소년의 교육에 힘써 우리 시대가 절실히 요구하는 대로 탁월한 재능만이 아니라 위대한 정신을 갖춘 남자들과 여자들이 일어서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 이러한 책임 의식을 지니게 되려면, 반드시 자신의 존엄을 깨닫고 하느님과 이웃에 헌신하는 자기 소명에 부응할 수 있는 생활 조건이 부여되어야 한다. 인간이 극도의 빈곤 속에 빠지게 되면 인간의 자유는 흔히 더욱 무기력해지고 만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지나치게 안일한 생활에 빠져들어 이를테면 황금의 고독 속에 자신을 가두어 버리면 인간의 자유는 그 가치를 잃어버린다. 그와 반대로 인간이 사회 생활의 불가피한 관계를 인정하고, 인간 관계의 수많은 요구를 받아들이며, 인간 공동체의 봉사에 헌신할 때에 인간의 자유는 더욱 굳건해진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공동 활동에서 자기 역할을 받아들이도록 그 의욕을 북돋워 주어야 한다. 대다수의 국민이 참된 자유로 국사에 참여하도록 하는 국가 제도는 치하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어느 나라든 그 국민의 현실 상황과 국가 권위에 필요한 힘을 고려하여야 한다. 그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집단의 활동에 모든 국민이 쉽게 참여하게 하려면 이 집단들이 사람들을 이끌어들여 다른 이들에게 봉사하도록 만드는 가치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당연히 삶의 의미와 희망의 근거를 다음 세대에 물려줄 수 있는 사람들의 손에 인류의 미래 운명이 놓여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람이 되신 말씀과 인간 연대
32. 하느님께서 인간을 혼자서 살아가도록 하지 않으시고 사회적 결합을 이루도록 창조하신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또한 “사람들을 서로 아무런 연결도 없이 개별적으로 거룩하게 하시거나 구원하시려 하지 않으시고, 오직 사람들이 백성을 이루어 진리 안에서 당신을 알고 당신을 거룩히 섬기도록 하셨다.”13) 구원 이 백성을 이루어 진리 안에서 당신을 알고 당신을 거룩히 섬기도록 하셨다.”13) 구원 역사의 시초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공동체의 지체로서 선택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에게 당신의 계획을 알려 주시고, 그들을 “내 백성”(출애 3,7-12)이라 부르셨으며, 더 나아가서 이 백성과 더불어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으셨다.14)
그러한 공동체적 특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으로 성취되고 완성되었다. 바로 사람이 되신 말씀께서 인간의 운명에 동참하고자 바라셨기 때문이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시고, 자캐오의 집으로 내려가셨으며,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다. 극히 평범한 세상사를 이야기하고 일상 생활의 언어와 표상을 쉽게 활용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인간의 고귀한 소명을 보여 주셨다. 인간 관계, 특히 사회 생활의 근원이 되는 가정의 유대를 거룩하게 하시고 당신 조국의 법률을 자원하여 지키셨다. 당시 그 지역의 노동자 생활을 하고자 하셨다.
설교하실 때에는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서로 형제로서 대접하라고 분명하게 명령하셨다. 기도하실 때에는 당신의 모든 제자가 하나 되기를 간청하셨다. 더욱이 그분께서는 만민의 구세주로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 자신을 바치셨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사도들에게 명령하시어 인류가 하느님의 가족이 되고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 되게 하셨다.
많은 형제들의 맏아들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 후에 당신을 믿음과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 가운데에 당신 성령을 주시어 바로 당신의 몸 안에서, 곧 교회 안에서 새로운 형제적 친교를 이루게 하셨다. 그 안에서는 모든 이가 서로서로 지체를 이루고 주어진 여러 가지 은사에 따라 서로 봉사한다.
이러한 연대는 완성되는 그 날까지 언제나 증진되어야 할 것이다. 그 날, 은총으로 구원된 사람들은 하느님과 형제 그리스도께 사랑을 받는 가족으로서 완전한 영광을 하느님께 드릴 것이다.
문제 제기
33. 인간은 자기 노력과 재능으로 자신의 삶을 더욱 폭넓게 발전시키려고 언제나 분투하여 왔다. 오늘날에는 특히 과학 기술의 도움으로 그 지배권을 거의 온 자연계로 확장하였고 또 끊임없이 확장하고 있다. 또 무엇보다도 국가들 사이의 수많은 교류 수단의 증가에 힘입어 인류 가족은 점차 전세계의 한 공동체임을 자각하고 그렇게 되어 가고 있다. 그리하여 인간은 옛날에 특히 하늘의 힘에 기대하였던 많은 복을 오늘날에는 이미 자신의 노력으로 마련하게 되었다.
이미 온 인류에게 번져 가는 이 거대한 노력 앞에서, 사람들 사이에 많은 물음이 일어나고 있다. 도대체 그러한 노력은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는가?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사용하여야 하는가? 개인이나 사회의 노력은 무슨 목적을 성취하려고 하는가? 하느님 말씀의 유산을 지키며 거기에서 종교적 도덕적 분야의 원리를 길어 올리는 교회는, 언제나 각각의 문제에 대하여 즉각적인 답변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계시의 빛을 모든 이의 경험과 결합시켜 인류가 최근에 들어선 여정을 비추어 주고자 한다.
인간 활동의 가치
34. 개인적 집단적 인간 활동, 곧 인간이 여러 세기를 거쳐 자신의 생활 조건을 개선하려는 저 거대한 노력 그 자체가 하느님의 계획에 부합하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은 믿는 이들에게는 분명한 일이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은 땅과 그 안에 담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세상을 정의와 성덕으로 다스리며,1) 하느님을 만물의 창조주로 알고 자기 자신과 모든 사물을 하느님께 다시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간은 만물을 다스려 하느님의 이름이 온 땅에 빛나게 하여야 한다.2)
이 명령은 또한 모든 일상 활동과 관련된다. 실제로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마련하면서 사회에 적절히 봉사하도록 활동을 해 나가는 남자들과 여자들은 당연히 자기가 자신의 노동으로 창조주의 활동을 펼치고 자기 형제들의 이익을 돌보며 개인의 노력으로 하느님의 계획을 역사 속에서 성취시키는 데에 이바지한다고 여길 수 있다.3)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인간이 자기 재능과 힘으로 만들어 낸 작품들을 하느님의 권능에 배치된다거나 이성적 피조물을 창조주의 경쟁자로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류의 승리는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징표이며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계획의 결실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인간의 능력이 커질수록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인간의 책임도 더욱 확대된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교 메시지가 사람들이 세계 건설을 외면하게 하거나 자기 동료들의 행복을 소홀히 하도록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오히려 그러한 활동을 하도록 의무로써 더욱 단단히 붙들어 매고 있다.4)
인간 활동의 규범
35. 인간 활동은 인간에게서 나오듯이 인간을 지향하고 있다. 실제로 인간은 일을 하면서 사물과 사회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또한 자신을 완성시켜 나아가는 것이다. 많은 것을 배우고 자신의 능력을 기르며 자기를 벗어나 자기를 초월한다. 이러한 성장은, 바로 이해한다면, 모을 수 있는 외적 재산보다 훨씬 값진 것이다. 인간은 무엇을 소유하느냐보다 오히려 어떠한 존재이냐에 따라 가치를 지닌다.